24. 금빛 미래
많은 기사들 앞에서 그에게 가짜 사랑꾼 역할을 시키려고 했던 계획이 전부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오히려 내가 도와준 거 아니야?’
엘로니아는 떫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참 운도 좋다. 그녀는 매번 카르벨의 방문에 속수무책으로 맞이해야만 했는데 말이다.
좋은 기회를 날렸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카르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던 모양이군.”
“비슷하게 됐네요…….”
“무슨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이라고 답하고 싶어지는데.”
“결론적으로 잘 됐으니 된 거 아닐까요?”
“그래 보여.”
카르벨은 마치 제 손바닥 위에 있다는 듯이 여유로웠다.
어쨌거나 돈을 벌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엘로니아는 태연하게 그가 내미는 티타임 초대자 명단을 받았다.
미심쩍은 시선도 곁들여주었다.
명단을 받으러 간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태연하게, 마치 그녀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듯이 굴었다.
흘겨보는 시선을 고스란히 감내하던 카르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 않아도 돼. 옆에 감시를 붙일 정도로 집착이 심하지는 않거든.”
“듣던 소리 중 가장 의외네요.”
매번 수업을 확인하고 보고를 받는 모습과는 딴판인 설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이어진 말이 핵심이었다.
“직접 보면 되니까.”
산뜻하게 말하니, 정말 의미마저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따지고 들자면 그게 더 심한 집착이 아닐까 싶었다.
때문에 엘로니아는 그의 헛소리를 가볍게 넘겼다.
그보다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제가 어제 정신이 없어서 묻는 건데요.”
그는 말을 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어딘가에 제가 티타임 명단이 필요하다고 발설을 했던가요?”
“그 부분은 나도 의외야. 꽤 잘 지켜주고 있어서.”
의외라고 할 것까지야. 대체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이게 아니라면 어떻게 당연하다는 듯이 명단을 가져왔을까. 단순히 잊었다고 생각해서?
카르벨은 툭, 서류를 기다란 손가락으로 가볍게 건드리며 답했다.
“그리 티타임 초대장으로 자랑을 하고 가놓고 다시 찾아왔을 때는 뻔하지.”
얼굴에 다 드러났는지, 척하고 답이 나왔다.
엘로니아는 민망함에 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일부러 시선을 돌리기 위해 받은 명단을 건성으로 넘기자, 그가 물었다.
“갑자기 묘목이 필요하다 했다고.”
“네. 지불해야 할까요?”
안 그래도 공작령의 일부였기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만약 그가 대가를 치르라고 한다면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돈거래는 확실히 해야 한다.
그녀의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새겨진 진리이자, 데브니 남작 부부에게서 배운 철칙이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가진 게 없었기에 내놓을 것도 없었다.
그나마 받을 것이 딱 하나 있는데, 펠런 백작 부인의 티타임이 그 기회였다.
부티크의 소개장만 받아오면 보석 구매 비용의 절반을 받기로 했으니, 그걸로 거래해 볼 심산이었다.
“얼마 생각하세요?”
질문에 그는 대답 대신 측정하는 듯이 뜸을 들였다.
설마하니 비싸게 부르려나. 덜컥 겁이 났다.
괜히 제록 나무라는 사실을 알면 카르벨이 가격을 올리든, 빚을 달든 할 것 같았다.
그는 주고받는 부분에서 확실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그가 더 큰 것을 바라기 전에.
묘목이 제록 나무라는 사실을 알기 전에 말이다.
“아니면 나중에 목검을 만들 만큼이 되면 공작저 기사분들에게 한 자루씩 선물할게요.”
공작령에서 얻은 묘목이니 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카르벨은 여상히 웃었다.
신기하게도 기대감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나중에 제록 나무라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그러는 걸까.
미래를 모르는 그는 간단히 거절했다.
“나는 정보를 더 선호해서. 돈은 이미 충분히 많거든.”
“방금 정말 얄미웠던 거 아시죠?”
“알아. 그대가 퍽 부러워할 법한 말이었단 것도.”
예전 같았으면 바르작거렸을 그녀도 이제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아니면 금빛 미래가 한 걸음 가까워진 덕에 너그러워진 것이던가.
그가 한 말은 얄밉기는 해도 사실이었다.
부러운 것도 인정했다.
반박 대신 침묵을 택하니 그는 상황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목검은 핑계인 것 같고.”
카르벨은 대놓고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살폈다.
이미 답을 알면서도 그녀의 반응을 보듯 짧게 시간을 끌었다.
보여주기식의 행동이었다.
숨길 생각도 없는 연기가 그대로 훤히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거래인가.”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 말고 상단주에게 뜯어먹을 테니까요!”
“이제 목표를 나에게서 다른 이로 바꿨나 보군.”
그는 제법 심각한 투로 말하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정말 뜯어먹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엘로니아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정정할게요. 뜯어먹는 게 아니고 거래로요.”
정작 기다란 손으로 턱을 문지르던 카르벨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능글맞은 미소로 화답했다.
“약혼녀께서 하신다는데. 레이디가 원하는 대로.”
***
상단주 부부에게 연락이 온 것은 공고를 내고도 3일 뒤였다.
카르벨이 보낸 기사들이 묘목을 가져온 것도 그만한 시간이 흘렀다.
특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묘목에 기사들은 의문을 표했다.
“엘로니아 님. 정말 이 나무가 맞습니까?”
“네, 맞아요. 손상되지 않게 잘 보존해주세요.”
“정원에 심으실 거라면 정원사를 따로 불러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기다리면 곧 심을 곳이 생길 거예요.”
태연한 답에 되레 에이미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사이, 어떠한 상단도 지원하지 않았다.
대부분 이유는 엇비슷했다.
‘제록 나무가 헛된 말이라 판단되어서. 혹은 투자 대비 수익이 확실치 않아서.’
일부 제록 나무 묘목을 보여줄 수 있는지 묻기도 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이었다.
‘보나마나 같은 나무를 찾아서 먼저 할 생각이었겠지.’
이렇게 뻔한 사기를 치려는 이들까지 보고 나니, 정직한 이가 그리웠다.
적어도 공작가와 거래했던 상단주는 고용인의 실수이더라도 회피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결국 상단주 부부는 지원했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녀는 지체할 필요도 없이 곧장 상단주와 약속을 잡았다.
기껏 계약 파기까지 한 가문과 다시 만나서인지 그들은 어색해 보였다.
인사를 나누고도 선뜻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상단 부부를 두고 엘로니아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전에 쓰이던 목재가 목검으로 무난하게 쓰이는 소재이던가요?”
이전에 납품하던 나무에 대해 물었다.
아무래도 그 땅을 엎고 제록 나무를 심어야 하니 말이다.
상단 부부는 차분히 답했다.
“예. 가장 흔히 쓰입니다. 구하기도 쉽고, 단단해서요.”
“제가 대련을 보니까 잘 부서지는 것 같던데.”
“아닙니다. 상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부러지지는 않습니다.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요.”
그의 말이 맞는지, 옆에 앉은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주 부부와 재회하기 전.
그를 찾아 온 정원을 돌아다녔다.
다행스럽게도 착한 노움은 잊지 않고 나타나 주었다.
일전에 토지의 위치를 확인해서인지, 그 나름대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노움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내가 두더지 친구들에게 물어봤어.]
두더지면 되레 피해가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짧은 의문이 들었으나 우선 경청했다.
[직접 가본 애들 말로는 토양이 부드러워서 좋다고 하더라! 심고 나면 내가 가끔 확인하면 되겠고, 자라는 것도 님프가 도와줄 거야.]
얼마나 오래 걸릴지 벌써 아득했다.
묘목이 자라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실제로 기사들이 가져온 묘목을 보는 순간.
앞으로 견뎌내야 할 긴 세월이 순식간에 체감되는 듯했다.
나무는 너무 가늘고 여렸다.
그리 힘이 세지 않은 엘로니아도 몇 번 힘을 주면 부러지게 생겼다.
엘로니아의 우려를 예상했는지, 노움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성장은 걱정하지 마. 님프의 주특기가 확대거든.]
‘단순히 크기만 키우면 안 될 텐데…….’
불안한 눈길을 보내는 그녀를 향해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영양분, 광합성, 음식……. 뭐든 잘 먹여서 단번에 성장시키는 거!]
순간 끊임없이 그녀의 입에 산딸기를 집어넣던 님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잘 몰라서 계속 먹이는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상습범이었다.
님프에 대해 미미한 충격을 받은 사이.
노움은 마지막까지 손가락을 세며 말을 마쳤다.
[두더지들에게도 건드리지 말라고 얘기했어!]
자연적인 조건은 맞았다.
그럼 이제 외부적인 부분을 맞출 차례였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본론을 내비쳤다.
“보아하니 상단 관리를 굉장히 잘하신 것 같아서요. 제가 제안을 하고 싶은데…….”
그들은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엘로니아는 때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해당 목재를 만들던 나무들을 다른 모종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저희가 미리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들은 현실감이 없는지 어물쩍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엘로니아는 거침없이 답했다.
“제록 나무요.”
이를 들은 상단 부부는 곤란한 듯 답했다.
“마님. 죄송하지만 제록 나무는 심어도 얻는 것보다 폐기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제록 나무 모종도 어디서나 살 수 있는 게 아니고요.”
“나무는 있으니 신경쓰지 마세요. 단지 저는 두 분의 땅과 관리해줄 노동력이 필요해요.”
그들은 잠시 망설였다.
제록 나무라면 없어서 못 파는 목재였다.
가능만 하다면 현재 물에 곯아버리는 목재보다 더 쓰임새가 많을 터.
단지 여태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기에 흔쾌한 답이 나오기 어려울 뿐이었다.
엘로니아는 다시금 그들에게 제안했다.
“이익금의 70%를 제게 주시면 됩니다.”
절대 상단주도 손해 보는 일이 아니었기에 자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독점과 다름없었다.
남들은 노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정령의 도움으로 크는 나무가 어디 흔하겠는가.
땅이야 어떻게 조건에 맞는 곳을 찾는다고 한들,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를 수락하면 얼마나 길게 내다봐야 합니까.”
장기전을 염두하고 묻는 질문이었다.
이에 노움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1년. 닉스가 도와준다면 조금 더 빨리 될 수도 있어!]
그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1년이요. 운이 좋다면 더 빨리도 가능합니다.”
잠시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던 상단주는 한참을 고민했다.
신중에 신중이 더해진 가운데 한참 만에 그들은 계약서에 사인했다.
엘로니아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선례가 없는 일을 맡으시는 거라 어려우셨을 텐데.”
여태 조용히 상단주와 의견을 나누던 부인이 악수를 받으며 웃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잔잔히 깔려 있던 걱정이 적잖이 걷혀 있었다.
“저희가 납품한 목검이 부러졌을 때. 다치실 뻔하셨다고 들었어요.”
“아, 맞아요. 하지만 보다시피 이렇게 사지가 멀쩡하답니다.”
“저희에게 떠넘기실 수도 있으셨을 텐데, 파기 때 이를 빌미로 삼지 않으시는 걸 보고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작지만 큰 이유였다. 그들은 온화한 어투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렇게 웃는 상단주 부부는 조금 더 오래 산 이의 눈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