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마음은 천천히, 몸은 빠르게.
줄 수도, 줄 생각도 없는 주제였다.
그렇다고 에이미의 말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무래도 전대 공작님도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엘로니아도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덕분에 헤일튼가에는 어른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오롯하게 카르벨. 그 혼자였다.
가문의 계보를 외울 적, 방계에서 막 성인이 된 그를 두고 작위 승계에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마저도 카르벨이 반란군을 제압하는 공을 세우며 쏙 들어갔지만 말이다.
‘황후께서도 일찍 돌아가시고. 전대의 헤일튼가는 다사다난했네.’
그런 와중에 혼인을 안 하고 여태 버틴 그도 대단한 듯싶었다.
결정권이 오롯이 그에게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혼자 주절거린 게 민망했는지 에이미는 부산스럽게 방을 나섰다.
“그럼 곧장 주무실 준비를 하겠습니다!”
순식간에 닫힌 방문을 보던 엘로니아는 의자에 몸을 묻었다.
화장대 위에 놓인 아셀리의 선물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들어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커다란 루비가 박힌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황실의 이름을 달고 보내서인지, 건성으로 봐도 값비싸 보였다.
손으로 대충 쓸어보고 있을 때. 옆에서 씩씩한 음성이 물었다.
[감자 먹을래?]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노움이 씨익 웃고 있었다.
“노움!”
주변을 살폈으나, 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찾는 걸 알았는지 그가 먼저 답했다.
[님프는 반딧불이랑 놀러 갔어!]
“아, 그럼 나중에 님프에게 오늘 연무장에서 고마웠다고 전해줄래?”
[좋아, 친절하구나!]
그는 활짝 웃으며 가뿐히 날아 화장대 위로 올라왔다.
어차피 밟아도 티도 안 날 텐데, 노움은 물건을 피해 뒷발꿈치를 들고 묘기를 부리듯 피해 다녔다.
빠르게 화장대 위를 정리해주자, 그는 배시시 웃었다.
[님프가 내일 산딸기를 따올 거야. 너도 먹을래?]
“내가 먹어도 돼?”
자그마한 님프를 떠올리자니 산딸기 두어 개를 따오면 끝날 듯했다.
하지만 노움은 전신이 흔들릴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통통한 볼살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자 그는 밝게 답했다.
[같이 먹으면 즐겁잖아!]
신이 난 듯 자리에서 들썩이는 모습이 제 나이대의 아이를 보는 듯해 흐뭇했다.
나중에 정령을 보여야 할 일이 있다면 님프와 노움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것 같았다.
때마침 정령사 임명도 남아 있으니 좋은 시기였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노움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다른 사람들처럼 보여달라고 안 하는구나?]
“으응?”
[1천 년 전에 본 사람은 대뜸 그렇게 물었거든!]
“아…….”
제 속내를 읽은 것처럼 하는 말에 그녀는 탄식을 내뱉었다.
차마 자신도 그렇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엘로니아의 본심도 모르며 그는 키득거렸다.
[좋아. 감자가 싫다고 했으니 대신 이걸 줄게.]
그는 포르르 날아올라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곧 시원한 감각이 전신에 퍼졌다.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화면이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갔다.
그 안에는 아셀리가 있었다.
“헤일튼 공작가의 약혼녀에게 선물을 보낼까 하는데, 뭐가 좋겠나요?”
“정령사님이라고 하시는 분 말씀이시죠?”
“맞아요. 연회에서 보았죠?”
“물론이죠. 사치를 좋아하는 분은 아닌 듯하던데요, 전하.”
마차에서 창문 너머를 향해 묻는 그녀의 질문에 보이지 않은 여성이 답을 건넸다.
생소한 목소리는 누구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경어를 쓰는 걸 보면 시녀는 아닌 것 같고…….’
아셀리는 곤란한 듯 물었다.
“목걸이를 준비했는데, 너무 내 취향이려나요?”
그제야 눈에 들어온 아셀리는 전신이 번쩍이는 듯했다.
알알이 박힌 반지부터 목걸이까지.
저렇게 화려한데도 그녀의 외모에 묻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질문에 창문 바깥의 여성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제가 추천해드릴까요, 전하?”
“그래 줄래요?”
화색이 돋는 되물음을 끝으로 기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아셀리의 선물에 대해 노움이 보여 준 모양이었다.
굳이 안 봐도 될 만큼 사소한 것이었다.
‘선물이야 추천받을 수도 있지. 어차피 황실 이름으로 오는 건데.’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억이었으나, 그래도 제 능력을 보여 준 노움에게 감사를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노움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뒤였다.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는데?’
어디로 날아갔나 싶어 화장대 위를 비롯해 바닥까지 샅샅이 살폈다.
오죽하면 서랍까지 전부 열어봤으나, 어느 곳에도 노움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하게 다시 상체를 일으켰을 때.
똑똑. 노크가 들렸다.
“들어가지.”
곧이어 익숙한 카르벨의 음성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는 뒤지느라 엉망이 되어 있는 화장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턱까지 문지르며 보던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시종을 괴롭히지 말고 말을 하시죠, 엘로니아 양.”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겠는데, 아니에요.”
단호한 답에도 카르벨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는 늦은 시간인데도 반듯한 옷차림이었다.
방금까지 밖에 있다 온 사람처럼 보였다.
살피는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연무장에 올 때는 되도록 기사 셋은 앞에 세워두도록 해.”
진심인가 싶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카르벨은 능숙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일이 또 있을 수 있어. 이번에는 목검이었지만 다음에는 검날일 수도 있지.”
“연무장에 검이 그렇게 많이 튀어요?”
“아니지만, 그 희귀한 한 번을 그대가 겪길래.”
그는 다정히 말했다.
“이제 소중한 정령사님이 아니신가. 몸조심하셔야지.”
참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그녀가 연무장에 갈 일은 없었기에 대충 넘겨들었다.
“다른 거래처는 잘 구하셨나요?”
“음. 헤일튼가의 기사 수가 많다 보니 물량에 당황하는 이들이 많더군.”
당황할 만하지.
엘로니아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 담긴 긍정의 의미는 아니었다.
카르벨은 흥미로운 듯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되물었다.
“그 반응은 뭘까.”
“정말 물량 때문은 아닐 것 같아서요.”
정령의 능력으로 본 상단 내부는 꽤 잘 관리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입소문이 난 곳이라 하더라도, 꾸준히 그 정도를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런 곳과 거래를 해 온 카르벨이라면 다른 곳은 성에 안 찰 확률이 높았다.
그녀의 속뜻을 알아챈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마음에 차는 곳이 없어 한소리를 했더니 그레이터 얼굴이 새하얘지더군.”
저 얼굴로 웃으면서 조곤조곤하게 철퇴를 날리는 그를 떠올리면 그러고도 남았다.
카르벨은 어깨를 으쓱이며 본론을 꺼냈다.
“황실에서 왔다고 들었어.”
“벌써 들으셨어요?”
“듣는 방법이 있지.”
왠지 일반적인 방식일 것 같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괜히 물었다가 제 혈압만 머리로 쏠리겠거니 싶어 유연하게 넘겼다.
“아셀리 전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어요. 연회에서 말씀하신 게 사실인가 봐요.”
“누구인지 몰라 선물을 못 보냈다는 말을 말하는 건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핀을 들어 보였다.
노움이 보여 준 기억으로 보아 나름 신경을 쓴 듯한 선물이었다.
머리에 가벼이 갖다 댄 그녀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때요? 어울려요?”
“그건가?”
거울 뒤로 그가 비쳤다.
늘 보던 얼굴로 웃는 모습을 보아하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좋은 소리는 기대조차 안 했던 터라 엘로니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됐어요. 말 안 해도 뭐라고 답할지 알 것 같아요.”
빠르게 도로 핀을 넣은 그녀는 탁, 소리 나게 케이스를 닫았다.
그러자 카르벨이 까닥 턱짓을 하며 말했다.
“그걸 좀 빌려줬으면 하는데.”
설마 지금 이것도 갖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허, 황당함에 입을 벌린 엘로니아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석인 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그쪽에서 보낼 만한 거라면 뻔하거든.”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엘로니아의 뒤에서 긴 팔을 뻗었다.
어깨 너머로 기다렸다는 듯이 케이스를 가져가는 카르벨의 모습이 거울에 그대로 비쳤다.
엘로니아는 거울 너머의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 해봐요. 보석 때문에 온 거죠?”
딱 보니 초반에 건넨 말은 그저 화두를 열기 위한 초석이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흘겼다.
따가운 시선을 보냈는데도 그는 의연하게 케이스를 열어 핀을 확인했다.
감정이라도 하는 듯 집중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녀의 가정이 사실인 듯했다.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고개까지 기울이는 그에게 엘로니아는 화장대 서랍을 열며 물었다.
“선물 들어온 거 많은데, 좀 보여드려요?”
“다른 건 이미 확인했어.”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엘로니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탁, 케이스를 닫은 그는 보란 듯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잠시 빌리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잿빛 눈동자는 무심했다. 정확하게는 그리 손에 든 케이스에 흥미가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의무를 하는 듯한 모습이 잠시 의문을 자아냈으나, 엘로니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아침에 일어난 엘로니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의 문 앞에 놓인 바구니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야?]
어깨에 매달려 있던 닉스가 엘로니아의 심경을 대신했다.
에이미 역시 처음 보는 듯이 말했다.
“누가 선물을 두고 가셨나 봐요. 다른 이에게 맡기면 되는데, 참.”
연회 이후 엘로니아의 앞으로 오는 물건이 많았기에 에이미는 별 의심 없이 바구니를 들었다.
그러나 바구니 안에 든 것의 정체를 확인한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이 말했다.
“어라. 산딸기네요?”
선물로 보낼 만한 품목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상하는 것도 금방이거니와, 헤일튼 공작가에게 산딸기는 그리 큰 값어치를 지니지 못했다.
만약 받는 이가 곱게 자란 영애였다면, 불같이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을 무시한다며 말이다.
선물하는 이가 직접 재배했을 리 없고, 구하는 노력도 들지 않으니 어느 쪽으로 보아도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정령이 준 거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님프의 선물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에이미는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먼저 불평을 토로했다.
“누가 마님에게 감히!”
“내가 부탁해서 받은 거야.”
“이런 대단한걸!”
반사적으로 엘로니아가 답을 하자, 에이미는 그보다 더 능숙하게 말을 바꿨다.
“주방장에게 잼이라도 만들게 할까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비장하게 다음을 준비하는 행동력까지 선보였다.
이를 들은 노움이 두 손을 흔들며 반대했다.
[정령사랑 나눠 먹을 건데!]
엘로니아의 시선이 슬그머니 아래를 향했다.
노움은 혹여 바구니를 빼앗기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아침 일찍부터 방문한 것을 보아하니, 산딸기를 먹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툴툴댈 때는 언제고. 닉스는 그녀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넌지시 귓가에 속삭이기까지 했다.
[저거 님프가 가져온 거야.]
누가 봐도 이 시점에서 산딸기가 등장하면 님프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엘로니아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을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 뿐이었다.
“에이미는 식기를 준비해 줘. 바구니는 내가 맡고 있을 테니.”
“아, 그럴까요?”
“안 그래도 산딸기가 당겼는데. 잘 됐지.”
노움과 닉스가 있는 탓에 적당한 핑계를 미리 흘려두었다.
그래야 한 바구니에 수북하게 쌓인 산딸기가 통째로 없어져도 놀라지 않을 테니까.
에이미는 바구니를 건네며 의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아니야! 천천히 와도 돼. 천천히!”
정령과 대화 할 시간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지금이 적기였다.
그러나 에이미는 부지런하고 충직했다.
“마님이 원하셨다는데, 얼른 드셔야죠!”
“마음을 천천히 먹으라는 뜻이었어. 괜히 급하게 오다가 실수하면 안 되니까.”
에이미는 감동을 받은 듯 눈을 빛냈다.
“네! 그럼 마음은 천천히, 몸은 빠르게 다녀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