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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24화 (124/234)

17. 향수 뿌리지 마

‘카르벨의 인맥에 황실이 있던가?’

역사를 외우면서 덤으로 달달달 암기해야만 했던 신상정보에 카르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와 친한 인맥과 하다못해 헤일튼가에 있었던 기사들까지 죄 적힌 그곳에서 아셀리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약혼자라고, 다른 이들보다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정보도 많았다.

그중에는 그가 아침에 연무장에 갈 때 옷이 가장 간편하다거나, 그의 보좌관 그레이터가 3년 전에 위염이 도졌다는 등의 대체 어쩌라는 건지 모를 것들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궁금하지 않은 정보까지 적으면서 정작 아셀리에 대해서는 한 줄도 없었다는 뜻이다.

‘저택까지 놀러 올 정도면 친해야 하지 않나?’

카르벨의 행동을 보건대, 절대 편한 관계는 아니었다.

‘설마 아셀리 전하 혼자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건…….’

자신이 생각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엘로니아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셀리는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완벽한 외모, 에스피디 제국의 차기 황위 계승권자라는 배경, 사람들이 입 모아 외치는 경외까지.

황비를 쏙 빼닮아 황제가 아낀다는 말까지 공공연하게 돌아다녔다.

‘진짜 인생 혼자 사시네.’

이렇게 모자람 없는 그녀도 미리 외웠던 정보에 따르면 정령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이 그러하니 이상할 건 아니었다.

눈동자만 굴려 기민하게 그들을 살피고 있을 때.

어째서인지 엘로니아는 옆얼굴이 따끔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니 리프리의 물색 눈동자가 뚫어지도록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일전에 공작저에서 도움을 요청하라던 그가 떠올랐다.

약혼 자체를 의심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자신을 확인했다.

‘머리 됐고, 드레스 완벽하고, 병약은…….’

이게 문제인가!

어쩐지 카르벨이 모르겠으면 쓰러지라더니. 그것이 참조언이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영혼까지 끌어모아 병약한 감정선을 잡고자 노력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데브니 영애가 정령사라 들었어요. 제국의 영광입니다.”

옆에서 카르벨과 인사를 나누던 아셀리는 어느새 기대하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평생 볼 일 없다시피 했던 아셀리까지 그렇게 말을 하다니.

새삼 정령사가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 체감되었다.

아셀리는 사근사근하게 말을 덧붙였다.

“정령사님을 위한 연회인데, 어떠세요?”

말을 건네는 그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말투, 예절, 심지어 행동거지까지 흠잡을 곳 하나 없는데 상냥하기까지 하다니.

착하지만 그렇다고 만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없이 여리게 보였던 이가 신기하게도 강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른가 봐.’

엘로니아는 속으로 의문을 삼키며 답했다.

“이렇게까지 환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혹여 마음에 차지 않으실까 걱정이 많았답니다.”

전대 정령사들이 연회가 마음에 안 든다고 깽판이라도 치고 간 역사가 있나?

그렇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질문이었다.

비교할 만큼 연회에 참석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녀가 공작저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들었던 것들은 전부 빠짐없이 있었다.

아셀리는 활짝 웃으며 물었다.

“어떤 분이신지 너무 궁금했답니다. 언제부터 정령을 보셨던 건가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신기하네요. 갑자기 정령이라는 게 눈에 보이던가요?”

“예, 맞아요. 모르는 신사분의 수염에서 처음 조우했죠.”

차마 치안관의 수염이라고 답할 수 없어 적당히 둘러댔다.

엘로니아의 태연한 답에 아셀리는 놀란 듯 되물었다.

“수염……, 이요?”

“원래 장난기가 많아요. 리본이나 장신구가 계속 기울어진다면 의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녀가 힐끔, 눈짓으로 아셀리의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가리켰다.

비싸 보이는 파란 보석은 그녀의 머리에 제대로 달려 있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할 수는 없어서인지 그녀는 적당히 웃어 보였다.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때도 그러한가요?”

“물론이죠. 갑자기 부탁하지 않은 이의 과거를 보여줄 때도 있고요.”

정확하게는 갑자기 볼 수밖에 없는 처지겠지만 넘어가기로 하자.

적당한 진실이 섞인 답에 아셀리는 작게 탄식했다.

그녀는 덥석, 엘로니아의 손을 붙잡으며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힘드셨겠어요. 원치 않는 이의 사생활까지 볼 수도 있다니.”

순간 리아티코 향이 누군가 공기 속에 뿌린 듯 확 퍼졌다.

본능적으로 엘로니아는 숨을 참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셀리의 앞에서 대놓고 오만상을 찌푸릴 뻔했다.

답이 없는 그녀를 향해 아셀리는 친절하게 손등을 도닥이며 말했다.

“앞으로 황실에 자주 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세요. 하나뿐인 정령사님을 위해 황실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엘로니아는 숨을 가득 들이쉰 채 대답 대신 가벼운 눈인사만을 건넸다.

그러자 옆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향은 싫어한다더니, 얼굴에 티조차 안 나는 거 봐.’

아셀리를 만나기 전이나 후나 크게 다를 바 없는 미소였다.

카르벨은 능숙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보호자처럼 말했다.

“조만간 폐하께도 정식으로 임명을 위해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또 뵙지요.”

* * *

연회가 끝난 뒤. 돌아가는 마차 안은 고요했다.

밤늦게까지 인사를 받느라 안면근육이 그대로 굳은 것은 둘째치고, 카르벨의 심기가 영 좋지 못했다.

이유를 모르는 엘로니아는 마지막으로 봤던 아셀리를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리프리 전하가 리아티코 개량도 하실까요?”

“그런 일을 할 성격이 못 돼.”

과하게 반듯하기는 했다.

아셀리의 독한 향수는 그녀만 느낀 것인지, 그 누구도 티조차 내지 않았다.

홀에 있던 누구라도 독한 향에 돌아볼 법한데 정말 아무런 향도 안 나는 듯이 행동했다.

‘이게 권력의 맛인가.’

나중에는 급기야, 엘로니아는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심지어 너무 오랜 시간을 맡았더니, 다른 향은 너무 옅어 일시적으로 후각이 마비되는 기분이었다.

[대체 그런 것들은 어디서 묻혀 오는 거야?]

마차 안에서 홀로 편안히 허공에 누워 계시는 닉스께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코를 틀어쥔 그는 못 참겠다는 듯이 외쳤다.

[마차 안에 꽉 찬 거 봐.]

맞은편에 앉은 카르벨 탓에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닉스는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

[가서 뭐 했어? 나 몰래 재밌는 거 했지?]

‘네가 인사성이라도 밝았으면 그렇다고 답이라도 해보겠는데…….’

슬프게도 정말 인사가 거의 다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데뷔탕트처럼 영애들이 돌아가며 손을 잡고 춤을 추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이미 성인식도 치를 만큼 커버린 탓이 크겠지만.

그녀가 답을 못하고 입을 꽉 다물고 있자, 닉스는 만족스러운 듯 팔짱을 꼈다.

[그래. 내가 없는데 재밌을 리가 있나. 홀 중앙에서 내가 딱 이렇게 춤을 춰 줘야 분위기가 살지.]

빙그르르 허공에서 돌던 그가 어지러운지 잠시 비틀거렸다.

엘로니아는 눈짓으로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입만 벙긋거리며 ‘나중에.’라고 말했으나, 닉스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되레 천천히 엘로니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서서히 머리부터 가벼워지는 시원한 느낌이 전신까지 퍼져갔다.

그는 건방지게 허공에 드러눕고는 말했다.

[대체 너랑 어울리지도 않는 향수는 어디서 뿌린 거야?]

‘뿌리기는. 옆에 있다가 몸에 배인 거지.’

이를 알 리 없는 닉스는 떠벌떠벌, 자신의 향수 취향을 읊조렸다.

[뭐니 뭐니 해도 향은 쿨워터 향이지. 쿨워터 몰라? 이게 아니면 인정할 수 없어.]

그는 다시금 엘로니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앞으로도 쓸 일은 없겠지만, 쿨워터 향이 아닌 다음에야 향수를 뿌려봤자 무용지물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카르벨의 손이 움직였다.

괜히 닉스에게 눈짓한 것을 들킨 줄 안 엘로니아의 어깨가 작게 튀어 올랐다.

그러자 카르벨은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과하게 놀라는군.”

연회 때보다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덤덤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에 든 서류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몇 장을 넘긴 카르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티타임은 그리 신경 쓸 필요 없어. 명단을 보니 오늘처럼만 하면 문제없을 만하더군.”

“오늘처럼만이요?”

“그래.”

“오늘처럼이라는 말은 적당히 모두에게 인사하고 모든 이들에게 적당히 신상정보가 섞인 말을 건네는 그런 거요?”

“아주 잘 아는군.”

그는 여유롭게 서류를 들어 보이며 호응했다.

뭘 보나 했더니 펠런 백작 부인이 언급했던 티타임 명단인 모양이었다.

하루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명단까지 손에 넣다니.

엘로니아는 더 이상 갈 곳도 없는 마차에서 등을 최대한 기대었다.

크게 의미는 없겠지만 그렇게나마 거리감을 두고 싶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서 알아 오는 거예요?”

“영업 비밀이야.”

“아니, 검술을 하는 가문이면서 무슨 영업…….”

그녀는 입을 삐죽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카르벨은 태연히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가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고. 호위를 하나 붙여줄 테니까.”

“호, 호위요?”

“헤일튼 가에는 유능한 기사가 많지.”

“그게 공작님은 아닌 거죠?”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나?”

발끈한 엘로니아가 반박하기도 전에 그는 싱긋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나보다 조금 덜 유능한 기사를 붙여주지.”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자기 입으로 말하면 안 창피한가?

헤일튼가의 인장에 보이는 방패 모양은 철면피를 뜻하는 거였나?

입만 뻐끔거리는 그녀에게 카르벨은 명단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

받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팔이 짧아 닿지 않았다.

아니다. 그녀의 팔은 평균이었다. 이건 공작저의 마차가 쓸데없이 넓고 큰 탓이다.

어쩔 수 없이 살짝 일어서 명단을 낚아채려던 찰나.

덜커덩, 마차가 돌부리라도 건넜는지 잘게 움직였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몸이 앞으로 휘청였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의 양옆을 두 팔로 지탱했다.

졸지에 그녀의 작은 품 안에 카르벨이 가둬졌다.

실상 품었다는 말보다는 엎어졌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법했다.

그는 흐음, 작게 콧소리를 흘리며 말했다.

“박력 있군. 설렌 척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아니,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이건 마차가 잘못한 거예요.”

“그럼 마부를 불러 추궁할까?”

“하기만 해 봐요.”

죄 없는 마부는 또 왜 괴롭힌단 말인가.

엘로니아는 어정쩡한 몸을 일으키고자 낑낑거렸다.

그의 머리털 하나 건드리지 않고 일어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필 그가 다리도 길어서 엉덩이를 쭉 빼니 중심을 잡기 더 힘들었다.

그런 그녀의 고통을 카르벨은 즐기고 있었다.

그는 앞에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 입을 맞췄다.

“뭐 하시는 거예요?”

“눈앞에 보이길래.”

황당한 말에 그녀가 목을 뒤로 빼내자, 덜컹. 다시 한번 마차가 움직였다.

버티던 그녀의 시야도 잠시 흔들렸다.

간신히 그의 몸에 손 하나 안 대고 버티던 엘로니아는 이제 끝났구나 싶었다.

‘그래. 그냥 대담하게 어깨를 짚고 일어서자. 어차피 연회에서 다 만졌는데 이제 와서.’

되도록 사적인 일에서는 깔끔하게 선을 지키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어째서인지 단단한 팔이 가볍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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