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23화 (123/234)

16. 보거나, 느끼거나.

“어쩜. 맞군요!”

펠런 백작 부인은 반가운 친우를 만난 듯 엘로니아를 반겼다.

사실 얼굴이 기억나는 이는 아니었다.

독특한 목소리 탓에 흐릿한 잔상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나 펠런 백작 부인은 친근하게 물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보이길래 그만둔 줄 알았더니.”

“그때는 청혼을 받기 전이었거든요.”

“그래요? 혼인 이야기는 비교적 최근에 나왔던 것 같은데. 그보다 조금 일찍 그만두지 않았어요?”

의외의 예리한 질문에 대한 답은 그녀가 아닌 카르벨에게서 나왔다.

“무리하게 일을 하느라 몸이 좋지 않아서요. 제가 일찍이 그만두게 했습니다.”

카르벨의 사랑꾼 같은 면모에 펠런 백작 부인은 놀란 듯 입을 오므렸다.

“그러고 보니 몸이 약하다고 했었죠, 참…….”

펠런 백작 부인은 아쉬운 듯 엘로니아를 스치듯 응시했다.

말을 길게 끌던 그녀는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혹시……, 나중에 티타임처럼 가벼운 모임도 버거우실까요?”

“티타임이요?”

“간단한 다과회예요. 부담스러울 일 하나 없답니다.”

호호, 웃으며 건넨 은근한 권유에 펠런 백작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만하라는 신호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제 할 말을 건넸다.

“아는 부인들끼리 오붓하게 수다를 떠는 모임이랍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요.”

엘로니아는 옆에 있는 카르벨을 의식해 적당한 답을 골랐다.

애매한 그녀의 반응에 펠런 백작 부인은 군말 없이 물러섰다.

제법 눈치가 있는 행동이었다.

“선물을 잘 받았다니 다행이네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티타임에 와 주셨으면 좋겠어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백작 부부는 자연스럽게 마무리를 지었다.

그런 그들에게 카르벨이 다시 운을 떼었다.

“아, 선물로 보내 주신 목걸이 말입니다.”

시선은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카르벨은 친절히 되물었다.

“약혼녀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서 그러한데, 어디서 구매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까?”

엘로니아는 난데없는 말에 놀라 늘어진 입매를 움찔했다.

펠런 백작 부인은 곤란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게, 소규모로 운영되는 곳인지라…….”

“일반적인 부티크는 아닌 모양이군요.”

“저도 구매하기 힘든 곳이라서요.”

그녀에게도 향하는 백작 부인의 눈짓에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우선 미소를 지었다.

‘목걸이에 관심 없다더니. 관심 넘치네!’

방에 왔을 적에 가져가라고 진작 말까지 했는데.

굳이 그녀의 방에 놓고 갈 때부터 알아봤다.

‘이렇게 직접 물어볼 정도로 마음에 들었으면 그냥 가져가지. 이상한 고집이 있네.’

장신구를 모은다는 사실이 조금 민망했던 걸까.

그의 평소 모습을 보면 잘 연상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는 안쓰럽다는 듯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변에서 얼마나 이상하게 봤으면 이렇게 숨길까.

그녀 역시 아무도 정령사라고 믿어주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이 앞을 가려도 모자랐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엘로니아는 그를 돕기로 했다.

물론 거저 주는 건 없다.

그녀는 조용히 뒤에서 카르벨만 듣도록 읊조렸다.

“공작님. 제가 보석을 어디서 사는지 알아 올게요. 대신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무엇이지.”

“보석의 절반 금액만큼 제게 돈으로 주세요. 수수료라고 생각하시고요.”

이에 펠런 백작 부부를 보고 있던 카르벨의 고개가 그녀를 향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되물었다.

“그대에게 내비 예산은 충분히 할당했던 것 같은데. 모자란가?”

“아뇨. 그건 공…….”

‘공작님’이라고 말을 하려던 엘로니아는 펠런 백작 부인의 시선에 빠르게 말을 바꿨다.

“-카르벨의 것이지 제건 아니잖아요.”

나중에 이혼하면 독립할 자금이 꽤 필요할 터였다.

그때조차도 내비 예산을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굳이 돈을 따로 달라는 이유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심지어 그의 시선에 사기꾼이라는 글자가 쏟아져 나오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녀는 친절히 오해하지 말라고 자세한 말도 덧붙였다.

“제가 인심 써서 정보비로 한 번만 받을게요. 부티크를 알아낸 뒤는 마음대로 구매하셔도 돼요.”

결국 기다리다 못한 펠런 백작 부인이 다시금 사과를 건넸다.

“헤일튼 공작. 미안하게 됐어요.”

아주 짧게 그녀를 응시하던 카르벨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엘로니아는 특유의 서비스업 종사자의 습관을 담아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선물을 받고 다른 색상이 있으면 구매하고 싶었거든요. 제가 파란색은 잘 안 어울려서요.”

백작 부인은 고민하는 듯 입매가 굳게 닫혔다.

접었던 부채를 다시 편 그녀는 얼굴을 가리며 미안한 듯 답했다.

“제 쪽도 그쪽에서 초대장이 와야 구매할 수 있어서요.”

“방법이 없을까요?”

잠시 망설이는 듯 부채를 부치던 펠런 백작 부인은 큼, 목을 가다듬으며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나중에 내가 소개장을 써 줄게요. 티타임 때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좋겠어요.”

티타임을 꾸준히 언급하는 걸 보면 정령사인 그녀를 꼭 끼워 넣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다.

주최 측에서 영향력 있는 이를 많이 끌어모을수록 과시가 되니 이를 노린 듯했다.

특히나 가문의 배경이 없는 그녀에게 엘로니아는 매력적인 초대객이 분명했다.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티타임 초대장,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작 부인.”

그제야 펠런 백작 부인은 소녀처럼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들 속으로 사라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은 사람처럼 복화술로 물었다.

“목걸이는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걱정 마시고 다시 가져가세요.”

웃음기가 사라진 그가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감동이라도 받은 건가?

매번 얄궂게 말을 하던 그를 턱까지 치켜세우며 보란 듯이 바라봤다.

그러나 한참 만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새로 살 텐데 뭐 하러.”

그나마 발전이라면 이제야 순순히 인정했다는 정도였다.

조금 더 마음이 넓은 그녀가 이해하기로 했다.

“이렇게 펠런 백작 부인께 여쭤보실 정도면 말을 하지 그러셨어요.”

“뭐라고.”

“솔직하게 보석 장신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다, 그럼 되죠.”

어째서인지 그는 대답 대신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말을 하기 싫을 때면 그는 저런 식으로 나왔다.

이제 대충 패턴을 파악한 엘로니아는 한숨을 뱉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사람들이 그렇죠. 한 번 생각하면 잘 안 바뀌니까요.”

“갑자기 정상적인 말을 하는군.”

“그런 의미에서, 공작님도 정령을 믿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물었으나 그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슬그머니 상체를 숙이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였다.

“처음이 어렵지, 지내시다 보면 정령을 보실, 아니,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엘로니아. 지금 생각이 바뀌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엘로니아는 눈을 끔뻑였다.

그러자 카르벨은 눈이 접히도록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목걸이는 그대가 꼭 가지도록. 정령도 마찬가지고.”

정령에 관해서 그는 확고했다.

본래 결정이 잘 바뀌는 성격도 아니다 보니, 당연한 결과인가 싶기도 했다.

오늘 연회만 하더라도 안 믿는 이들이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꼭 눈으로 봐야만 믿는 족속들이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바로 카르벨처럼.

정령사 앞에서 꼭 그런 말을 저렇게 밝게 할 일인가.

엘로니아는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 다시금 리아티코 향이 지나갔다.

희미해졌던 향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훅 하고 다가왔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그보다 먼저 카르벨이 입을 열었다.

“안색이 좋지 않아.”

뜬금없는 말에 그녀는 잠시 양옆을 노려보았다.

지금 저를 가리켜 한 말인가?

엘로니아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슬그머니 가리키며 눈짓으로 물었다.

그러나 카르벨의 시선은 뒤를 향해 있었다.

문득 그가 모르겠으면 쓰러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답을 원하는 게 맞나?’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듯 조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덕분이에요……?”

정답이었는지, 카르벨은 망설이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까 보니 땀도 좀 흘리던데.”

“춤추다 허리가 나갈 뻔했거든요.”

“그 정도로 힘이 들었나.”

말투에는 묘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간 겪어온 카르벨을 보자면, 이렇게 사서 걱정할 리가 없다.

그 정도로 엘로니아를 움직이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뒤에 누가 있구나?’

살짝 뒤를 돌아보려 하자 그는 걱정스럽다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겨주었다.

은근히 뒤를 보지 못하게 막은 것과 다름없었다.

엘로니아는 제일 먼저 그의 손을 확인했다.

‘샴페인, 와인은 없고. 주사는 아니네.’

앞서 영식들과 나눈 대화도 적당히 잘 넘겼거늘.

굳이 안색까지 운운하는 상황이 영 심상치 않았다.

‘아니겠지.’

하지만 머릿속에 켜진 적색 경고가 본능적으로 그녀가 해야 할 말을 알리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묘하게 꺼림칙한 게…….’

설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픈 척이라도 하라고?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픈 거 다 나아서 연회 왔다는 설정 아니었어?!’

어쩐지 건강하던 사람도 근육통으로 나흘은 앓아누울 정도로 첫 춤에 영혼을 불사 지르더니.

이러려고 그런 것이다.

엘로니아는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잿빛 눈동자를 또렷하게 응시한 엘로니아는 그만 알아볼 정도로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인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카르벨의 얼굴은 단호한 거절을 내비쳤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처음 듣는 청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르벨 공작.”

뒤를 돌자, 가까이서 볼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던 아셀리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눈이 시리다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하얀 피부와 어우러지는 금발에 연푸른 드레스는 그녀를 한층 더 고아한 분위기로 만들어주었다.

‘닉스가 좋아하겠네.’

늘 건국제 때나 멀리서 이목구비 구분도 안 되는 그녀를 본 게 전부였는데.

가까이서 보고 나니 왜 사람들이 그녀를 볼 때면 하나같이 아름답다고 평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에스코트를 자청하고 있는 리프리 역시 그림처럼 잘 어우러졌다.

냉랭한 외형과 달리 아셀리는 방긋 웃으며 먼저 인사했다.

“공작의 약혼녀를 이제야 뵙네요.”

슬쩍 올라간 눈매가 곱게 접히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런 그녀가 다가올수록 리아티코의 향이 진해졌다.

‘어……?’

그럼 공작저에 왔던 손님이 아셀리란 말인가.

연회 시작 때부터 꽤 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눴으나, 이만큼 진한 향수를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도 리아티코라면 더더욱.

순간적인 의문이 들었으나 소개를 기다리는 듯한 아셀리의 행동에 엘로니아는 우선 인사를 건넸다.

“엘로니아 데브니입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정령사라더니. 역시 데브니가였군요. 명맥은 괜히 이어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그리 높은 음성이 아닌데도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엘로니아가 힐끗,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려 했으나 실수로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생긋, 눈웃음을 흘린 그녀는 카르벨에게도 축하를 건넸다.

“기쁜 소식을 들어서 그런지 오늘 참 좋아 보이네요, 카르벨 공작.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전하.”

카르벨은 능숙하게 인사를 받아넘겼다.

그중 엘로니아의 귀에 유독 콕 박히는 말이 있었다.

‘이름으로 부르네?’

보통 친한 관계가 아니거나, 공적인 자리에서는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기 마련이었다.

엘로니아 역시 연회에서 데브니 영애라고 불리는 일이 더 많았다.

정말 친분이 두터울 경우 이름을 불렀는데, 연회 내내 카르벨의 이름을 부른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 그의 이름이 아셀리의 입에서 처음 나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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