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22화 (122/234)

15. 데뷔탕트에 대한 환상

반사적으로 허리를 세우자 카르벨의 나직한 음성이 작게 들렸다.

“고개는 들어야지. 아래는 보지 않아도 돼.”

“그럼 실수인 척 밟아도 돼요?”

“괜찮아. 내가 밟힐 생각이 없거든.”

자신만만한 대답이 딱 카르벨다웠다.

오히려 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황당하기까지 했다.

카르벨과 한 뼘 사이의 거리를 두고 마주 보고 있으니 평소 멜튼 양과 배울 적보다 긴장되었다.

‘그래도 많이 발전했다. 소름은 덜 돋네.’

그나마 멜튼 양이 징그럽게 쓰다듬어서 내성이 생긴 모양이다.

엘로니아는 못마땅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내며 그의 팔 위에 얹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공작님도 못 피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 일 없어.”

“어떻게 단언하세요?”

“여태 내가 하고자 한 일 중 실패한 일이 없거든.”

그야 협박을 하니까요.

누구나 검과 권력으로 들이밀면 들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진정 이 사실을 모르는지 카르벨은 위화감조차 못 느끼는 듯했다.

굳이 저렇게 말하니 어디 집요하게 밟아볼까 싶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첫 실패를 이렇게 배우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변의 수많은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그 속에는 데브니 남작 부부도 섞여 있었다.

조금 전까지 의기양양하게 남들 앞에서 허세를 부릴 때와 달리, 그들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대신 엘로니아를 구석에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저러다 눈 빠지는 거 아니야?’

데브니 남작 주변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도 연회를 즐기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가오는 사람도 없는 걸 보면 그들이 했던 거짓말을 다들 눈치챈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그들에게 보란 듯 환한 미소와 함께 카르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더불어 자그마한 목소리로 그에게 엄포를 놓았다.

“제가 멜튼 양에게 뭘 배웠는지 아시면 그런 소리는 싹 들어가실걸요.”

그녀가 열정적으로 가르쳐 준 ‘전 애인의 연락을 끊게 만드는 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지금은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잠시 무릎을 피고 있을 뿐이었다.

엘로니아는 그를 향해 무해한 척 살갑게 말을 이었다.

“궁금하시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그거 알아, 엘로니아?”

“몰라요.”

“멜튼 양도 내가 직접 그대의 선생으로 고용했다는 사실.”

순간 엘로니아는 삐끗, 넘어질 뻔했다.

하마터면 발목 부상으로 아픈 척이 아니라 정말 병자로 연회장을 떠날 수도 있었다.

불행스럽게도 카르벨이 그런 그녀를 단단하게 지탱하며 말을 덧붙였다.

“설마하니 내가 뭘 가르치는지도 몰랐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와 맞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녀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는 상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분명 그렇게 다짐하고 평범하게 배운 대로 춤을 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엘로니아가 조금만 무릎을 올리려고 하면 카르벨은 휙, 그녀를 제자리에서 가볍게 돌려버렸다.

‘어어……?’

그가 이끄는 방향대로 빙그르르, 한 바퀴 우아하게 돈 엘로니아의 드레스가 살랑거리며 원형을 그렸다.

퍼졌던 드레스 자락이 넘실거렸다.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서 춘다고?’

보통 첫 춤은 가볍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첫 춤이라고 표현된다는 것은 다음도 있다는 뜻이다. 다음을 위해서 체력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다.

당장에 엘로니아의 주변에도 그와 끝난 뒤,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이들이 보였다.

엘로니아는 길게 늘어진 입매에 힘을 주었다.

다분히 고의적인 동작이었다.

‘이 인간이 정말…….’

그녀가 확인차 슬그머니 발을 들자, 카르벨은 엘로니아의 한 손만 잡은 채 한 발짝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대놓고 약 올리는 듯 장난을 치는 모양새였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그에 맞춰 엘로니아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옆에서 함께 춤을 추던 이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렸다.

한걸음에 다시 마주 보고 섰을 때 본 카르벨은 그녀와 달리 조금 즐거워 보였다.

“이렇게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 소감은?”

“일생일대에 한 번이면 좋겠다……, 정도요?”

“글쎄. 정령사인 순간 그게 가능할까.”

“그게 아니더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네요.”

바로 눈앞에 있는 누구 때문에.

엘로니아는 이를 꽉 물며 그를 따라 웃었다.

분명 그도 충분히 뒷말을 알면서도 능청스럽게 춤을 끝마쳤다.

음악이 끝나고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살포시 잡으며 인사를 마쳤다.

고개를 얕게 숙인 그녀는 바닥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주, 죽겠다……!’

멜튼 양과 연습할 적 느꼈던 기가 빨려 나가는 기분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모양이다.

여태 소중히 품어온 데뷔탕트에 대한 환상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게 정말 사교계 춤이야? 다들 원래 이래?’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다들 그녀와 달리 평온해 보였다.

그런 엘로니아의 코끝에 낯익은 향이 스쳐 지나갔다.

‘어라? 이 향은…….’

일반적인 향수와 달리 훅 코끝을 파고드는 독한 느낌에 그녀는 짧게 코를 찡긋했다.

리아티코 향이었다.

처음 헤일튼 공작저에 도착했던 날, 복도를 가득 채웠던 향과 똑같았다. 심지어 그때보다 더 진했다.

눈대중으로 주변을 살폈으나 인파 속에서 향의 진원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는 이게 한 명이 뿌려서 날 수 있는 정도의 농도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카르벨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황실에서는 원래 리아티코 향수가 이렇게 흔해요?”

그러나 카르벨은 질문과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엘로니아. 지금부터 답을 모르겠으면 쓰러지는 척을 해도 괜찮겠어.”

“여기서요?”

여기서 지금 리아티코 향수를 처음 봤다고 쓰러지기라도 하라는 건가?

엘로니아는 황당한 요구에 되묻고 싶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드는 인파에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이거, 여태 연회에서 한 번도 뵙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군요.”

“완벽하십니다. 정령사님, 두 번째 춤의 영광을 제게 주시겠습니까.”

“이런, 가이닉.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치는구먼.”

주변에 있던 이들이 다음 춤을 위해 앞다퉈 엘로니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카르벨과 했던 것처럼 두 번을 췄다가는 정말 관의 목재를 고르게 생겼기에, 엘로니아는 건강을 핑계로 적당히 거절했다.

“데브니 영애. 한 곡 괜찮으십니까.”

“마로이 자작님. 아쉽게도 제가 그리 체력이 좋지 못하여서요.”

말을 꺼내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미리 외워뒀던 것들이 촤르륵 펼쳐지고 있었다.

‘시골 가문, 순진한 성격. 입이 싸고, 가난한 영지라 제일 좋은 날에 입는 옷은 남색 볼로타이 세트.’

안 보는 척 확인해 보니, 정말로 남색 볼로타이를 하고 있었다.

외울 적만 해도 조금은 긴가민가했으나, 이쯤 되니 신뢰성을 떠나서 정말 괜찮은 건지 의심이 들었다.

‘대체 남의 습관까지 어떻게 아는 거지?’

엘로니아는 복잡한 심정으로 옆에 딱 붙어 선 카르벨을 넌지시 흘겨보았다.

‘혹시 내 정보도 어딘가에 자세히 돌아다니지 않겠지.’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남의 정보도 이렇게 쉽게 구해왔는데, 가까이 있는 그녀라고 못하겠는가.

더군다나 공작저에는 여러모로 대단한 시녀장이 있었다.

‘내가 하루에 얼마만큼의 케이크 조각을 먹는지 소수점 자리까지 꿰고 있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그는 귀신같이 고개를 돌려 까닥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엘로니아?”

무어라 입을 열었던 엘로니아는 노선을 틀어 다른 답을 내놓았다.

“……아니에요.”

차마 제 정보에 대해서 물을 용기는 없었다. 가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다.

엘로니아는 바람 불면 날아갈까, 숨이라도 크게 쉬면 부서질까. 아픈 척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절의 답을 이어갔다.

“비록 자작의 신청을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제도에서 머무르시는 일주일 동안 즐겁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이에 일부는 놀란 듯 되묻기도 했다.

“제가 소개도 안 드렸는데 어찌 아셨습니까? 시골에 있는 작은 영지라 제도에서도 모르는 이들이 꽤 되는데 말입니다.”

엘로니아는 옅은 미소와 함께 인자하게 두 팔을 벌렸다.

“자연은 늘 함께니까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에 있던 영식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절을 했는데도 그들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이 없었다.

되레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기까지 했다.

“정령사님이 내 가문을 아시더군!”

“난 무서워서 못 가겠네. 혹여 내 과거라도 털리면 어쩌나.”

“그대 보기보다 걸리는 게 많은가?”

“아니더라도 혹시 모르잖나.”

“쯔쯔, 저러니 정령사님께서 아무 말도 없으시면 청렴하다는 뜻이 아니겠어?”

덕분에 엘로니아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처음 연회에 들어왔을 때와 또 다른 경외의 시선까지 느껴졌다.

그러던 중 눈에 익은 두 사람이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헤일튼 공작.”

“펠런 백작께서도 참석하셨군요.”

카르벨은 펠런 백작의 인사를 받은 뒤, 그의 옆에 있는 고운 중년 부인의 손에 입을 맞췄다.

누가 보아도 펠런 백작과 함께 온 이는 백작 부인이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펠런 백작이 4번째 재혼한 부인이었다.

워낙 재혼과 이혼이 잦은 이였다.

이번 부인은 전과 달리 작위는 없으나 돈이 많은 상인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셀리 전하의 황위 계승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것 봐. 내가 미리 목걸이 확인하기를 잘했다니까?’

이미 앞서 선물에 대해 물은 이들이 많았기에, 적당히 답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펠런 백작 부인은 깃털이 잔뜩 달린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리며 웃었다.

“공작님께서 꽁꽁 숨겨 두셨던 약혼녀를 공개하시는데, 와야지 않겠어요.”

다소 가벼운 듯한 음성도 익숙했다.

펠런 백작 부인의 시선이 잠시 그의 옆에 있던 그녀를 향했다.

그녀 역시 동그랗게 뜬 눈이 엘로니아를 아는 눈치였다.

카르벨이 준 정보에는 간단한 초상화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림으로 볼 적에는 그리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으나, 막상 실물을 보니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었다.

‘목걸이 때문에 괜히 신경 쓰여서 그런가?’

그런 그녀에게 펠런 백작 부인이 예상했던 질문을 건넸다.

“저희가 데브니가의 영애이신 줄 모르고 성함 없이 선물을 보냈는데. 어떻게, 잘 도착했을까요?”

“푸른색이 영롱해서 열어보고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호호, 아니에요. 이렇게 귀여운 영애인 줄 알았다면 루비로 보내는 게 더 좋을 뻔했……, 아!”

평범한 중년 부인처럼 말하던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 챠르륵, 부채를 접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제도에 있는 살롱에서 우리……. 본 적 없을까요?”

엘로니아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어디서 보았나 했더니 살롱에 온 손님이었던 모양이었다.

워낙 영애들이 자주 오고 가는 곳이다 보니, 한두 명쯤은 알아볼 수도 있을 거라 예상했다.

엘로니아는 미리 준비했던 답변대로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기억하시는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다시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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