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말했다고 전해라
“엘로니아 님. 정령은 어떻게 생겼나요?”
“엄청 잘생겼다는데, 사실인가요?”
어린 영애들 중 몇이 귀여운 질문을 건넸다.
엘로니아는 머릿속으로 닉스와 님프를 떠올렸다.
‘잘……생겼나……?’
애초에 고작 영유아로 보이는 이들을 잘생겼다고 칭할 수가 있을까?
더군다나 아기들은 다 귀엽다.
닉스가 그렇게 얄밉게 굴어도 통통한 볼살과 씰룩거리는 눈에 못 이긴 적이 셀 수 없었다.
엘로니아가 적당히 웃으며 답을 하려던 찰나.
멀리 호탕한 데브니 남작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 딸이 정령사가 아니던가. 덕분에 정령을 직접 보기까지 했다니까?”
그는 기가 살아서 어깨에 힘이 실려 있었다.
메티카 감옥에 갔을 적, 바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잘라냈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자랑스럽게 딸이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든 귀족들은 과장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오, 어떻게 생겼던가.”
“우리 선조를 쏙 빼닮았더군!”
“이야,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구먼. 역시 데브니가야.”
“다들 우리 엘로니아를 보면 알지 않겠는가. 그 헤일튼 공작께서도 껌뻑 죽을 정도로 한눈에 반한 미모라는 걸.”
죽을 대상이 바뀐 게 아니라?
카르벨을 만난 순간부터 껌뻑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은 그녀였다.
지금 막 그의 발언으로 아마 데브니 남작도 추가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염치라고는 눈물에 섞인 염분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선조부터 데브니가 출신이 외모 하나는 타고나지 않았는가!”
“오……. 그래. 남작 정도면…….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 잘 달려 있구만.”
사실 데브니 남작을 보면 그리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얼핏 보면 인상은 좋아 보일 수 있으나 그것도 그가 사람 좋은 척을 할 때뿐이었다.
멀리 들린 데브니 남작의 답에 엘로니아의 앞에 있던 영애들은 실망감을 감추기 위해 애써 표정을 관리하고 있었다.
연회가 열리면 당연히 데브니 남작 부부도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예상을 한 치도 비켜나가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차라리 그녀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이제는 싫으나 좋으나 카르벨도 함께였다.
슬그머니 눈동자만 굴려 그를 살폈다.
카르벨의 날렵한 옆얼굴이 고스란히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연회장에 들어올 때와 초지일관 같은 모습이었다.
‘여, 여전히 웃는 얼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대로 작게 고개를 기울이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혹시 그가 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카르벨, 혹시 아버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엘로니아?”
여상한 표정과 목소리. 과도한 친절과 신사다운 행동.
우려와 달리 그는 너무도 평온했다.
‘완벽한 무시다……!’
그는 아예 데브니 남작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아니면 나보고 알아서 해결하라는 뜻인가?’
확실히 카르벨이 대놓고 나서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표면적이긴 하나 엘로니아를 대놓고 자랑하고 있었다.
자식이 잘나면 싫어할 부모는 많지 않다.
비록 데브니 남작은 자신을 돋보이는 데 그녀를 이용하고 있기에 그 결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계속 그녀의 이름을 잔잔히 팔아먹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엘로니아는 혹여 나중에 데브니가에 일이 생겼을 때, 그녀를 인질 삼아 헤일튼 공작가에 피해 끼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녀가 메티카 감옥에 수감되었을 때, 데브니 남작 부부가 선을 그었던 것처럼 말이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엘로니아는 강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정령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랍니다.”
상냥하게 질문을 건넨 영애들에게 하는 답이었으나, 듣는 귀는 데브니 남작이 있는 곳까지 열려 있었다.
정반대되는 말에 그녀는 속으로 듣지 못할 사과를 건넸다.
‘미안하다, 닉스. 오늘 하루만 유령으로 살아라.’
너도 선조를 닮았다는 말보다는 낫지 않겠니.
이는 정령을 보일 수 없는 탓에 카르벨과 사전에 입을 맞춘 부분이었다.
어차피 공식적인 정령사의 능력은 특정 장소와 물건에서 그곳에서 있었던 과거를 읽어내는 일이다.
이 일만 잘해내면 굳이 정령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한 달간 아등바등 외웠는데!’
괜히 정령이 보인다는 소문이라도 돌았다가는 그녀 역시 곤란해질 여지가 있었다.
엘로니아의 말을 주워들은 데브니 남작은 빠르게 수습에 들어갔다.
데브니 남작은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사람처럼 말을 바꿨다.
“내 마음의 눈으로 보았다, 이 말일세!”
그의 변명에 일부는 알면서도 넘어가는 척하는 모습이 훤히 보였다.
이를 눈치챈 데브니 남작은 창피함 때문인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이게 뭐가 중요한가. 어차피 정령이 과거를 보여주면 다 끝날 일인데.”
“데브니 남작은 경험해 보았나?”
누군가 건성으로 건넨 질문에 그는 헛기침을 하며 좁은 어깨를 어떻게든 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의 목소리에는 허세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럼. 몇 번 해봤는데, 자는 것 같고 아주 편안해서 좋아. 마치 연극을 관람하는 것처럼 볼 수 있지.”
정령들은 단 한 번도 엘로니아가 원할 때 선뜻 보여준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떤 연극이 관객의 요청에도 싫다며 버티겠는가.
오죽하면 그녀가 카르벨이 외우라는 것들을 그대로 외웠겠느냔 말이다.
생각하고 보니 은근 고까웠다.
‘닉스 이놈, 일부러 마음 약해지라고 어린 모습으로 지내는 거 아냐? 영악한 놈…….’
엘로니아는 나중에 그를 잡아 털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질문을 건넨 영애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빠르게 주마등처럼 지나가요. 여유롭게 볼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에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전부 기억이 생생하게 남는답니다.”
이번에는 사실만을 얘기했다.
그래도 두 번이나 겪어봤다고 술술 말이 나왔다.
옆에서 고스란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르벨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전에 보았던 제 어린 시절도 그대로 기억한다는 말이겠군요.”
가벼운 농담이라는 투였다.
속삭이는 것치고는 그리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데브니 남작처럼 크게 외치지는 않았으나 앞에 있던 영애들의 귀에는 충분히 들렸으리라.
그들이 작게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가 그대로 가감 없이 들렸다.
정중한 말투에서 그가 일부러 흘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에 정령으로 봤다고 했던 걸 기억하는 건가?’
그를 보아하니 정령을 인정한 것은 아닌 듯싶었다.
그저 적절하게 그녀가 진짜 정령사라는 미담을 하나 더 얹는 것이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한 것조차도 그는 알차게 써먹고 있었다.
필요할 때 착 꺼내는 그의 대처 능력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재능이다. 재능이야.’
엘로니아는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그를 따라 웃었다.
“똑같으시던데요. 어린 시절 카르벨의 머리를 쭉 잡아 늘리면 지금과 같을 것 같아요.”
잡고 싶다는 건 아니고.
물론 기회를 준다면야 마다하지는 않겠지만.
카르벨은 평소처럼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귀엽다고 하셨잖습니까.”
“예…….”
“사랑스럽다고도 했고.”
“사, 뭐요? 누가요?”
“그대가.”
꿈꾼 거 아니야?
귀엽다는 말은 빈말로 스치듯 한 기억이 있으나 후자는 술을 마시다 닉스까지 마시지 않고서는 그녀 스스로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건성으로라도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본인 입으로 뻔뻔하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영애들은 힐끗, 눈짓으로 데브니 남작과 그녀를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분명 카르벨과의 대화를 다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멀리 수군거리는 영애들을 보건대, 데브니 남작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가는 눈치였다.
특히 일부가 놀란 듯 데브니 남작을 대놓고 바라보기까지 했으니 확실하다.
“데브니 남작은 잘 모르는 눈치이지 않아요?”
“아까 엘로니아 양과도 그리 오래 대화를 나누시지는 않던데.”
“듣자 하니 혼인식 전부터 공작저에서 머무르셨다고 하더라고요.”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이에요. 어쩜……. 데브니 남작의 저런 소리를 그냥 듣고 있으셨다니.”
그들 중에는 카르벨을 힐끔거리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일부는 엘로니아와 의도치 않게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적당히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 사교계 데뷔 첫인상은 깔끔하게 포기한다.’
그 덕분인지 홀은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런 엘로니아의 옆에 딱 붙어 선 카르벨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완벽한 정령사였어.”
“이게 다 카르벨 덕분이에요.”
“알아.”
오만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한쪽 입매를 기울이며 답했다.
칭찬이 아니었는데.
다른 이들은 모두 속고 있다. 저 얄미운 모습이 본모습인데.
그녀가 가볍게 눈을 흘기던 중. 잔잔하게 흐르던 오케스트라의 음악이 뚝 끊겼다.
일순간 사람들이 해일처럼 양 끝으로 갈라졌다.
곧 문을 열고 나타난 황실 기사단 소속의 제복을 입은 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셀리 에스피디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런 기사의 뒤로 푸른 드레스 자락이 나타났다.
물결치는 금발은 샹들리에와 함께 빛나는 듯한 착각을 선사했다.
흠집 하나 없는 고고한 모습과 달리 온화하게 걸쳐진 미소는 그녀의 이미지를 훨씬 부드럽게 만들고 있었다.
옆에는 낯익은 얼굴이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아셀리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리프리 저하……?’
엘로니아가 놀랄 틈도 없이 그들은 가벼운 걸음으로 홀 중앙을 향했다.
곧 오케스트라는 멈추었던 연주를 이어갔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발뒤꿈치를 들었다.
카르벨과 최대한 키를 맞추려고 노력했으나, 머리 하나는 훌쩍 넘도록 큰 그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적당히 그에게 상체를 바짝 기울이며 속삭이듯 물었다.
“입궁을 서두르시더니 아셀리 전하의 에스코트 때문이었나 봐요.”
카르벨은 대답 대신 몸을 휙, 돌렸다.
거의 그에게 기대다시피 있던 탓에 순간적으로 삐끗, 중심을 잃을 뻔했다.
가까스로 똑바로 선 그녀의 앞에 카르벨이 손을 내밀었다.
엘로니아는 부루퉁하게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뭐죠?”
“보시다시피 약혼녀에게 첫 춤을 신청하고 있는데.”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닌데.
하지만 엘로니아는 그를 따라 똑같이 웃는 얼굴로 답을 넘겼다.
손을 내밀자 카르벨은 가볍게 힘을 줘 그녀를 당겼다.
자연스럽게 이끌려가듯 커다란 손이 엘로니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조금만 고개를 들면 그의 날렵한 턱선이 보였다.
‘윽, 가까워.’
본능적으로 움찔거리자 한 걸음, 가까이 몸을 밀착시킨 그가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엘로니아는 어디로 갔지.”
“무슨 소리세요. 여기 바로 눈앞에 있는데.”
목을 꼿꼿하게 세우자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손을 고쳐 잡았다.
음악이 흐르자 카르벨은 익숙하게 그녀를 리드했다.
멜튼 양과 배울 적보다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리드 당하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카르벨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에 맞춰가며 조용히 지시했다.
“힘은 풀고.”
툭, 허리를 감싼 손가락이 가볍게 까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