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취향은 존중해 드립니다
필사적인 엘로니아의 끄덕임에도 리프리의 시선은 거둬지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천천히 그녀와 카르벨을 번갈아 응시했다.
“혹시 약혼녀께서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십니까?”
대뜸 묻는 질문이 묵직했다.
리프리는 말을 돌리는 법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쪽은 너무 돌려서 얄미워 죽겠는데, 저쪽은 또 너무 정직하다.
이런 점까지 카르벨과 아주 반대였다.
카르벨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아뇨. 이는 확실히 말씀드리죠.”
그녀의 어깨를 감싼 카르벨의 손아귀에 꽈악 힘이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적당히 예의를 갖춘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물론 어금니를 좀 물은 것 같지만.
그는 고개를 돌려 빙긋, 웃으며 엘로니아에게 되물었다.
“그렇지, 엘로니아?”
“무, 물론이죠! 창문을 몰래 넘은 건 가벼운 스릴과 해방감을 즐긴 것뿐이랍니다.”
“들으셨습니까, 저하. 엘로니아가 가끔 이렇게 깜찍한 면이 있답니다. 이런 점에 반했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주제 전환!
역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리프리는 놀란 듯 엘로니아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벽을 탈 때도 놀라지 않던 얼굴이 고작 깜찍이라는 말에 저렇게 변하다니.
‘그래. 깜찍은 내가 봐도 조금 너무했다.’
그녀의 깜찍한 시절은 이미 옛날 옛적에 지나갔다.
아마도 그녀의 유년 시절에는 깜찍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정작 본인 입으로 말을 꺼냈던 카르벨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시계까지 확인하며 말을 덧붙였다.
“입궁까지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안에서 차나 드시겠습니까.”
“제안은 감사하나 곧 들어가 봐야 합니다.”
리프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 못한 듯했으나, 공작저에는 정말 잠깐 들른 모양이었다.
이에 카르벨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아쉽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님.”
아니, 카르벨은 대놓고 기뻐하고 있는데요.
누가 봐도 활짝 핀 얼굴이었으나, 리프리는 이를 모르는 눈치였다.
정말 저 얼굴을 보고도 모른단 말이야?
리프리는 태연하게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떨떠름하게 카르벨을 보고 있던 그녀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잠시 고민했다.
‘뭐지……?’
살짝 숙인 상체와 정중히 내민 손.
어디서 많이 보았는데 정작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르고, 리프리가 먼저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인사, 받아주시겠습니까.”
리프리의 음성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책에서였다.
카르벨에게서는 이런 절차를 생략은커녕, 본 적도 없어서 잊고 있던 터였다.
어정쩡하게 내민 손에 리프리의 두 눈이 살며시 내리깔렸다.
기다란 속눈썹 덕에 눈가에 그늘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가볍게 엘로니아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언제든 문제가 있다면 제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리프리의 음성이 바람에 섞여 희미하게 들려왔다.
분명 귀로 듣고 있는데도 마치 다른 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리프리의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발밑에 흰빛이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마법진 위로 빠르게 새겨진 빛 틈으로 리프리의 바스러질 듯한 금발이 옅게 흩날렸다.
옅은 바람과 뒤섞인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리프리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
“입궁 준비는 잘 되어가나.”
문에 기대고 선 카르벨이 멀끔한 차림새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엘로니아는 그녀의 앞으로 도착한 선물을 정리해둔 리스트를 보다 고개를 들었다.
“지은 죄가 있어서 열심히 했죠.”
“현명하군. 황실에서 스릴과 해방감을 즐길까 봐 걱정했거든.”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인생의 목표가 노후 안정이거든요.”
리프리가 다녀간 뒤 일주일.
벌써 황실로 입궁하는 날이 성큼 다가왔다.
그 일주일 동안 카르벨은 리프리의 앞에서 했던 변명을 지독히도 우려먹었다.
차였으면 이미 우릴 대로 우려서 맹물만 나올 정도였다.
엘로니아는 그날 이후 자신의 다른 이름이 해방감 가문의 스릴 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사실 카르벨에게 반격할 만한 거리를 찾았기 때문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선물 리스트를 넘기며 자신 있게 물었다.
“공작님, 그보다 목걸이 어디에 두셨어요?”
“무슨 목걸이?”
카르벨은 정말 모른다는 듯이 되물었다.
엘로니아는 휙, 그를 향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상체를 틀었다.
그러고는 리스트를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자, 보세요. 펠런 백작부인께서 제게 보낸 목걸이요. 분명 받았다고 되어있는데요.”
그녀는 가리켰던 손을 쫙 펼치며 과장되게 놀란 척했다.
“짜잔. 사라졌네요?”
“그거 유감이군.”
어깨를 으쓱인 그는 말과 달리 유감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손으로 그녀의 종이를 가리키며 조언까지 해주었다.
“전에 보니 리프리 저하의 마법에 제법 감동받은 모양인데, 마술로는 너무 허술해.”
“마술이 아니라요!”
엘로니아는 눈에 힘을 주며 물었다.
“왠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가문이라거나…….”
“펠런 백작부인이면 그대도 한창 각 가문을 외울 때 보지 않았던가?”
“맞아요. 유일하게 정략혼이 아닌 가문이라 인상 깊었죠.”
“그래. 거기서 들어봤겠군. 워낙 펠런 백작이 화려했지.”
“펠런 백작의 바람기가 너무 심해서 오히려 소설을 보는 기분으로 사생활을 외우기가 쉬웠죠.”
“치정극 취향이었나?”
“그건 아닌데 보다 보니 잘 외워져서…….”
답을 하던 엘로니아는 퍼뜩, 이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보니 의도적으로 말을 돌린 듯싶었다.
그녀는 다시금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이게 아니라! 본인이 가져간 것 같다거나 그러지 않으세요?”
카르벨은 알 수밖에 없었고, 알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일전에 그가 버리고 반지를 대신 주었던, 그 목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대어 있던 몸을 슬그머니 일으키며 답했다.
“버리지 않았어. 잠시 맡아둔 거지.”
“그럼 돌려주세요. 확인만 하고 다시 드릴게요.”
펠런 백작부인이 실제로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입궁한다면 만날 확률이 높았다.
특히나 이렇게 선물까지 보낼 정도라면 아는 척을 해올 수 있었다.
일단 그녀가 보낸 선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카르벨이 가져갈 적, 너무 순식간이었던 터라 녹색인지 푸른색이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레이터를 시켜 갖고 올 테니 기다려주게. 그보다, 왜 돌려주겠다는 거지?”
“공작님이 갖고 싶어서 가져간 거 아니셨어요?”
엘로니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살롱에 오는 귀족들 대부분은 보석에 깐깐하게 굴었다.
드레스랑도 어울려야 하며, 누군가에게 선물을 할 때도 유행과 가격 그리고 디자인까지 꼼꼼하게 살피는 사람이 많았다.
직접 착용하지는 않아도 소유욕은 들 수 있다.
까마귀도 반짝이는 물건을 수집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다만 그 목걸이가 가져갈 만큼 탐이 나는 디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엘로니아는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취미가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궁핍한 사람도 아니니 고상한 취미 하나는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혼인을 하기는 했어도 그의 생활에 간섭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물론 그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라면 고맙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에는 거의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덕분에 이제 그를 보아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드디어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엘로니아는 너그러이 말했다.
“되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카르벨은 답도 없이 곧장 문밖을 향해 외쳤다.
“그레이터.”
“예, 각하.”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달칵, 곧장 문이 열렸다.
이전에 가져갔던 케이스와 똑같은 것이 그레이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카르벨은 문틈으로 조용히 물었다.
“확실하지.”
“예. 완벽하게 똑같은 것으로 대체해서 구했습니다. 당사자도 구분 못 할 겁니다.”
그는 케이스를 열어 목걸이를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푸른색 사파이어가 영롱한 빛을 내며 그 안에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케이스를 받으며 물었다.
“원본은.”
“파기하였습니다.”
그는 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엘로니아는 케이스를 들고 심각한 듯 생각에 잠긴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돌려줘도 된다니까.
어차피 그녀에게는 장신구가 넘쳐나고 있었다.
다시금 그에게 생김새만 확인하게 해달라고 요청하려던 찰나.
카르벨은 단걸음에 그녀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목걸이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펠런 백작부인이 보냈던 그 목걸이다.”
생각보다 화려했다.
물방울 모양의 사파이어가 하나도 아니고 열 몇 개는 달린 듯했다.
착용하거나 단순히 선물이라고 하기에는 과한 디자인이었다.
‘그래도 이것보다 약혼반지가 더 비싸다고?’
엘로니아는 제 손에 끼워져 있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늘어진 눈으로 흘겨보았다.
설마하니 나중에 이걸 가지고 반환하라든가, 조금 흠집이 났다고 배상하라 하진 않겠지?
반지를 받은 이후 편안하게 생활했던 지난 일주일이 뒷목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방금까지 의식하지 않고 행동했던 엘로니아는 모든 일이 불편해졌다.
뻣뻣하게 움직이던 그녀는 이마저도 신경 쓰여 아예 반지가 끼워진 왼쪽 손을 무릎 위에 고정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펠런 백작부인이 선물한 목걸이를 꼼꼼히 눈으로 살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어요.”
“받아.”
“저는 다 이해해요.”
“아까부터 나야말로 이해 못 할 소리를 하고 있군.”
그는 작게 눈꺼풀을 우그러트리며 그녀의 테이블 위에 케이스를 올려두었다.
엘로니아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번쩍이는 목걸이를 스윽, 밀어두었다.
케이스는 카르벨과 그녀 사이에 덩그러니 열린 채 누군가 먼저 주워 가기를 한참 기다렸다.
그러다 곧 입궁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에이미의 안내가 이어졌다.
결국 카르벨은 빈손으로 방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럼 빠르게 준비하겠습니다.”
달칵. 문이 닫히자 명목상 걸려 있던 카르벨의 미소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나오자 앞서 기다리고 있던 그레이터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카르벨은 주변에 그를 제외한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낮게 읊조렸다.
“조사는.”
“원본 목걸이에서 소량의 마력이 검출되었습니다. 워낙 적어서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펠런 백작가와 아셀리 전하의 동향은 확인되었나.”
“근 두 달 내로 확인했습니다만 특별한 접점은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가 정령사와 결혼한다는 소식조차 나온 적이 없으니, 더 조사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마력이 워낙 적어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둔한 이들은 그냥 쓰고도 모를 만큼 아주 적은 양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벌써부터 누군가 엘로니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는 들킬 때를 대비한 보험일 것이다.
‘모른다고 꼬리 자르기 딱 좋은 정도의 테스트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