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신원 확인
엘로니아는 얼떨결에 답을 하고 말았다.
“저택 주인의 약혼녀인데요.”
처음 보는 남자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녀를 빤히 직시하며 물었다.
“……근데 왜 벽을 타고 계신 거죠.”
엘로니아는 차마 정령에게 케이크를 몰래 주고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댔다.
“아마도 취미 같아요.”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익숙지 못하십니다.”
“방금 생긴 취미거든요.”
엘로니아는 모른 척 그의 빤히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오전에 카르벨이 미리 언질을 준 손님인 듯했다.
‘적당히 처신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그 묘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카르벨의 지긋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보이라고 하지는 않았잖아? 그렇지.’
그녀는 속으로 합리화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론 그가 생각한 처신에 몰래 창문을 넘나들다 들키는 일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그런 그녀의 상념을 남자는 단번에 잘라냈다.
“말씀하신 신원이 확실한지 확인이 우선입니다. 내려오시겠습니까?”
아름다운 외모에 그렇지 못한 융통성이라니.
먼지 하나 없이 새하얀 제복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깐깐함이 느껴졌다.
살롱에서 일할 적 갈고 닦은 관상학으로 보건대, 그는 자신이 납득하지 못한 일은 가차 없이 상사에게 보고할 유형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 보고할 상사란 높은 확률로 카르벨이겠고.
2층까지 느껴지는 반듯함에 엘로니아는 자꾸만 아래로 슬슬 떨어지는 밧줄을 고쳐 잡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하얀 장갑을 벗어내며 말했다.
“혹시 내려오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라면 직접 내려드리겠습니다.”
그는 한 발짝, 건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행동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되물었다.
“올라갔다 내려오면 안 되나요?”
“예, 안 됩니다.”
“계단으로 정직하게 내려올게요. 그럼 신원 확인도 되잖아요.”
“그 전에 도주할 우려도 있습니다.”
“그럼 얼굴도 아시겠다, 현상 수배 거세요!”
“위에 계셔서 보이지 않습니다.”
아, 그렇네.
그나마 도둑으로 몰리지 않은 걸 감사히 여겨야 하나.
한숨을 내쉬며 아래로 내려가려던 찰나. 삐끗,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다급하게 줄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덕분에 제 체력이 얼마나 하찮은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순식간에 대롱대롱, 줄을 잡고 매달리게 된 엘로니아는 아등바등 발을 움직였다.
높이가 높이인지라 자칫 잘못했다가는 드레스 속이 그대로 보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엘로니아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두 손으로 생명줄을 꽉 붙잡고 간신히 아래를 보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새빨갛게 변한 귀가 도드라졌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놀란 듯 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죄송합니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담백한 사과와 달리 속사포로 말을 건넸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레이디에게 실례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손을 놓으시면 붙잡겠습니다.”
“지금 눈 감지 않으셨어요?”
“보지 않아도 잡아드릴 수 있습니다.”
차라리 닉스가 도와주겠다는 말이 더 믿음직스럽겠다.
물론 닉스는 절대 도와줄 위인이 아니겠지만.
엘로니아는 말도 안 되는 말에 아연실색했다.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데, 어디를 믿고 몸을 던진단 말인가.
떨어진다고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다리 하나쯤은 부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이미 엘로니아도 한계였다.
줄을 잡은 손에는 힘이 빠져나가 버티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제 몸이 이렇게도 무거웠나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그녀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굳건한 말투와 달리 목덜미까지 미미한 붉은 기가 올라와 있었다.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아래에서 들려왔다.
“방에 없길래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카르벨이었다.
그는 예의 그 웃는 얼굴로 성큼성큼 남자가 있는 곳까지 단걸음에 다가왔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리프리 저하. 제 약혼녀인 엘로니아 데브니 양입니다.”
카르벨은 태연하게 손으로 공손히 그녀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줄을 꽉 잡아당기며 힘을 줘 답했다.
“신원을 확인해 주어서 고마워요, 카르벨.”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군.”
“제가 다시 땅을 밟고 설 수 있게 도와주신다면 더 고마울 것 같아요.”
카르벨은 가볍게 리프리라고 불린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어째서인지 리프리는 잔뜩 굳은 듯이 뻣뻣하게 뒤로 물러섰다.
곧이어 카르벨은 밧줄에 매달린 그녀를 다정히 불렀다.
“날 놀래려고 한 거라면 성공했어, 엘로니아.”
“그럼 카르벨. 놀라지 말고 들어요. 내가 창문을 넘은 건…….”
“얘기는 나중에. 단둘이 있을 때 듣지.”
그는 익숙하게 팔을 뻗으며 말했다.
“일단 내려와. 위험하잖아.”
“받을 수 있겠어요? 일단 저 이 드레스도 겹이 하나, 둘…….”
“원단 몇 겹 더 덧댄다고 해서 그대 무게가 대단히 변하지는 않아.”
“그렇게 콕 짚을 건 또 없잖아요.”
엘로니아는 이 와중에도 꼬박꼬박 반박하는 그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핑계라도 좀 대볼까 했는데 단칼에 들킨 기분이었다.
요즘 케이크를 하도 먹은 데다 방에서 나가질 않으니 영 몸이 둔해진 참이었다.
이대로 카르벨의 팔 한쪽이라도 부러트려 먹는 날에는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특히나 검을 쓰는 사람에게 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에 선뜻 손을 놓기 어려웠다.
그러나 카르벨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답했다.
“믿어. 그대 하나 못 받을 정도로 허투루 훈련하지 않았으니까.”
단호한 어조. 평소와 달리 미간에 박힌 주름과 힘이 들어간 눈이 그녀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인데.’
망설이던 엘로니아는 두 눈을 꽉 감고 손을 놓았다.
훅, 떨어지는 생경한 느낌과 함께 강한 힘이 그녀를 받아냈다.
왠지 눈을 뜨기 겁이 났다.
눈을 꽉 감고 있으니 그녀의 얼굴 위로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대 덕분에 저택에 수배령을 내릴 뻔했어.”
슬그머니 눈을 뜨자 제일 먼저 날렵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옮기자 정면으로 그의 그늘진 잿빛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뒤늦게 그가 자신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었다.
엘로니아는 오소소 돋아나는 소름에 작게 몸을 비틀었다.
카르벨은 그녀를 사뿐히 내려놓았다.
드디어 바닥에 제대로 딛고 설 수 있게 된 엘로니아는 빠르게 변명했다.
“도망가던 길이 아니라, 들어가던 길이었어요. 정말이에요.”
“몰래 사람들 눈을 피해서?”
“그게, 음……. 요즘 시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저를 찾는 눈치라서요. 그렇죠! 그겁니다. 예.”
엘로니아는 사실이라는 양 그를 보며 고개까지 비장하게 끄덕였다.
그러나 카르벨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투로 답했다.
“난 또. 입궁을 앞두고 혼인이 싫어서 도망간 줄 알았지.”
“그런 비련의 로맨스 소설 속 남자 주인공 같은 역할로 있을 분도 아니시잖아요.”
“맞아. 나라면 도망가기 전에 미리 못 하게 막아뒀을 테니까.”
그는 싱긋 웃으며 엘로니아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도망갈 생각이 있다면 각오하라는 엄포인가?’
엘로니아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면에서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프리는 놀란 듯 짧게 예를 갖추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렇네요, 저하.”
카르벨은 까닥, 고갯짓으로 건방지게 인사를 받았다.
그녀를 의심하던 눈길이 떠오른 엘로니아도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다시 인사드려요. 초면에 당황스러우셨을 텐데 죄송해요.”
인사를 지켜본 카르벨은 익숙하게 그를 소개했다.
“리프리 라티에 저하다. 사촌 동생이지.”
라티에라는 성에서 그가 에스피디 제국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티에 왕국은 전대 공작부인의 외가였다.
카르벨을 임신했을 적, 왕국까지 돌아가 관리를 했을 정도로 사이가 좋다는 이야기를 본 기억이 난다.
언뜻 밤늦은 시간에 우연히 정령사의 능력으로 본 어린 카르벨과 전대 공작 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전에 님프가 보여준 과거에 전대 공작부인께서도 백금발이셨지, 참.’
그렇게 생각하니 리프리와 전대 공작부인의 인상이 상당히 닮아 보였다.
특히 날카롭거나 모난 곳이 없는 커다란 눈매라든가, 부드러운 얼굴선이 그러했다.
카르벨과는 딱 정반대였다.
그녀의 살피는 시선을 느꼈는지 리프리는 정중하게 인사를 받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제야 제대로 인사드립니다. 라티에 왕국의 제 2왕자. 리프리입니다.”
엘로니아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헤일튼 공작가의 족보가 펼쳐졌다.
반강제 주입식으로 외워야 했던 그 안에서 리프리의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특히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리프리가 제법 명망 높은 마법사라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엘로니아는 남몰래 숨을 들이켰다.
‘굳이 내려오라느니 말할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야?’
어쩐지 눈을 감고도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하더라니.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손쉽게 끌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사촌의 저택 벽을 타는 사람을 잡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볼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가벼운 인사가 끝나자 카르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조금 일찍 기별을 주셨다면 더 좋은 모습으로 소개했을 텐데, 아쉽군요.”
“황실로 입궁하던 길에 겸사겸사 들른 겁니다. 최근 형님께서 약혼하셨다고 들어서요.”
“제가 아는 리프리 저하시라면 방문하기 일주일 전에 미리 기별을 주실 분이 아니십니까.”
카르벨이 웃으며 지적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짧게 고개를 숙여 간략하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이에 카르벨은 다 알겠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외숙부께서 많이 궁금하셨나 봅니다. 이렇게 저하까지 다 보내시고.”
그가 외숙부라고 부를 이는 라티에의 왕, 한 사람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살가운 대화처럼 들릴 법했으나 희미하게 서먹한 기류가 흘렀다.
엘로니아는 한 달간 공작저에서 시달린 덕에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웃는 걸 보니 딱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네.’
아니나 다를까, 리프리는 금방 카르벨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형님께서 워낙 갑작스럽게 통보하셨잖습니까. 아버지께서 놀랄 만도 하시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건강 때문이라고 말씀까지 전해드렸는데. 하여간, 성격 급하신 것은 여전하시군요.”
그의 친근한 말에 리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슬쩍 그의 옆에 있던 엘로니아에게 향했다.
창문을 넘는 꼴을 봤는데 믿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카르벨은 경이로울 정도로 꿋꿋했다.
되레 다정하게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제 많이 건강해진 모양입니다. 그간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얼굴이 얼마나 두꺼운 거야?
하하. 엘로니아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