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오다 주웠다
순간 머릿속에 일주일간의 노력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미미한 분노도 함께 찾아왔다.
‘진작 말해 주지. 이걸 이제야…….’
엘로니아는 크게 심호흡하며 말이라고는 더럽게도 안 듣는 닉스와 님프를 떠올렸다.
그 오동통한 볼살과 밉살맞은 주둥이를 생각하니 마음속에 평화가 찾아왔다.
덕분에 그녀는 온화하게 답을 할 수 있었다.
“그럼 대체 왜 일주일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원래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몰려야 더 잘하는 법이거든.”
정말 그게 전부라는 듯 카르벨은 짧게 어깨를 으쓱했다.
극한은 모르겠고, 한은 맺혔다.
엘로니아는 그저 주먹을 꽉, 티 나지 않게 움켜쥐었다.
‘한 대만 때려보고 싶다.’
슬프게도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처음이야 일정을 소화하느라 체력적으로 지쳐갔으나, 그것도 잠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일상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늘 돈을 버느라 뼛속까지 새겨진 부지런함이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더 얄미웠다.
알고 있으면서도 꾹 다물고 있던 입이 지금은 또 왜 이리 잘 열리는지.
기지개를 켜는 척 때려볼까? 아니면 일어서는 척 테이블을 엎어버려도 좋겠다.
실수라고 하면 꽤 그럴싸해 보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엘로니아가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일까 고민하던 찰나.
다행스럽게도 똑똑, 들려온 노크가 혹시 모를 대참사를 막았다.
달칵, 문이 열리고 잔뜩 굳은 얼굴의 시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엘로니아의 시중은 에이미가 도맡고 있는지라 볼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덤덤하게 말을 꺼냈으나 그 끝이 떨리고 있었다.
“케이크를 누가 먹은 것 같습니다.”
곧이어 그녀의 뒤로 에이미가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그녀가 왜 사과를 건넸는지 알 수 있었다.
새 찻잔과 누군가 쥐 파먹은 듯한 케이크가 올려진 그릇, 그리고 아무도 쓰지 않은 포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릇 위에는 초콜릿이 묻은 입술을 닦아 내는 님프가 있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엘로니아는 현실감이 들지 않아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하지만 님프는 여전히 케이크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를 전혀 모르는 시녀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전했다.
“지시하신 차를 준비하고 나오던 중에 시녀 하나가 놓고 온 것이 있어 트레이를 복도에 두고 잠시 주방에 들어간 사이 누군가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말에 에이미는 눈물을 참는 듯 꾹 입을 다물었다.
엘로니아는 흔들리는 눈으로 님프를 보며 눈짓을 보냈다.
‘먹을 거면 티라도 내지 말던가!’
그러나 님프는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도 모르고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케이크라고 하지만 카르벨의 선물이었다.
그것도 예비 공작부인을 위해 손수 구매해 전한 것이었다.
물건을 간수하는 것 또한 시녀가 해야 할 일.
심지어 금방 내어달라고 지시한 일까지 어기게 되었으니 적당한 꾸중으로 끝날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벨이 가만히 고개를 숙인 그녀를 보며 물었다.
“범인은?”
“찾고 있습니다만…….”
시녀장은 곤란한 듯 말끝을 흐렸다.
“아직이라는 소리군. 다른 케이크는.”
“다행히도 무사합니다.”
“다행히라…….”
시녀장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카르벨의 말에 그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당황한 엘로니아와는 달리 그는 이런 사태에도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소파 위에 걸친 카르벨의 손이 느릿하게 까닥였다.
크게 화가 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희미한 미소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서늘한 오만함이 만연했다.
‘화가…… 났나?’
엘로니아는 본인이 생각해놓고도 어이가 없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저 좋은 예비부부의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 온 케이크가 아니던가. 그가 이런 일로 화를 낼 리가 없었다.
카르벨의 시선이 님프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아마도 케이크를 본 것이겠지만, 님프는 화들짝 놀란 눈치였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님프의 커다란 눈이 주변을 살폈다.
심지어 무서운 듯 케이크 뒤로 몸을 숨기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끙,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뭐 해. 아무도 못 본다고!’
뒤늦게 카르벨의 선물을 열었을 때 옆에서 눈을 빛내던 님프가 떠올랐다.
에이미가 나가자마자 사라졌을 때부터 의심했어야 했는데.
‘어쩐지 케이크를 보면서 너무 행복해 보인다 했어.’
그런 그녀의 고뇌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는지, 에이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리 오랜 시간 걸릴 일이 아니어서 빠르게 들어갔다 온다는 것이……. 제 실수입니다!”
“네가 먹은 것은 아니고?”
시녀장이 엄하게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이미는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였으면 차라리 전부 먹어서 증거라도 남기지 않았을 거예요. 누가 이렇게 대놓고 티 나게 먹겠어요!”
정령이요.
애초부터 엘로니아의 손만큼 자그마한 님프가 케이크를 다 먹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엘로니아는 사실대로 말하고 싶어 뻐끔거렸던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시녀장이 바짝 허리를 세우며 에이미에게 말했다.
“예비 마님께서 얼마나 상심하셨으면 말도 채 못 이으시지 않느냐! 케이크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런 일을 만들다니!”
엘로니아는 졸지에 케이크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사태에 아주 놀라운 점은, 그녀는 정작 공작저에 들어와서 그리 디저트를 많이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정원에서 카르벨과 먹었던 첫날은 빼고.
기껏해야 한 조각 먹었으려나?
엘로니아는 지난 일주일을 떠올렸다.
빼곡한 수업 일정을 맞추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이 전부였다.
그녀는 에이미를 도와줄 심산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시녀장은 내가 평소에 케이크를 몇 조각이나 먹는지 알아?”
“하루 평균 3.141592조각을 드셨습니다.”
“되게 구체적이네.”
“공작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매일 엘로니아 님의 안락하고 평온하신 생활을 위해 완벽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녀장은 자부심이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본인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그녀는 태연히 뱉어냈다.
“책을 보시느라 바쁘신 것 같아 케이크를 다 드시면 알아서 새것으로 가져다 놓으라 지시했습니다.”
어쩐지 먹어도 끝이 안 나더라.
‘케이크로 저글링을 하면서 들어도 카르벨의 지시다!’
엘로니아는 이제 어떤 상황이 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그를 응시하자, 카르벨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친절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가문인데 그동안 너무 안심했다.
평균이 그렇다 하더라도 엘로니아는 정말 괜찮았다.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녀는 케이크를 못 먹어서 밤에 잠도 못 자고 끙끙 앓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저 여유롭게 먹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있을 때 하나라도 더 맛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고말고.
엘로니아는 슬쩍 흥분한 그녀를 말렸다.
“사실 내가 케이크를 그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일부러 그렇게 말씀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이는 엄연히 에이미의 잘못입니다.”
“남은 케이크는 멀쩡하기도 하고. 한 조각만 그런 거잖아.”
“그 하나가 초콜릿 케이크죠.”
“그게 왜?”
“예비 마님께서 평균적으로 약 62% 확률로 초콜릿 케이크를 더 많이 드십니다.”
대체 어떻게 나온 숫자인 거야?
예상치 못한 분석에 할 말을 잃은 사이, 시녀장은 곧장 엄하게 에이미를 추궁했다.
“그곳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느냐?”
“예. 저 혼자였습니다.”
“물건 관리를 제대로 못 한 죄. 해고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네.”
에이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답했다.
님프는 슬그머니 케이크에서 떨어져 엘로니아에게 다가왔다.
마치 도와달라는 듯 엘로니아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잡아당기며 손으로 에이미를 가리켰다.
미안했는지, 고개를 연신 숙이기까지 했다.
‘기다려 봐. 안 그래도 도와주려던 참이었어.’
일하다 보면 종종 자신의 잘못이 아니어도 책임을 져야 하는 억울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용인이기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런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엘로니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이미가 더 마음이 쓰였다.
엘로니아는 먼저 나긋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카르벨. 잠시 둘이 대화할 수 있을까요?”
그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까닥, 나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럼 처분이 결정되시면 알려주십시오.”
시녀장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에이미를 데리고 나갔다.
님프는 그런 그들을 보다 엘로니아의 머리카락 속으로 숨었다.
보는 눈이 사라지자 카르벨은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시종들도 물리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제가 먹었어요.”
엘로니아의 답에 카르벨은 빙긋 웃었다.
그대로 잠시 짧은 침묵이 찾아왔다.
‘전혀 안 믿는 얼굴!’
사실을 말해도 안 믿을 사람이라, 그의 상식에 맞춰 주었더니.
‘제가 먹었다’라는 말이 너무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그녀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진실을 말하려 운을 떼었다.
“만약에 말인데요. 정말 가정인데, 정령이 케이크를 먹었다거나…….”
슬그머니 눈치를 보자 카르벨은 기다란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흐음. 사실 그 케이크. 내가 산 게 아니야. 오다 주웠거든.”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그 비싼 케이크를 어떻게 주워요.”
그녀가 헛소리를 닭 울음소리로 하는 사람을 본 것처럼 바라보니, 그의 입매가 늘어졌다.
“방금 그대의 말을 들은 내가 딱 그 심정이었어.”
그냥 안 믿겠다는 뜻이잖아.
이럴 줄 알았다. 그녀 역시 님프가 케이크를 먹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으니, 정령을 안 믿는 사람은 오죽할까.
엘로니아는 진실을 말하려는 마음을 깨끗이 접었다.
“정령은 농담이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먹은 건 정말이에요.”
“그대가 주방 근처까지 갈 일이 있던가.”
“마렌 자작 부인을 배웅하고 오는 길에 잠깐 봤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잠깐 뜸을 들인 엘로니아는 한숨을 뱉어내듯 말을 이었다.
“케이크를 엄청나게 좋아하니까요.”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는 케이크를 먹지 않으리.
벌써 입안에 단맛이 느껴지는 기분에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말했다.
“대외적인 핑계는 이 정도로 해주세요. 시녀의 실수는 넘어갈 수 있는 아량이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저는 공작님과 달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잖아요.”
이 사태를 추궁하면 좀생이라는 의견을 은근슬쩍 내비쳤다.
이는 전부 그가 직접 골라서 보낸 교사들이 예비 공작부인이라면 가져야 할 소양이라며 가르친 부분이기도 했다.
시종들을 거느릴 때는 모두가 헤일튼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
마음 같아서는 에이미가 있는 자리에서 답해주고 싶었으나 아직 엘로니아는 어디까지나 예비 공작부인이었다.
혼인식을 치르기도 전부터 헤일튼가의 사람인 척 행동하는 것 또한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다.
카르벨이 바라는 대로 흠잡을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예절.
엘로니아는 이겼다는 얼굴로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카르벨은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잠시 놀란 듯 엘로니아를 보던 그는 피식,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그럼 아까 직접 말하지 그랬나.”
“제가 이렇게 말했으면 반박 없이 들으셨을 건가요?”
“아니.”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봤담?
엘로니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상대의 허점이 보이는데 놓치면 아깝잖아.”
검을 잡는 사람이라더니, 평소에도 사냥 본능이 있기라도 한 듯한 말투였다.
엘로니아는 지지 않고 고개를 치켜들며 답했다.
“아무렴, 공작님이 오다 주웠다는 말만 할까요.”
“그거 사실인데.”
“이제 안 속아요.”
“내가 산 게 아닌 것은 맞아. 그레이터를 시켰거든.”
사람을 골리는 데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말투였다.
엘로니아는 이쯤 되면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가게에 줄까지 서가며 케이크를 샀을까 봐?
노골적으로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이 응시하는 그녀를 두고 카르벨은 다시금 시녀장과 에이미를 불렀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엘로니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은근한 미소와 함께 표정을 바꾸었다.
시녀장과 에이미는 바깥에서 상황을 대충 가늠해 봤는지, 이전보다 침착해 보였다.
그런 둘을 앞에 두고 카르벨은 태연하게 말했다.
“엘로니아가 그냥 넘어가고 싶은 모양이더군.”
“예?”
동시에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밑도 끝도 없이 앞뒤 다 잘라먹은 단도직입적인 통보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케이크야 다시 사면 되는 거고, 에이미가 실수라고 했으니 믿어보려고.”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님!”
에이미는 처음 들어왔을 적보다 환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마님께서 믿어 주신 만큼, 보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의의 찬 그녀의 답과 함께 님프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숙인 뒤 허공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