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올 것이 왔다
“아, 아닙니다. 지금 막 끝나 가려던 참이었어요.”
부랴부랴 마렌 자작 부인이 일어서자 님프는 화들짝 놀라 엘로니아의 곁으로 돌아왔다.
카르벨은 여유로운 모습으로 느긋하게 걸어 들어왔다.
그는 엘로니아의 등 뒤 소파를 한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갑작스럽게 들른 것은 저이니.”
그 모습이 퍽 다정스럽게 보일 법했다.
일주일 내내 카르벨은 수업 시간 중 보란 듯 그녀의 얼굴을 보러왔다.
덕분에 엘로니아는 부인과 시녀들의 앞에서 사랑하는 약혼자를 반기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그것도 매일, 꽤, 자주.
배우는 시간보다 그 짧은 시간이 더 곤혹스러웠다.
‘이쯤 되면 즐기는 거 아니야?’
의문으로 엘로니아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아니면 매일 감시하는 건가?’
기껏 진짜 정령사라고 감옥에서 빼내어 주었는데,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찰나.
커다란 손이 지그시 엘로니아의 어깨를 눌렀다.
그녀는 멈칫하며 행동을 멈췄다.
곧이어 우려가 섞인 카르벨의 음성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이렇게 교육을 맡아주어 고맙습니다, 부인.”
“어머, 아니에요. 워낙 출중하신 분이라 편했는걸요.”
그녀는 호호, 즐거운 듯 웃으며 공손히 엘로니아를 가리켰다.
“공작님께 드린다고 자수도 얼마나 정성껏 놓으시는지. 이렇게 애정을 담뿍 받으시니 좋으시겠어요.”
“손수건……, 말이죠.”
중간에 말을 늘리는 카르벨의 목소리에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마렌 자작 부인의 말이 길어질수록 손수건을 쥔 엘로니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네. 마침 엘로니아 양도 전해드리고 싶은 모양인데요?”
“제가요……?”
본능적으로 되물었던 엘로니아는 아차,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아, 제가 손수건에 자수는 처음이라. 조금 더 능숙해지면 드리고 싶은데…….”
슬그머니 발을 뺄 준비를 하였으나, 카르벨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대의 교육을 맡은 부인들이 하나같이 완벽한 예비 공작부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던걸.”
그야 당연했다. 교사들은 전부 귀족.
살롱은 늘 귀족들만 상대해 왔다.
간혹가다 까탈스러운 손님이 있기에 흠 하나라도 잡히지 않기 위해 직원들은 모두 완벽한 예절을 배워야만 했다.
역사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게도 데브니 남작은 어린 황손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일을 했었다.
비록 제국에 황손이 많지 않아 금방 일이 끊겼지만 말이다.
그래도 돈이 되는 물건이라면 뭐든 팔려나가는 데브니가에서 역사책만큼은 유일하게 남아 있었다.
그 책을 보고 자란 엘로니아에게 제국의 역사만 놓고 보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헤일튼가의 계보라던가, 주변 왕국이나 소수민족의 문화를 알아야 할 줄은 몰랐지…….’
그러나 이를 모르는 마렌 자작 부인은 그의 말에 공감했다.
“그럼요. 제가 가르쳤던 제자 중 비견할 사람이 없답니다.”
이렇게 되니 손수건을 안 주겠다고 버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카르벨은 당연히 제 물건을 받아 가듯 손을 내밀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마지못해 손수건을 건넸다.
그가 가볍게 가져가고자 했으나, 그녀는 손에 힘을 줘 버텼다.
‘절대로 당신을 위해 놓은 자수가 아니다!’
부들부들, 손수건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이 오고 갔다.
그러나 카르벨은 낚아채듯 단번에 그녀의 손에서 손수건을 앗아갔다.
“고마워, 엘로니아. 이렇게 화려한 손수건은 처음이군.”
“카르벨을 생각하면서 놓았어요.”
엘로니아의 패배였다.
속으로 눈물을 흘렸으나, 겉으론 그를 따라 해사하게 웃었다.
그는 태연하게 빼곡한 자수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자수가 조금 딱딱하군.”
“견고한 제 마음을 뜻한답니다.”
“시기가 적절했네. 마침 줄 선물이 있었는데.”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머리 위로 손이 뻗어져 나왔다.
그 손에는 꽤 부피가 있어 보이는 베이커리 상자가 들려 있었다.
“케이크. 좋아하지?”
분명 카르벨은 뒤에 있고 손만 보고 있는데도 그의 얼굴이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적당한 미소와 친절을 가져다 붙인 듯한 그 얼굴!
그리고 그 모습이 대외적인 카르벨 헤일튼이었다.
결국 케이크를 사 온 일도 그의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건 좀 대단하다.’
일전의 티타임 때 한 말을 기억하고 있던 걸까.
이를 알고 있는 시종들이라면 정말 한 치의 의심조차 안 할 만큼 자연스러운 예비 남편의 모습이었다.
그의 손이 받으라는 듯 달랑, 상자를 가볍게 흔들었다.
엘로니아는 얼떨결에 두 손으로 베이커리 상자를 받아들었다.
“뭘 이런 걸 다.”
보기와 다르게 무게감이 느껴졌다.
슬그머니 상자를 옆에 밀어두려고 하자 뒤에서 카르벨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비싼 거야.”
생색은 덤이었다.
엘로니아는 상큼하게 웃으며 다시 상자를 들었다.
“제가 또 케이크라면 둘이 먹다 둘 다 죽어도 모를 만큼 좋아하잖아요.”
“그건 둘 다 죽어서 모른 거 아닐까, 엘로니아.”
“그만큼 좋아한다는 뜻이죠.”
“그대가 이렇게 기뻐하니 보람이 느껴지는군. 앞으로 종종 사 오지.”
그는 보란 듯 두꺼운 자수 탓에 잘 접히지도 않는 손수건을 뚝뚝, 접어냈다.
뭐지. 나도 저렇게 허리를 접어버리겠다는 뜻인가?
이런데도 마렌 자작 부인은 이런 그의 이중성을 전혀 못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상자 겉에 적힌 베이커리의 이름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세상에, 제도에서 제일 유명한 곳이에요. 워낙 대기 줄이 길어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그 정도인가요?”
“그럼요. 케이크 하면 이곳을 모를 수가 없어요! 공작님에게 이런 면도 있으셨군요.”
열어보니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케이크 조각들이 들어 있었다.
이미 근처를 날아다니던 님프는 케이크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케이크라고?’
엘로니아는 상자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영롱한 케이크 조각을 애매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카르벨이 친절을 베풀 때는 대부분 이유가 있었다.
일주일 전에도 역사에 대해 모르면 물어보라더니, 이렇게 많은 양을 배우고 외워야 한다는 말은 쏙 빼놓는 인성까지 보이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럴지 모른다.
그녀는 경계심을 숨긴 채 뒤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제가 먹는다고 빚이 생긴다거나…….”
카르벨은 노련하게 엘로니아의 말을 받아쳤다.
“초콜릿이 많은 디저트가 두뇌 회전에 좋다지? 도움이 좀 될까 해서 사 왔는데.”
“눈으로 보기만 했는데도 벌써 한 권은 다 외운 기분이네요.”
그러면 그렇지.
그가 말했던 일주일이 다가왔으니 손수 행차한 모양이었다.
지레 찔린 엘로니아는 선물에 감동을 받은 사람처럼 활짝 웃었다.
절반도 채 외우지 못한 역사책을 부디 그가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이다.
엘로니아는 혹여 그가 뒤를 돌아 책을 확인할까 싶어 냉큼 에이미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차랑 같이 준비해 주겠어?”
“몇 잔을 준비할까요?”
“세잔으로 부탁해.”
에이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케이크 상자를 들고 방을 나섰다.
님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 포르르,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세잔이라는 말에 앉아 있던 마렌 자작 부인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제가 수업도 끝났는데 너무 오래 있었네요. 여기서는 일찍 빠지는 게 예의죠, 호호.”
“아, 아니에요, 부인!”
단둘이 남는 것보다 척을 해도 그녀가 있는 편이 나았다.
설마하니 그녀의 앞에서 역사를 가지고 닦달하지는 않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렌 자작 부인은 그 좋은 눈치로 엘로니아의 신호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또 뵈어요.”
그녀는 깍듯하게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엘로니아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배웅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나가기 전 카르벨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고.
***
탁, 방문이 닫히고 방 안에 덩그러니 남은 카르벨은 흐음, 작게 침음을 흘리며 입매를 늘렸다.
“어설퍼.”
어설프다.
속내를 숨기는 것도 어설프고, 비위를 맞추는 것은 더 어설프다.
제 나름대로 굉장히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결코 그렇지 못했다.
거짓말이 전부 얼굴에 드러나는 사람이 어떻게 사기꾼으로 잡혀 들어갔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황실에는 이미 여우 열댓은 잡아먹은 여자가 떡하니 지키고 있는데 엘로니아라면 순식간에 먹힐지도 모른다.
알면서도 건드리면 파르르 떠는 모양새가 재밌어 멈추기 쉽지 않았다.
사실 역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신부 수업은 그저 보여 주기식에 불과했다.
적어도 외부에 이렇다고 보여 줄 만한 이유는 있어야 하니까.
그는 겉보기는 화려한 손수건을 엄지로 대충 쓸었다.
얼마나 겹쳐서 자수를 놓았으면 겉면이 딱딱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희미한 향이 배여 있었다.
“향수는 쓰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손수건에 화려하게 핀 꽃 자수를 응시하다 제 안주머니에 넣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카르벨의 눈에 층층이 쌓인 책이 보였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는 어지러이 쌓인 책들을 손으로 대충 넘겼다.
보아하니 일주일 안에는 죽어도 다 못 끝냈을 진도였다.
그는 책 끄트머리에 7일 단위로 쪼개놓은 표시를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또 열심히지.”
맡겨만 달라던 그녀의 굳센 표정이 떠오르자 카르벨은 다시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재미없던 저택이 조금 즐겁게 느껴졌다.
***
다시 방에 돌아왔을 때, 갔을 줄 알았던 카르벨은 되레 그녀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 손에는 엘로니아가 필기를 해둔 역사책이 들려 있기까지 했다. 그녀가 반도 채 못 본 책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어. 내가 노력을 안 한 것도 아니고, 그렇잖아?’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카르벨의 서늘한 눈매가 그녀를 향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에이미는 차를 준비하러 간 모양인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덩그러니 카르벨과 둘만 남은 상황.
‘설마 죽이겠어?’
조심조심 그의 앞자리에 앉자 그는 탁,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벌써 예비 공작부인에 대해 소문이 자자해. 대단하군, 엘로니아.”
이게 칭찬인지 적당히 반어법으로 돌려 말하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렌 자작 부인이 있을 적보다 한층 차분한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짓말은 아닌 듯 느껴졌다.
그는 정면으로 엘로니아를 직시하며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공작저 밖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해.”
“이미 충분히 나가기 힘들어요.”
“그러라고 짠 일정이야.”
오, 그렇구나…….
엘로니아는 어디서부터 그를 지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일단 눈앞에 있는 일부터 해치우기로 했다.
어차피 카르벨을 해치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외울 기간을 좀 늘려주시겠어요?”
“기간? 아, 일주일 안에 외우라고 했던 일 말인가.”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한쪽 입매 끝을 올리며 말했다.
“입궁 전까지. 그대 건강을 핑계로 대었으니 얼추 한 달 정도면 그럴싸한 기간이려나.”
처음부터 일주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의 답이 산뜻하게 들리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