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사실 가짜가 맞습니다.
“일단은, 안 됩니다.”
데브니 남작의 단호한 거절에 그레이터는 웃으며 다시 말했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야, 당연한 말 아니겠습니까.”
거만하게 싸구려 소파에 등을 기댄 데브니 남작은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이거 안타깝지만, 저희 가문은 지참금을 낼 여력이 없습니다.”
“그것은 헤일튼 가에서 전부 일임하도록 하겠다 하셨습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습니까.”
데브니 남작은 곤란한 듯 고개를 저었다. 이에 데브니 남작 부인은 처연하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데브니 남작가는 모두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삽니다. 엘로니아가 없으면, 저희는 대체할 인력이 없어요.”
“그렇습니다. 하나 있는 아들은 아카데미에 있어, 일을 하려면 졸업까지 적어도 5년은 남았습니다.”
“더군다나 정령사라는 사실도 이제야 알았는데. 적어도 그때까지는 결혼시킬 수 없어요.”
그레이터의 곤란한 시선이 잠시 엘로니아를 향했다. 쉽게 보내 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제 부모는 너무도 뻔뻔했다.
닉스조차도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딸 가지고 이러고 싶나.]
5년? 지금도 이미 혼기였다.
성인식도 예전에 지난 딸을 5년이나 못 보내겠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세 시간의 기 싸움에 지칠 대로 지친 그레이터를 보고 있자니 엘로니아는 미안한 마음에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수치심을 아는 사람이었다.
돈이 없어도 자존심을 판 적은 없었는데, 데브니 남작 부부의 입이 나불댈수록 그녀는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창피해져 갔다.
이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닉스가 불퉁하게 여린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왜 이래. 어디 아파?]
그에게 답을 내어줄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주변을 알짱거리던 닉스는 그녀가 안쓰럽다고 생각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괜히 신경 쓰이게.]
그는 머뭇거리다 자그마한 손으로 그녀의 정수리를 톡 건드렸다.
특유의 시원한 기운이 천천히 전신을 감쌌다.
순간, 머릿속에 장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은 데브니 남작 부부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헤일튼 공작가에서 보낸 혼담을 보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웅웅, 다소 거칠게 머릿속을 울렸다.
“이거 지금 메티카에서 출소하자마자 헤일튼가에서 혼인하겠다는 말 같은데.”
“지금 진짜 정령사라는 거예요? 세상에, 여보. 정령사 연봉이 얼마였죠?”
데브니 남작의 눈동자가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희열에 가득 찬 음성으로 말했다.
“적어도 1만 골드는 되지 않겠어? 얼마 만에 나온 정령사인데, 이 정도는 받아야지!”
“안 되겠다. 지금 당장 드레스를 새로 맞춰야겠어요. 앞으로 황실에서 저희를 자주 부를 테잖아요.”
“하하, 그럽시다!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모슨 자작이 그깟 장사나 하면서 돈 좀 만졌다고 무시할 때 아주 꼴 보기 싫었는데. 얼마나 배를 아파할지!”
“계산을 좀 해 봐요, 여보. 우선 저택부터 좀 제도 근처에 그럴싸한 곳에 사고…….”
그들의 대화에 엘로니아의 결혼 이야기는 없었다.
아직 정식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는데 연봉을 계산하고,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엘로니아의 돈은 자신들의 돈이었고, 당연히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단정 짓고 있었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혼인 소식에 걱정이라든가, 입에 발린 축하라도 할 줄 알았다. 이조차도 엘로니아의 꿈일 뿐이었다.
역시, 그들은 가족이 아니다.
서서히 그들의 기쁨에 가득 찬 음성이 머릿속에서 멀어졌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닉스의 작은 얼굴이 보였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네가 불쌍해서 한 번은 보여준 거야.]
이게 말로만 듣던 정령사의 힘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속을 썩이더니. 미미한 고마움도 들었다.
그러나 인사는 나중 문제였다.
엘로니아는 여전히 그레이터를 앞에 두고 배짱을 부리고 있는 남작 부부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태 잘만 흘러가던 대화가 그녀로 인해 뚝 끊겼다.
이에 데브니 남작 부부는 태연히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애가 이렇답니다. 아직 예절도 채 다 배우지 못했는데 헤일튼가에 보냈다가는 시종들에게 얼마나 창피를 당하겠습니까.”
“맞아요. 여기서 신부 수업까지 시켜야겠네요!”
어떻게든 핑계를 대는 그들을 두고 엘로니아는 조곤조곤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사실은 정령사 아니에요.”
“뭐?”
부모님의 두 시선이 일순간 그녀에게 쏠렸다.
엘로니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출소하려고 거짓말했어요.”
데브니 남작가의 허름한 접객실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곧 데브니 남작은 입매를 비뚜름히 기울이며 비아냥거렸다.
“엘로니아, 이 아비를 속이려면 한참 멀었단다.”
남작 부인 역시 헛웃음을 날리며 앞에 있던 그레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헤일튼 공작가에서 그런 절차 확인도 없이 널 데려와서, 혼인까지 할 리가 없지 않겠니.”
달칵.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곧이어 단단한 목소리가 접객실의 팽팽한 기 싸움을 뚫고 들려왔다.
“잘 알고 있군.”
고개를 들자, 굳은 얼굴의 카르벨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레이터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자, 그는 손을 들어 가볍게 받아넘기며 곧장 엘로니아의 앞에 섰다.
“어째 이야기가 길어지는가 싶었더니. 쓸데없는 소모를 하고 있었나.”
서늘한 눈빛이 데브니 공작 부부를 훑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닉스가 스르륵, 공기 중으로 흩어져 숨을 정도였다. 카르벨은 데브니 남작을 오만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얼마면 된다는 소리지?”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데브니 남작 부부의 얼굴이 환해졌다.
미리 계산을 해둔 사람들답게 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역시 공작님 명성다운 판단이십니다. 저 애는 왜 자기자 진짜 정령사인 걸 속이려고 하는지. 저희가 계산을 해 보니, 대충 정령사 연봉이 1만 골드쯤 될 것 같더군요.”
5년이라면 못해도 5만 골드였다. 이 정도 금액이라면 제도에 지금 데브니 남작가보다 그럴싸한 저택을 사고도 남는 돈이었다.
그러나 제 부모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남작 부인의 뻔뻔한 목소리가 염치없이 흘러나왔다.
“5년이라 계산해서 5만 골드, 거기에 앞으로 공작님께 퍽 도움이 될 테니 5만 더 붙이시면 되겠네요!”
“그러지.”
경악스러웠다. 지참금도 없이 덩그러니 가는 것을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거늘.
지금 이 상황은 아무도 그녀를 정령사라고 믿지 않았을 때보다 더욱 수치스러웠다.
엘로니아는 크게 심호흡을 하며 카르벨의 팔을 붙잡았다.
“카르벨, 허튼돈 쓰지 말아요. 제가 가짜 정령사라는 건 언젠가 들통날 일이라고요.”
“그 말이야말로 허튼소리인 것 같은데.”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요, 사랑스러운 꿀벌.”
친근한 그녀의 말투에 카르벨의 얼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카르벨은 심각하게 되물었다.
“……꿀벌?”
이쯤 했으면 눈치를 채야지. 그도 자신을 여윈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의 팔을 꽉 붙잡은 엘로니아는 안쓰럽게 웃으며 남작 부부에게 고백했다.
“이 사람이 저를 너무 사랑해서 죄를 덮고 가는 거로도 모자라, 불필요한 돈까지 쓰는 걸 더는 두고 볼 수 없네요. 아버지, 어머니. 저는 가짜가 맞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희에 차 미미한 열까지 올라왔던 남작 부부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데브니 남작은 무섭게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내 진작 버릇이 없다는 건 알았다만 이런 식으로 우리를 속이려고 하다니. 안 그래도 네 어미가 그러더구나. 돈을 숨겨 뒀다고? 어디에 쓰려고 했지?”
“그건 제 지참금 용도였어요.”
“헤일튼가에서도 알아야 할 만한 일이구나. 모두 하루 한 끼 간신히 먹는 것을 보면서도 너는 돈을 빼돌릴 생각이 들더냐? 이렇게 가족도 뭣도 없는 애가 공작부인 소리를 듣는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역시……. 저는 헤일튼가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거죠?”
엘로니아는 울상을 지으며 카르벨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반듯한 얼굴은 그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적당히 맞장구나 쳐 주면 좀 좋을까. 재미없는 사람 같으니라고.
엘로니아는 툭, 그의 허리를 찔러 눈치를 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그냥 저는 연애만 할래요.”
“무, 뭐……?!”
엘로니아는 그의 구김 하나 없는 옷을 가볍게 쓸어내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지참금도 없이 가는 것도 눈치 보이는데, 이렇게 못된 제가 공작가에 해라도 끼치면 어떡해요. 가짜라는 게 밝혀지기라도 하면 카르벨도 곤란해질 테고요.”
사색이 된 남작 부부를 보며 엘로니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가짜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사기 동조죄로 함께 메티카에 수감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카르벨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가늠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그에게 혼자 계속 붙어 있기도 민망해 떨어지려던 찰나, 강한 힘이 엘로니아를 잡아당겼다.
“그렇지 않아, 엘로니아.”
카르벨의 목소리를 인식하기도 전,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옭아매고는 놓지 않겠다는 듯 품에 안았다.
“결혼은 그저 형식일 뿐. 나는 그대만 있으면 돼.”
이 사람이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었나.
다정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속삭이는 숨소리마저 가까운 거리에 밀착된 신체가 그대로 느껴졌다.
미미하게 그의 손이 닿은 허리가 간지러웠다.
곧이어 데브니 남작의 목소리가 좁은 응접실에 울렸다.
“그럼 지금 네가 정녕 가짜 정령사라는 말이냐……?”
엘로니아는 단단한 그의 가슴을 두 손으로 밀어냈다.
팔에 오소소 돋아난 닭살을 대충 쓸어 낸 그녀는 데브니 남작 부부를 보며 말했다.
“네. 역시 아버지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헤일튼 공작가에 해가 되느니, 혼인은 없던 일로 하는 게 좋겠어요.”
“가짜라니, 그럼 감옥에서는 대체 어떻게 나온 게야?”
“공작님의 약혼자로, 헤일튼가에서 보증을 서 주었죠. 덕분에 진짜 정령사가 되었지만, 들키게 된다면…….”
종신형을 피할 수는 없겠죠.
엘로니아는 일부러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로니아가 데브니 가문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거짓으로 출소한 정황이 들통난다면 데브니 성을 지닌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다.
이를 모를 남작 부부가 아니었다.
화가 올랐던 남작 부부는 천천히 눈치를 살폈다.
엘로니아는 힘없는 목소리로 마지막을 내뱉었다.
“언젠가는 가짜라는 게 들킬 테니 그때는 아무래도,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카데미에 있는 에릭스도 같이 메티카 감옥에 들어가는 편이 낫겠죠? 온 가족이 단란하게 말이죠.”
“온, 가족이…….”
“네.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이셨잖아요. 온 가족이 함께.”
데브니 남작은 잠시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큼, 흠. 그런 뜻이 아니라. 엘로니아, 네가 혹시 사람들에게 눈총이라도 받을까, 해서 했던 말이지.”
“괜찮아요. 혼인 말고 연애만 하면…….”
“무, 무슨 소리냐. 그렇게 둘이 애틋한 줄 알았다면 진즉 허락했을 것을. 그렇지요, 여보?”
엘로니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끝마친 데브니 남작은 상냥하게 남작 부인에게도 물었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도 예상했던 긍정의 답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