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청혼 장소가 틀렸어요!-109화 (109/234)

02.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진짜 정령사입니다

먼 옛날, 개국공신인 정령사의 가문이었던 데브니 남작가는 1천 년 전의 마지막 정령사를 끝으로 허울뿐인 명예만 지닌 채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데브니 남작은 늘 그 시절에는 공작보다 가문의 권력이 드높았다며 말하고는 했다.

허풍이 심한 사람이었기에 과장된 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헤일튼 공작가에서 이렇게 나올 정도면 아주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엘로니아는 3일째 갈아입지 못한 제 싸구려 드레스를 대충 손으로 털어냈다.

그런 그녀를 보고 그레이터라고 불리는 보좌관이 친절히 물었다.

“우선 헤일튼 공작저에 들르셔야 합니다. 마차로 이동하실 테지만 보는 눈이 있는데 데브니가에서 의복이라도 가져올까요?”

“네, 괜찮아요.”

헤일튼 공작가에서 사람을 보냈다고 하면 데브니 남작가에서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분명 나를 가지고 한몫 챙겨 보려고 하겠지.’

그 꼴을 보고 카르벨의 마음이 바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로니아는 구겨질 대로 구겨진 드레스를 움켜쥐며 넉살스럽게 답했다.

“고작 하루 더 입는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시간 질질 끄는 것보다 이편이 편해요.”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카르벨은 어떤 말을 덧붙이는 대신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머쓱해진 엘로니아는 괜히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기지개를 피고 있는 닉스에게 물었다.

“내 몰골이 그 정도로 별로야?”

[뭐, 같은 드레스를 3일 내내 입은 것부터가 별로기는 하지.]

태연한 답변에 엘로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타박했다.

“물의 정령이 빨래 하나 못 하고. 쓸모가 없네.”

[나를 대체 뭐로 보는 거야?]

물로 봤는데요.

작게 속닥이던 그때. 카르벨의 날카로운 음성이 그녀의 입을 다물 게 만들었다.

“밖에서 되도록 혼잣말은 자제하는 편이 좋겠군.”

“혼잣말 아닌데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리 보여.”

단호한 그의 말에 엘로니아는 웃는 얼굴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약 올리듯 닉스는 주변을 배회하며 말했다.

[그래, 저게 정상이라니까. 네가 이상한 거야.]

눈이 빠져라 닉스를 노려보니, 그는 되려 그녀를 나무라기까지 했다.

[왜 그렇게 봐? 내가 친하지도 않은 인간을 위해 모습을 드러내야 할 이유가 없잖아. 너 나랑 친해?]

엘로니아는 일단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고 봤다.

그러나 닉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난 아닌데.]

그는 태연하게 포르르, 허공에서 한 바퀴 도는 여유를 보일 뿐이었다.

‘저걸 진짜!’

손이라도 뻗으려던 찰나. 카르벨은 팔짱을 풀며 말했다.

“그럼 알아들은 것으로 알고 있지.”

엘로니아가 무어라 답을 꺼내기도 전, 그는 문을 열고 나섰다.

아무래도 닉스에게 고개를 끄덕인 것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해를 정정하는 대신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문턱을 넘자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엘로니아에게 박혀 들었다.

옆에서 상냥한 미소로 그녀를 응시하는 카르벨 탓에 복도에 있는 모두가 조용히 고개만 숙이는 모양새였다.

그는 슬쩍 몸을 틀며 그의 옆자리를 향해 가벼이 팔을 들었다. 함께 가자는 무언의 행동에는 친절이 배어 있었다.

남들의 눈에는 그저 감방까지 찾아올 정도로 사랑하는 약혼자를 보는 한 남자로 보일 법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속지 않았다. 저 시커먼 남자의 가면 속 차가운 얼굴을 이미 보지 않았던가.

앞서 겪어본바, 저 얼굴은 보여주기 용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성큼성큼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카르벨이 상체를 기울였다.

그는 마치 품 안에 가두는 듯 그녀의 위로 드리웠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엘로니아의 두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뭐, 뭐지? 남들 몰래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말실수라도 했나 싶어 그의 얼굴을 힐끔 올려보았다.

카르벨은 시선을 마주한 채 천천히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너른 어깨가 다른 이들의 시선을 차단한 덕에 마치 둘만의 공간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빼냈다.

이에 카르벨은 피식, 작은 웃음을 그녀의 얼굴 위로 흩뿌렸다.

동시에 낮은 음성이 숨결과 섞여 귓가를 간지럽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내 약혼녀가 아니던가. 이름을 불러야지, 엘로니아.”

묘한 소름에 엘로니아의 허리가 바짝 긴장으로 힘이 들어갔다.

늘어진 입매와 달리 그의 그늘진 잿빛 눈동자는 사냥을 하는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았다.

먹이를 몰아 넣어놓고 실수를 하면 바로 물어버릴 준비가 되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카르벨의 예리한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그러고는 툭, 그녀의 얼굴 위로 거대한 제복 상의를 덮어 주며 말했다.

“보는 시선이 좀 많으니 말이지.”

싱긋, 미소까지 덧붙인 그는 태연히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왜인지 패배감이 든 엘로니아는 애써 모른 척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복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그녀는 새삼 카르벨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제국의 검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체격, 그리고 이곳에 있는 잘 훈련된 교도관들보다 머리 하나는 훌쩍 큰 키.

그런 주제에 고운 듯 굵직한 선을 그려내는 얼굴은 서늘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세상의 불공평함에 땅을 쳤다.

‘누구야, 신이 공평하다고 한 사람…….’

앞으로 그녀의 앞에서 공평을 언급하는 사람이 있다면 고개를 들어 카르벨을 보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뚜벅, 뚜벅.

바짝, 카르벨의 등 뒤에 붙어 따라가기를 얼마.

침묵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서자 환한 빛이 그녀를 반겼다.

걸음을 떼기 직전. 카르벨은 앞을 보며 무심히 말했다.

“마차를 준비해 두었다. 앞만 보고 걸어.”

여태 잘만 걸어온 엘로니아였거늘. 의문이 들기도 전에 둥, 둥. 커다란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이 열리고, 제일 먼저 카르벨이 나섰다.

그의 뒤를 따라나선 엘로니아는 평생 보지 못한 진풍경을 눈에 담게 되었다.

메티카 감옥 앞에 펼쳐진 수많은 황실 기사들.

쭉 일렬로 선 인파의 끝에는 카르벨이 말한 대로 헤일튼 공작 가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있었다.

3일 만에 세상으로 나온 엘로니아에게 황실 기사단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의 기사, 테일런 오스핀. 자연의 섭리를 지닌 분을 뵙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많은 기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췄다.

그제야 그녀는 카르벨이 어째서 제게 코트를 주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레이터가 몇 번이고 의복을 가져오는 편이 좋지 않겠냐며 의중을 묻던 이유까지도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이 정도로 보는 눈이 많을 줄이야.

사칭이라며 감방에 넣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 자연의 섭리를 지닌 사람이란다.

엘로니아는 굳으려는 얼굴 근육을 애써 움직여냈다.

카르벨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끝끝내 감방에서 지내다 출소했을지도 모를 일이었거늘.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에서 보낸 기사에게 굳은 얼굴을 보일 수는 없는 터.

형식상 인사를 받기 위해 예를 갖추려던 찰나. 카르벨이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약혼녀가 수감 생활을 하느라 많이 여위었다. 휴식이 필요하니 먼저 자리를 비키지.”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힐끗, 눈짓을 주는 걸 보니 장단을 맞추라는 의미 같았다.

‘그냥 인사 정도는 받아도 되는 거 아닌가?’

떨떠름하게 그를 응시하자, 고개를 숙인 테일런이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께서 귀한 분을 알아 모시지 못한 죄에 사죄를 드리고 싶다 하였습니다. 엘로니아 님께서 허가만 하신다면, 정령분들과 함께 황실에서 뵙기를 청합니다.”

정령과 보자고? 엘로니아의 눈이 빠르게 허공에서 흔들렸다.

카르벨이 여위었다고 했던가.

‘여위지 않은 사람이 여윈 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빈혈인 것처럼 쓰러지기라도 해야 하나?’

엘로니아는 다급히 공기를 들이마셔 제 볼을 홀쭉하게 한 뒤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카르벨, 들어가서 쉬고 싶어요…….”

병약은 모르겠고, 삼일 정도 굶은 목소리는 나왔다.

닉스의 웃겨 죽으려는 웃음소리가 들렸으나 그보다는 정령을 입증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 중요했다.

엘로니아의 가련함에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카르벨은 코트를 그녀의 어깨에 덮어 주며 말했다.

“이런. 정말 죽다 살아난 목소리로군.”

맞추라 할 때는 언제고? 미미하게 웃음기가 섞인 답이었다.

엘로니아가 그를 노려보자 카르벨은 태연하게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정말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가벼이 돌려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괜찮은가. 그대가 원한다면 안아서 마차까지 옮길 정도의 품은 있다만.”

“오……. 정말……. 대범하시군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대의 건강이 우선이니.”

카르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안기라는 듯이 턱을 붙잡았던 손을 그녀에게 내민 것은 덤이었다.

싸우자는 건가? 신종 결투 신청?

엘로니아는 당장 그의 손을 빠르게 때려 치며 전부 엎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상상으로만 남겨두었다.

차마 황실 기사단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할 자신은 없으니 말이다.

엘로니아는 울상으로 이를 꽉 물은 채 답했다.

“그래도 폐하께서 보내신 기사단 분들이 있으신데. 예의는 갖춰야지요.”

그녀가 걸음을 내딛자 기사들이 파도가 갈리는 것처럼 길을 터주었다.

“정령사님, 괜찮으십니까? 힘드시다면 제가 모시겠습니다.”

연기가 나쁘지는 않았는지, 테일런이 뒤쫓아오며 말했다.

엘로니아는 똑바로 걸으면 의심이라도 할까 싶어 일부러 한 번 비틀거렸다.

카르벨은 힐끗, 그녀를 흘겨보고는 모른 척 정면을 직시했다.

굳게 일자로 뻗은 입매는 언제 움직였냐는 듯 견고했지만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웃었다. 분명 비웃었어!’

누구 때문에 지금 팔자에도 없는 가녀린 척을 하고 있는데!

엘로니아는 원망 대신 비틀거리며 콱, 그의 발을 밟았다.

아쉽게도 카르벨의 얼굴에는 작은 움직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여전히 그는 친절하고 다정한 약혼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차 문이 열리자,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가뿐히 마차 위로 올려 주었다.

놀란 엘로니아가 그의 어깨를 짚으며 소리쳤다.

“공작님……!”

“이름을 불러야지. 아직 보는 눈이 많아.”

눈치를 보던 엘로니아는 쓰러지듯 마차에 몸을 기댔다.

“3일 만에 해를 보려니 눈이 부셔요…….”

이것도 못 할 짓이다.

카르벨이 그녀와 마주 보고 앉자마자, 마차는 기다렸다는 듯 움직였다.

말발굽 소리만이 한참을 흐르던 마차 안.

한참이 지난 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카르벨이었다.

“연기가 제법이군, 엘로니아.”

비스듬히 누워 눈동자만 굴리던 엘로니아는 그제야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는 답답한 카르벨의 제복 상의를 벗어내며 말했다.

“공작님. 임기응변도 좋은데, 좀 먹힐 만한 주제로 선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던가?”

“여위었다가 뭐예요. 저를 딱 보시면 견적이 나오지 않으세요?”

“지금도 충분히 연약해 보여. 앞으로 혼인식까지 더 바빠질 예정이니, 열심히 먹고 준비에 매진하는 쪽을 추천하지.”

혼인식.

들었을 때만 해도 영 현실감이 없던 일이었는데.

막상 황실 기사단까지 나서는 모습을 보고 나니 훅 체감이 되었다.

창문으로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보던 그의 고개가 엘로니아를 향했다.

쓸데없이 잘생긴 얼굴과 달리 그는 높낮이 일정한 목소리로 감정 하나 없이 답했다.

“되도록 폐하가 아닌 다음에야 고개는 숙이지 않는 것이 좋아. 대륙에서 단 하나뿐인 정령사다. 신경 쓰는 게 좋겠군.”

“정령사도 예의는 갖춰야 하지 않을까요?”

“자연을 대변하는 것이 정령사다. 언제 자연이 인간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았던가.”

그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숙지할 것이 많겠어.”

“정령에 대해 들어본 게 별로 없어서요. 부탁드릴게요.”

“그것도 포함해서.”

그러나 카르벨은 명확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어갔다.

“정령사가 뭘 하는지는 알고 있나?”

“오래된 자연과 물건에서 역사를 읽을 수 있다고 알고 있어요.”

이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비록 정령의 흔적 하나 남지 않은 데브니가라지만, 대대로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일상에 침투해 있었다.

카르벨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점을 지적했다.

“그래. 근데 그대는 가짜 정령사지.”

가짜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해명할 뻔했으나 엘로니아는 잘 참아냈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을 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저희……. 앞으로 가짜라는 말은 보안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생략하는 편이 어떨까요?”

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간단히 그녀의 말을 넘겨버렸다.

“그대는 정령이 없으니 과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러니 남들을 속이려면 그만큼 남의 과거를 알고 있어야겠지.”

카르벨의 눈에 잠시 이채가 서렸다.

그는 한 자, 한 자를 단호히 내뱉었다.

마치 다른 대안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외워라.”

“전부요?”

“가문의 역사를 비롯해 비공식적인 정보 또한 내가 넘겨줄 터이니 그 부분까지 포함해서.”

경악으로 물든 엘로니아의 표정과 달리, 카르벨의 얼굴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아, 헤일튼가의 예비 안주인으로 배워야 할 것도 같이.”

한 치의 양보도 없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서 협상의 여지는 없어 보였다.

엘로니아는 다시 입을 열려는 그의 말을 다급히 막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완벽한 정령사가 대체 왜 필요하신 거예요? 제게 정보를 주실 정도면 굳이 없으셔도 되시겠는데요.”

여태 빠르게 답을 하던 카르벨의 눈동자가 잠시 그녀의 의중을 살피는 듯 얼굴 위를 돌아다녔다.

엘로니아는 이것만큼은 반드시 듣겠다는 집념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직시했다.

한참 뒤, 그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정령사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두려워할 사람이 많다.”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툭, 말을 이었다.

“그대를 제거하려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군.”

엘로니아는 펄쩍 뛰며 새된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건 미리 말씀을 해주셨어야죠!”

“어차피 거절했으면 내가 그대를 제거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말을 저렇게 할 말인가.

엘로니아는 놀라 떨리는 심장을 심호흡으로 달랬다.

그래, 가짜 정령사에 대해서는 감방에서 나오는 조건이었으니 감안할 수 있다.

하지만 애정도 없는 결혼 생활을 영위하면서 목숨까지 내놓고 살 생각은 없었다.

때문에 엘로니아는 그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좋아요. 그냥 편한 대로 가짜 정령사 역을 할게요. 대신.”

그의 잿빛 눈동자가 창문 밖에서 그녀에게로 옮겨졌다.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진짜 정령사로 인정을 받으면. 그때는 이혼해 주세요.”

카르벨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의 의중을 살피는 듯 훑었다.

엘로니아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로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도 안 알려주셨잖아요. 정령을 안 믿으신다면 전혀 문제될 일 없는 부탁이에요.”

“아직 제대로 하기도 전에 이혼부터 생각한다라……. 썩 믿음직스럽지는 못하군.”

“싫으시면 그대로 다시 메티카 감옥으로 돌아가셔도 돼요.”

그가 보증인으로 세워진 이상, 그녀가 가짜 정령사가 되면 곤란한 것은 카르벨도 마찬가지였다.

엘로니아는 등을 기대며 자신 있게 말했다.

“뭐, 공작님도 사기죄 공범으로 보석금 내고 싶으시다면 말리지 않습니다.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으시다는데, 좋은 일에 동참해야죠!”

어깨까지 으쓱이자 카르벨은 불쾌한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오기로 이혼 허가를 안 하는 수가 있어.”

“죄송합니다. 이혼해 주세요!”

빠른 그녀의 태세 전환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르벨은 그제야 흔쾌히 답을 내주었다.

“그래, 그대가 인정받으면 그렇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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