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저는 진짜 정령사인데요
“이름.”
조용하고 작은 방 안.
창문조차 없으며 환풍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퀴퀴한 시가 냄새만 가득 찬 곳.
퉁퉁한 남자는 귀찮다는 어투로 앞에 앉은 작은 여자에게 묻고 있었다.
여자는 바짝 의자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엘로니아 데브니요.”
“데브니 남작가? 으음…….”
남자는 대충 이맛살을 찌푸리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엘로니아는 초조함에 그의 제복 위에 박힌 치안관 자수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에게 남자는 다시 물었다.
“성인식은 지났나?”
“네, 지났어요. 아니, 아저씨. 제가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요……!”
“죄목은 정령사 사칭 및 사기. 쯧쯧. 다 큰 아가씨가 왜 이럴까.”
엘로니아는 억울함에 몸을 들썩이며 외쳤다.
“아저씨, 사기라뇨.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래요, 그래. 여기 오면 다 아니라고 하더라고.”
남자는 건성으로 답변하며 엘로니아의 뒤로 손짓했다.
곧 기다렸다는 듯 똑같은 치안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그녀의 주변을 빙 둘러싼 남자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데브니 영애. 일어나 주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정중했지만 그들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메티카 감옥.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엘로니아는 책상을 부여잡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저씨, 저 정말 정령사라니까요? 데브니 가문 아시잖아요. 그 먼 선조의 선조께서 에스피디 제국의 건국을 도우셨다는, 그 정령사 가문……!”
“그래요, 알지요. 그럼 보여 줄 수 있어요?”
엘로니아는 고개가 떨어져라 끄덕였다. 그녀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남자의 눈에 망설임이 서렸다.
여기서 입증하지 못하면 그대로 감방행이었다.
에스피디 제국에서 정령사 사칭은 다른 범죄와 달리 ‘건국 공신 사칭죄’에 속했다.
건국 공신에 대한 예우와 더불어 공신을 치하한 황실 기만까지 합해지니 그 무게가 다른 사칭죄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정령사로 인정만 받는다면, 건국 공신 못지않은 대우를 받으며 지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제국 역사상 정령사는 단 세 명뿐이었다.
건국 신화에나 나오지, 현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정령사는 허무맹랑한 과거의 산물이었다.
이렇다 보니 매년 정령사를 사칭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고는 했다.
이를 모르지 않기에 치안관의 요청에 엘로니아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그럼 집중해주세요.”
그녀는 가만히 어수선한 공기를 읽었다.
넘실거리는 공기 속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잔잔한 파동이 일자 조금 전의 다급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용한 조사실에서 그녀는 작게 읊조렸다.
“닉스.”
잠깐의 침묵. 모두가 엘로니아에게 집중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 *
메티카 감옥은 에스피디 제국의 모든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범죄자가 동일한 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다.
황실에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거나, 돈이라도 제법 있어 보석금을 지급할 여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옥 내에서도 괜찮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물론 엘로니아는 둘 중 어떤 곳에도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데브니 영애. 편지 왔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들자 교도관은 편지 한 장을 전했다.
입소한 지 3일 만에 데브니 남작가에서 온 소식이었다.
엘로니아는 기대 없이 가문의 인장이 박힌 실링을 뜯어냈다.
그 안에 쓰인 커르턴 데브니 남작의 필체는 간결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우리도 조사를 받으러 오라더구나. 네가 혼자 벌인 일이니 가문의 이름이 더 이상 오르락내리락하지 않게 처신하길 바란다.>
엘로니아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내용을 감흥 없이 읽어내렸다.
어째서 종이 낭비를 해가며 편지를 보냈나 했더니, 이어진 내용에서 본 목적을 알 수 있었다.
<동생에게 본보기가 되지는 못할망정 이런 일로 아카데미에 있는 에릭스에게 연락이 가게 하다니.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르겠구나. 네 물건도 모두 처분했다. 어차피 수감된 동안 쓸 일도 없을 테니 에릭스 학비에 보태도록 하마.>
엘로니아는 차디찬 바닥에 모포를 뒤집어쓴 채로 마지막 글자를 노려보았다.
<너도 데브니가의 가족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거라 믿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엘로니아는 그대로 종이를 구겨버렸다.
가족. 그 안에 엘로니아의 자리는 없었다.
부모님에게 가족이란 가문을 이을 아들, 에릭스뿐이었다.
그들은 늘 그가 가문의 희망이고 미래라며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데브니가에서 엘로니아는 그저 언제 결혼해 집을 나갈지 모르는 시한부 노동력에 불과했다.
‘그래 놓고 가족이라는 핑계를 대다니.’
꾸깃, 그대로 편지를 구겨 던지려고 할 때.
철컹, 감옥의 문이 열렸다.
감시관은 들어오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엘로니아 데브니 양이 누구십니까?”
“저, 저요.”
그녀가 구겨진 편지를 들고 엉거주춤하게 손을 들자 감시관은 애매한 얼굴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심문이 추가로 필요하니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세요.”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면 시간이 문제겠는가.
엘로니아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눅눅한 철창을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 물방울이 맺혔다.
물은 곧 작은 아이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뭐야, 거기가 더 좋았는데!]
대뜸 건네는 소리가 이렇다.
엘로니아는 복화술로 그에게 눈치를 주며 읊조렸다.
“너는 양심이 있으면 그런 소리 하면 안 돼.”
감시관의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조서를 받는 순간부터 메티카 감옥에 수감 되기까지 엘로니아를 보는 시선은 대체적으로 감시관과 비슷했다.
하지만 닉스를 처음 본 날은 도저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가던 중, 마주 오던 치안관의 수염 속에서 얼굴을 내민 닉스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이었다.
정령사라는 기쁨을 누리기도 전에 닉스를 입증해야 했으나, 그럴 때마다 그는 약을 올리듯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차피 나 빼고는 닉스를 아무도 볼 수 없으니 의미 없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이러나저러나 감방 신세는 면치 못할 팔자인 모양이다.
감시관을 따라 한참을 걷자, 차가운 복도가 아닌 대리석이 깔린 바닥이 나타났다. 심지어 기둥조차도 값비싸 보이는 재질이었다.
엘로니아는 눈을 굴리며 닉스에게 물었다.
“이거, 좀 높은 사람에게 심문받는 건가……?”
[억울해하더니 잘됐네. 네가 정령사라는 걸 확인해 주겠다는 거 아니야?]
여태 들은 닉스의 헛소리 중 제일 말다운 말이었다.
거대한 문 앞에 도달한 감시관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누가, 왜 왔는지조차도 고해지지 않았지만, 문은 열렸다. 정형화된 기준에서 벗어난 절차였다.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널따란 방에는 고풍스러운 손님용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한 남자.
“그쪽이 엘로니아 데브니 양, 맞습니까.”
카르벨 헤일튼.
제국의 검이라 불리는 총사령관.
모든 군대가 그의 아래에 있다는 헤일튼 공작이었다.
제도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없으나, 엘로니아에게 그의 이미지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주로 귀족들을 상대하는 살롱에서 일을 도왔는데, 이런 곳에 오는 어린 영애들의 대화에는 높은 빈도로 헤일튼 공작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수려한 외모와 더불어 누구에게는 손수건을 주워주었다느니, 다른 누구에게는 웃어주었다느니 하는 가십거리가 전부였다.
‘매번 애인을 갈아치우는 쓰레기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분위기는 아니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카르벨을 살폈다.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그의 의복과 자세는 마치 총사령관이라는 직급에 어울리는 절제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딱딱한 겉모습과 달리 카르벨의 입매는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권력이 있는 자의 여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검은 머릿결에 걸맞은 잿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그녀를 응시했다.
“앉죠. 할 얘기가 있으니.”
카르벨은 자신의 앞자리를 눈짓했다.
서늘한 인상과는 다르게 제법 정중한 말투였다.
분명 나무랄 데 없는 친절이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엉거주춤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정령 때문에 부르신 건가요?”
“아마도.”
애매한 답과 달리 그는 또렷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희미한 압박감에 엘로니아는 슬쩍 그의 눈을 피했다.
무려 헤일튼 공작가다.
비록 몸이 약해 일찍 서거하였지만, 황후가 헤일튼 공작가의 출신이었다.
그런 카르벨이 직접 그녀를 감시관을 시켜 이 텅 빈 방에 불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혹시 내가 진짜 정령사라고 생각해서 확인차 온 건 아닐까?’
희미한 희망을 품고 카르벨을 힐끔,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늘 권력의 중심에 있는 사람다운 오연한 기운이 넓은 공간에 가득했다.
그 중심에서 카르벨은 가만히 앉아 일정한 속도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엘로니아가 무어라 입을 열기 직전. 카르벨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테이블에 작은 케이스를 놓았다.
달칵, 열린 케이스에는 촘촘히 보석이 박힌 반지가 있었다.
잿빛 눈동자는 또렷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한참 만에 그의 입이 열렸다.
“레이디 엘로니아. 저와 결혼해 주시죠.”
엘로니아는 눈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방금 뭘 해 달라고 하셨죠……?”
“결혼.”
“누가요?”
“엘로니아 양과 내가 되겠군요.”
처음으로 엘로니아는 진지하게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고민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한낱 남작 가문에 안면도 없는 그녀에게, 감옥에 갇힌 이 시점에서 청혼이라니.
혼란스러운 그녀와 대조될 만큼 카르벨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정령사라고 속일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제법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는 엘로니아 양이 적격이고.”
딱 필요한 시기에 기가 막힌 제안이라니. 혹시 사기는 아닐까?
엘로니아는 잔뜩 의심을 품은 눈초리로 카르벨을 흘겨보며 물었다.
“정령사인 척할 사람을 구하는 거라면 저 말고도 많지 않나요?”
“데브니가 출신의 사칭범은 많지 않죠.”
“그, 그렇기는 하죠.”
“이 정도면 꽤 믿음직한 배경이고.”
정작 엘로니아는 1천 년 전에 있었다는 정령사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기록된 것들이 대부분 황실 지하 서고의 화재로 소실된 탓이 컸다.
때문에 가문을 통해 구전되는 것이 전부였는데, 허세가 일상인 데브니 남작의 말을 온전히 믿기는 힘들었다.
가문을 나가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이럴 때는 정작 제 배경이 된다는 사실에 입맛이 씁쓸했다.
엘로니아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꼭 결혼이어야 하나요?”
“증거도 없는 그대를 내가 약혼자라는 증인으로 빼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카르벨의 너무 당연하다는 말투에 그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너무 황당한 제안을 받으니 다른 의심이 들었다. 혹시 이것도 어느 일종의 시험인가? 사실 그녀가 정령사인지 확인하기 위한 거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로니아는 뭐라도 어필해야겠다는 생각에 정중히 되물었다.
“결혼 말고 고용 계약은 어떠세요?”
그의 미소 속 감춰져 있던 날카로운 눈동자에 불신이 서렸다.
엘로니아는 재차 그를 설득했다.
“정령사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신 거라면 공작님도 가짜보다는 진짜가 좋으실 거잖아요, 그렇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요.”
“여기 준비된 정령사가 있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시면 정령사로 인정받았을 때, 헤일튼 공작가에서 요구하는 일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카르벨은 커다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날렵한 턱선을 따라 마디가 도드라지는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잿빛 눈동자 위로 드리워진 그림자 탓인지 몰라도, 매서운 시선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분명 변한 것이 없는데, 그의 분위기가 사뭇 매서웠다.
한참을 그녀를 들여다보던 카르벨의 입매가 비뚜름히 기울었다.
“사기 혐의로 들어왔다더니.”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심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증거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냉랭한 기운이 그녀의 피부에까지 느껴졌다.
예의상 걸려 있던 미소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령사인지 시험해 보려고 하는 건가 싶었던 희망이 깨졌다. 여태 모든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카르벨 역시 그녀를 사기꾼으로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령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마저 정령을 믿지 못하는 이 각박한 현실이 답답했다.
잡아서 보여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증명을 할 수도 없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평생 저런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걸까.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은 엘로니아는 팔자 좋게 제 귓불에 매달려 있는 닉스를 검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있잖아요!”
그의 날카로운 눈길이 엘로니아의 손가락 주변을 배회했다. 카르벨은 작게 인상을 쓰며 답했다.
“지금 내 눈에 엘로니아 양이 가리키는 건 자기 자신인데 말이지.”
고개를 돌려 제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그녀는 냉큼 닉스를 붙잡아 내밀었다.
“제 손을 잘 보시면 투명한 5살 난 아이가 보이신다거나…….”
“안 보인다.”
“-하지 않으시구나.”
카르벨의 따가운 눈길이 손 위에 머무르자 닉스는 빠르게 물방울이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엘로니아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필요할 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령이라니!
부들거리는 그녀를 건성으로 훑은 카르벨은 덤덤히 물었다.
“결혼은 못 하겠다는 건가?”
“이게 결혼은 조금…….”
엘로니아는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마지막 말끝을 흐렸다.
애초에 그녀는 진짜 정령사다.
사기꾼으로 낙인이 찍힌 것도 서러운데, 이제는 가짜인 척까지 하라니.
불쾌한 것은 둘째치고, 진짜 정령사인 걸 증명할 수만 있게 된다면 돈도 명예도 전부 들어올 터.
굳이 결혼이라는 제약으로 묶일 필요는 없었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제가 공작님이 기분 나쁘시라고 드리는 말씀은 아닌데요.”
“도입부부터 기분이 나쁠 것 같으니 그대로 입을 다무는 게 좋겠는데.”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가 진짜 정령사입니다.”
“……그렇군.”
믿어 준 걸까? 기대하는 엘로니아를 두고 그는 태연하게 팔짱을 끼며 외쳤다.
“그레이터 있는가.”
“예, 각하.”
덜컥, 문이 열리자 허리춤에 검을 찬 한 남자가 들어왔다.
카르벨은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레이터라 불린 남자에게 지시했다.
“감방으로 돌려보내.”
일정한 발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엘로니아의 마음은 다급해졌다.
‘만에 하나 닉스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평생 정령사 사칭 및 사기죄가 낙인이 되어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주급이 괜찮은 취업 자리에서는 그녀의 수감 기록만 보고 거절할 것이 뻔했다.
데브니 남작 부부는 자신들이 입는 옷과 먹는 음식. 모두가 그녀의 희생으로 이뤄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족속들이었다.
그녀가 여전히 누명을 쓴 채로 출소한다면 데브니 남작가에 돈을 헌납하는 지긋지긋한 삶이 지속될 것만 같았다.
기다렸다는 듯 메티카 감옥에 수감되자마자 그녀를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마지막까지 제 물건까지 처분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끝까지 엘로니아를 돈으로만 본 이들이다.
그런 데브니가를 위해 더 이상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가짜 정령사인 척을 하다, 남들에게 보일 만큼 능력이 생기는 때를 기다리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탕.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책상을 두 손으로 짚었다.
그녀는 마주 앉은 그를 향해 결심한 듯 단호히 말했다.
“합니다! 합시다, 결혼!”
그제야 카르벨의 희미하게 늘어진 입매에서는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안 그래도 그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다행이군.”
“처, 처리요……?”
“비밀을 유지하는 데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태연한 모습과 달리 내포한 말의 의미는 살벌했다. 엘로니아는 애써 입매를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결국 답은 정해져 있던 거잖아……!’
그렇게 엘로니아는 가짜 정령사가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