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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바닷가 (106/234)

106. 바닷가2021.12.05.

  카르벨의 권유에 부부는 어리둥절하게 눈만 끔뻑였다. 남자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공작님. 저희는 따로 저, 전하가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게 없는걸요…….”

“그대들은 가서 자네들이 겪은 일만 말하면 되네.”

카르벨은 전혀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그는 싱긋, 입매를 길게 늘이며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익숙한 표정에 엘로니아는 속으로 조용히 말을 삼켰다.

‘수작을 부리고 있는 표정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카르벨의 나직한 음성이 친절하게 흘러나왔다.

“그 뒤는 알아서 흘러갈 터이니.”

  *** 에스피디 제국의 번화가. 널찍한 대로변에 고급스럽지만 안이 잘 보이지 않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그 뒤로 조금만 들어가면 조금 질이 좋지 않은 가게들이 드문드문 있기도 했다. 치안관은 우려스러운 눈빛으로 마차 근처로 다가갔다. 보통 이런 곳에 있을 법한 마차는 아니었다. 가문의 인장이 박혀 있거나 대여 마차가 아닌 걸 보아하니, 어느 가문의 귀족 영애나 영식이 놀러 온 듯싶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가씨와 도련님들이 험한 꼴을 당하면 괜히 피곤해지는 것은 아랫것들이었다. 그래서 조금 더 안전하고 귀족들이 좋아할 법한 곳을 알려 주기 위해 다가가려 할 때.

“그, 저기. 그…….”

조금 멍청해 보이는 서민 남자 하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죄, 죄송하지만 무슨 일이신가요?”

“크흠. 이 마차가 자네가 모시는 주인의 마차요?”

“아, 예. 그렇습니다.”

“거 여기 잘못 세웠다가 나쁜 놈들을 만나면 피곤해질 터이니 저쪽, 가게 많은 곳에 정차하도록 주인분께 말씀드리게.”

“네, 네.”

어리바리하게 하는 답에 치안관은 영 미덥지 않은 듯 그를 훑으며 지나갔다. 치안관이 멀어질 때쯤. 뒷골목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후다닥, 뛰어나왔다. 그녀는 남자를 보며 예민하게 물었다.

“베오. 전하를 지키라 하였더니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유모님, 죄송합니다. 잠깐 본다는 게…….”

어물쩍거리는 그를 못마땅하게 내려다본 유모는 더는 필요 없다는 듯이 쌩하니 마차로 다가갔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열며 베오에게 했던 것과 달리 걱정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전하. 물어보았는데, 시약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돌팔이 아니야? 괜한 돈 쓴 거 아니냐고.”

“하지만 다른 예시로 실험을 해 보았을 때 잘못 판단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럼 대체 왜 헤일튼가의 방계들이 이렇게 조용히 있는 건데!”

일순간 커진 목소리에 아셀리 본인도 놀란 듯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다행스럽게도 번잡한 곳인지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유모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마차 안으로 들어와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전하. 어차피 폐하께서 돌아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곧 에스피디 제국이 전하의 것입니다.”

“카르벨이 리프리 저하와 라티에 왕국으로 갔다잖아. 분명 뭔가 있어. 그게 뭐지?”

잘근, 입술을 짓씹은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초조함이 가득한 아셀리의 손을 유모가 꽉 쥐었다. 그런 모습을 마차 밖에서 베오는 멀뚱거리며 지켜볼 뿐이었다.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그는 바보처럼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안 그래도 짜증이 솟구치는데, 저 얼굴을 보니 더 열불이 터졌다.

‘저렇게 멍청하니까 치안관에게 한소리 듣지. 거기다 대고 한소리도 못 하는 꼴 하고는.’

마차를 보고 헤실거리니 오히려 사람들이 이상한 듯 베오를 흘기는 게 느껴졌다. 아셀리는 안 되겠다 싶어 조용히 유모에게 지시했다.

“베오도 잠시 마차에 올라오라고 해.”

“예? 굳이…….”

“알다시피 쟤는 내 편이잖아. 멍청해서 누구 배신할 머리가 안 돼.”

그 말에 유모도 딱히 반박할 거리가 없는 듯 머뭇거렸다. 결국 유모의 손짓에 베오는 신난다는 듯이 마차에 올라탔다.

“일은 다 끝났어?”

“전하께 예를 갖춰라!”

“요?”

베오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아셀리는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유모와 나누던 대화를 이어갈 뿐이었다.

“로엘 전하에 대해 찾아다니는 눈치야. 리프리 저하를 만날 이유가 그것밖에 없다고.”

“로엘 전하에 대해 안다고 한들, 무엇이 문제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유모는 몰라.”

아셀리는 짜증스럽게 입술을 이로 짓이겼다. 정작 유모는 이유를 몰라 답답한 모양이었지만, 예민한 그녀의 상황을 알기에 입을 다문 눈치였다.

‘로엘 전하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게 된 거지? 대체 어디까지?’

덜덜덜 불안감으로 떨리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베오가 멀뚱하게 물었다.

“아셀리. 힘들어?”

“시끄러워.”

날카로운 그녀의 답변에도 베오는 익숙한 듯했다. 오히려 고개까지 기울이며 특유의 맹한 표정으로 되묻기까지 했다.

“이렇게 몰래 나와서 유모랑 약을 알아볼 정도로 해야 하는 일이야?”

“네가 뭘 알아.”

“나는 그냥……. 옛날에 너는 엄청 당당하고 멋있었거든. 근데 지금은 너무 위축되어 보여서…….”

주절거리듯이 하는 말들이 아셀리의 신경을 건드렸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가 쏘아붙이듯 그에게 말을 뱉어냈다.

“그래서. 어쩌라고. 여기까지 와서 다 그만두라고?”

“힘들면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하. 아셀리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경멸 어린 시선이 절로 그를 향했다.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내게 훈수를 둬.’

멍청하고, 더 멍청한 그의 아버지조차 어떻게 하지 못해 도망치는 것으로 끝을 냈던 주제에. 아셀리의 음성이 날카롭게 튀어나왔다.

“지금 나보고 빈민가의 무희 어미와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주기적으로 찾아와서 날 패던. 그 바닥으로 가라고 말하는 거야?”

“지금이 더 힘들어 보이니까…….”

“누가 힘들대? 누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고, 모두가 고개를 조아리고, 좋은 음식에, 아무도 날 때릴 수 없는 지금이 힘들다고?”

한 번 화를 뱉어내고 나니 뒤는 더 쉬웠다. 마치 그간 참았던 말을 토해내듯 베오에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죽어도 그렇게 못 해. 내가 이 자리를 어떻게 지켰는데.”

“아셀리…….”

“너는 이곳까지 올라와 본 적이 없으니 모르지. 사람들은 자리가 바뀌고 옷이 고급스러워졌다는 이유 하나로 날 보는 눈이 달라져.”

빈민가의 얼굴 예쁘장한 무희의 딸. 그런 그녀가 자라면 나중에 크게 한몫하겠다며 눈독 들이던 능글맞고 지저분하던 빈민가의 남자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고작 예법에 맞춰 웃고 그럴싸한 말투를 구사하면 다들 제게 고개를 조아렸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무희의 딸로 취급받던 때와 황궁에 렌디먼 황제의 사생아로 들어갈 때는 분위기부터 달랐으니까. 기저에 깔린 경멸쯤은 평생 받아온 것에 비하면 약소였다. 지금도 구시대 귀족들이 그녀를 얼마나 반대하는지 안다. 혈통, 그깟 혈통. 렌디먼 황제의 피가 반이 섞였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던가. 그녀가 하는 말에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았으며, 예쁘다는 말이 값을 매기는 등급이 아닌 우러러보는 칭송으로 변했다. 그런데 그녀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죽음보다 더 비참한 삶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셀리에게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것은 죽음보다 끔찍했다. 이미 돌아오기에는 너무 늦었다.

‘돌아갈 생각도 없었지만.’

아셀리는 차갑게 베오를 향해 짓씹듯 말했다.

“너는 그 밑바닥 인생이 좋으면 그렇게 살아. 남까지 밑으로 끌어내리지 말고.”

  ***

“그럼 잘 생각해 보시고 리프리 저하께 꼭 연락해주세요.”

엘로니아는 재차 로엘 황자의 친부와 친모에게 다짐시키듯 말했다. 부부는 여전히 죄를 지었다는 생각에 선뜻 답을 건네지 않았다. 이미 헤일튼가에서는 그들과의 약속을 한 번 어겼다. 그게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랬다. 그래서 엘로니아도 더는 독촉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주기적으로 확인한 뒤 연락드리겠습니다.”

리프리는 에스피디 제국으로 돌아갈 헤일튼가의 마차 앞에 서서 배웅하며 말했다. 제법 의욕적인 것을 보아하니, 뭐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눈치였다. 카르벨은 그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에스코트를 위해 잡은 엘로니아의 손을 가볍게 들어 마차로 안내할 뿐이었다. 가뿐하게 올라탄 엘로니아는 리프리를 보며 아쉬운 듯 말했다.

“왕비 전하께 대신 안부를 전해주세요. 말씀드리지 못하고 가서 죄송하다고도 전해주시고요.”

“그런 것에 마음 두실 성격이 아니야.”

어째서인지 마주 앉은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에 리프리도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음에는 좀 편하실 때 오셔서 즐기다 가시면 좋겠습니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다그닥.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는 창가에는 울창한 나무가 보였다. 한참을 길을 따라 보이던 풍경이 어느 순간 탁 트인 바닷가를 보여주었다. 탁 트인 듯한 풍경에 엘로니아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벨이 똑똑, 마부가 앉은 곳을 향해 손을 두드렸다. 곧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멈추더니 바닷가 근처에 멈춰 섰다. 달칵, 문을 연 카르벨이 먼저 내려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깐 보고 가.”

“아, 괜찮아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좋은 건 좋다고 해도 돼.”

바닷가의 시원한 향이 마차 문을 타고 넘어왔다. 결국 그 유혹에 못 이겨 엘로니아는 그의 손을 잡고 내렸다. 탁 트인 시원한 바람이 가슴까지 뻥 뚫리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이런 것은 또 기가 막히게 알아내는 정령이 있었으니.

[와, 바다다! 조개껍데기로 정령사를 괴롭히는 놈들을 때려주자!]

닉스와 님프는 신이 난 듯 모래사장에 파묻혀 조개를 줍고 있었다. 어째 닉스가 던지려고 노리는 각도가 딱 카르벨을 향한 것이 불안하기까지 했다.

“닉스, 안 돼!”

[안 돼? 왜? 엘로니아가 싫다는데 강제로 마차에서 내리게 했잖아.]

“아, 아니야. 싫지 않아!”

엘로니아의 빠른 변명에 닉스는 여전히 이해를 못한 듯 조개껍데기 하나를 들어 보이며 되물었다.

[그럼 던지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눈짓하며 빠르게 고개를 젓자, 아쉬운 듯 닉스는 조개껍데기를 대충 바다에 던져버렸다.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며 꺄르륵 웃는 노움과 님프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얼마나 솔직하지 못했는지 깨닫는 느낌이었다.

‘닉스까지 저렇게 오해할 정도였다니.’

정령은 솔직했다. 거짓이 없었고, 자신이 가진 감정을 모두 드러내는 아이들이었다. 님프는 비록 초콜릿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자잘한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말이다. 순간 엘로니아의 어깨에 온기가 실렸다. 정신을 차리니 카르벨이 그녀의 어깨 위에 코트를 걸쳐주고 있었다.

“추우니까. 가볍게 걸치는 게 좋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하는 그를 보던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해요.”

순간, 그가 굳은 듯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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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로니아는 그저 날아다니는 닉스를 응시하며 뒷말을 이었다.

“이렇게 한적한 곳에 놀러 오는 거요. 나중에 다 끝나면 닉스랑 놀러 오고 싶네요.”

“……그래.”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카르벨의 한참 늦은 답이 들려왔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손을 잡은 카르벨의 손이 뻣뻣하게 굳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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