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다시 오겠습니다2021.11.28.
막상 폭신한 침대의 촉감이 느껴지니 몸이 편안했다. 엘로니아는 슈미즈 가슴 언저리에 달린 레이스를 괜히 못살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오벨리아가 구매한 목록 중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었다. 평소 잠결에 그를 본 적은 퍽 많았어도 적당히 옷을 챙겨 입었던 터라 이 상황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가 꿋꿋하게 카르벨을 등지고 앉아 있자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엘로니아의 손목을 붙잡으며 물었다.
“왜 그러고 있지.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
“그냥 별말씀 안 하셨어요.”
“보나마나 내 욕을 하셨겠지.”
순간 뜨끔한 엘로니아는 모른 척 딴청을 피웠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만큼, 오델리아는 카르벨에 대해 거침없이 편안하게 설명하고는 했다. 그녀가 침묵을 고수하자, 알 만하다는 듯 그가 피식 입술을 가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대가 말했다고 해서 화낼 것도 아닌데.”
“좋으신 분이에요. 정말이에요.”
정말 친절했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괴리감이 크게 느껴졌다. 한 번 맛본 가족이라는 충만함에 엘로니아는 스스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인지 분명 평소와 똑같이 말했을 뿐인데 그가 되물었다.
“근데 그대 표정이 왜 그래.”
“왜요? 저 뭐 이상해요?”
엘로니아는 붙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멋쩍게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문질렀다. 카르벨이 그녀의 옆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안 보잖아.”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저기 닉스 있어서 본 거예요!”
엘로니아는 보란 듯 텅 빈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차피 그는 볼 수 없으니 들킬 염려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르벨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대는 거짓말을 참 못하는 거 아나.”
“……진짜라니까요.”
“고집스럽고.”
카르벨의 짙은 회색빛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듯 응시했다. 매서운 눈매 안에 서린 그의 또렷함이 단호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다 들킨 것. 카르벨에게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엘로니아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오벨리아 왕비님이 카르벨을 정말 가족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조금 부러웠어요.”
사실 어떤 이유로 라티에 왕국에 방문했는지 아는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엘로니아가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려고 했으나, 곧 카르벨이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부러울 것 없어.”
“아, 알아요. 그냥 저 혼자 생각하고 말 거였는데…….”
“그대는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처음으로 들은 질문에 엘로니아는 눈을 껌뻑였다. 가족이 뭐라고 생각하냐니. 물론 사전적 의미로 답을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묻는 것이 단순히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같은 성을 쓰고 핏줄이 이어진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안다. 엘로니아가 머뭇거리자 카르벨이 이어 말했다.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던가.”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엘로니아의 얼굴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벼이 정리해주었다. 그의 손이 스칠 때마다 목덜미가 가볍게 쓸렸다. 다정히 건네는 말이 사실이라서 엘로니아는 괜히 심술궂게 다른 말을 덧붙였다.
“……험담하고 싸우더라도 다음날 웃고 넘길 수 있는 것도요.”
오벨리아 왕비의 그런 점이 부러웠다. 대놓고 카르벨에게 인상이 나쁘다고 해도, 서로의 감정에 금이 가지 않는 관계. 몇 년을 떨어졌다가 만나도 변하지 않는. 그래서 부러웠나 보다. 엘로니아의 뾰로통한 답에 카르벨이 달래듯 가볍게 입을 맞췄다.
“내가 될 수 있게 해줘.”
“…….”
엘로니아가 답이 없자, 그가 조르듯 고개를 꺾어 다시금 입술을 머금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깊게 그녀의 숨을 삼킨 그가 잠긴 듯한 음성으로 답했다.
“서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
“그렇……지 않아요.”
잘게 입술을 건드리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카르벨이 엄지로 조심스럽게 엘로니아의 턱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시선을 피해도 고스란히 그가 느껴졌다. 우습게도 엘로니아는 이상한 데서 서러워졌다. 오델리아 왕비가 그녀와 함께하자고 할 때 막아선 카르벨. 그는 그녀를 생각해서 한 행동이었겠지만, 엘로니아와 선을 두는 듯해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거기다 오벨리아 왕비가 너무 좋은 사람이라서. 제가 생각해도 너무 제멋대로인 마음이라 부끄러웠다. 엘로니아는 그런 그녀의 변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제가 카르벨을 욕해도요?”
“그래도 내 곁을 떠나지 않잖아.”
“……막 떼를 쓸지도 몰라요. 카르벨이 일하던 중에 그럴 수도 있고요.”
짜증나게도 자신이 유치해서 그렇다. 그가 해줘도 싫고, 안 해줘도 싫을 때가 있다. 간사한 그녀의 진실에도 카르벨은 다정한 답을 내뱉었다.
“이미 모든 우선순위는 그대였어.”
“저도 제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걸요.”
엘로니아는 가만히 그와 두 눈을 맞췄다. 입술만 달싹여도 닿을 거리. 점점 뜨거워지는 서로의 체온 속에서 카르벨이 고개를 숙였다.
“평생 그대에게 충성할게. 검이 없다면, 그대가 날 휘둘러도 돼.”
검을 지닌 자의 충성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에게 바라지 않는, 그 혼자만의 다짐이나 마찬가지였다. 충성이란 그렇다. 그의 입술이 내려앉고, 엘로니아는 천천히 그의 어깨를 감쌌다. 깊게 들이마신 숨에 불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그녀를 카르벨이 다정히 감쌌다. 푹신한 촉감이 등에 닿고 그의 얼굴이 보였다. 엘로니아는 조용히 되물었다.
“내가 정말 카르벨을 휘둘러도 돼요?”
엘로니아의 부푼 입술과 달뜬 호흡에 카르벨은 슬며시 입매를 늘렸다.
“물론. 이미 난 휘둘리고 있거든.”
슈미즈 앞에 매어놓은 리본을 풀며 그가 뺨에 입술을 문질렀다. 뺨에서 입술로. 입술에서 코로. 코에서 눈꺼풀로. 군데군데 입맞춤을 남기던 그의 행동에 눈꺼풀이 흔들리자, 곧 낮게 깔린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귀여워, 엘로니아.”
“그런 말 하지 마요…….”
그의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돌리자 그대로 목덜미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자잘한 입맞춤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가볍게 시작했던 입맞춤이 짙어지고, 조금씩 버거움이 커져갔다. 그녀를 기다리느라 번들거리는 눈에 가득 찬 욕망을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눅진하게 눌어붙은 공기에 녹아내리듯 그와 섞여들었다. 움찔거리는 카르벨의 잘 짜인 근육도, 정처 없이 초점이 잘 맞지 않는 시야도. 오벨리아 왕비를 만나면서 느꼈던 기묘한 감정들이, 그의 모습 하나로 지워지는 기분이었다. ***
“식사는 입에 맞니?”
“아, 네. 맛있네요.”
오벨리아 왕비의 질문에 냅킨으로 입가를 닦던 엘로니아는 빠르게 답했다. 에스피디 제국과 달리 라티에 왕국은 달콤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시큼한 음식이 주를 이루는 듯했다. 사실상 에스피디 제국 내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엘로니아에게는 모든 것들이 다 새로웠다. 오후 늦은 시간부터 오벨리아 왕비와 함께했다. 식사 초대에 카르벨도 참석하겠다고 하였지만, 단호한 거절 탓에 그만 덩그러니 남겨둔 참이었다. 나가기 직전, 가볍게 입을 맞춰 주며 그녀를 마지못해 보내던 카르벨이 떠올랐다. 엘로니아가 괜히 제 입술을 만지작거릴 때쯤. 오벨리아 왕비가 쾌활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그리 미소를 짓는 거니.”
“아, 죄송해요.”
“사과할 거 없단다. 내 동생도 가끔 그런 표정을 지었거든.”
그녀의 시선이 테라스 너머의 라티에 왕국 전경으로 향했다. 시선은 바깥을 향했으나, 정작 오벨리아 왕비가 보는 것은 풍경이 아닌 듯했다. 잠시 가만히 바깥을 보던 그녀가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라티에 왕국은 어때, 마음에 드니?”
“아, 네. 따뜻하고 재밌어요. 정령들도 좋아하더라고요.”
“호호, 그럼 정령분들께 오신 김에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전해주련?”
노, 농담인가? 엘로니아는 어떻게 답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 듯, 오벨리아 왕비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가 바다를 끼고 있어서 경치가 좋단다. 엘로니아 양은 아직 안 가봤지?”
“네. 갈 시간이 없어서요.”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어 조금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자 오벨리아 왕비가 그녀를 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나와 동생에게 주신 별장에서 보면 바로 바다가 보이거든.”
“와, 예쁘겠네요.”
“그럼. 대신 밤에는 공기가 차서 좀 추워. 바람에 염분이 들어 있어서 별장 이상으로 쓰기는 좀 그렇더라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에 엘로니아는 잔뜩 긴장했다. 오벨리아 왕비는 시녀 하나를 손짓으로 부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엘로니아 양이 가본 적 없다니까, 한 번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지.”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시녀가 열쇠 하나를 가지고 왔다.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있지만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형식의 열쇠는 꽤 오래된 세월이 엿보였다. 오벨리아는 열쇠 꾸러미를 엘로니아에게 내밀며 말했다.
“내 동생의 별장 열쇠야. 스페어로 가져다 둔 것을 보관하고 있었지.”
드디어! 엘로니아는 깍듯하게 곧장 감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금방 둘러보고 돌려드릴게요. 추억을 망가트리거나 하지 않을게요. 제가 카르벨에게도 단단히 일러둘게요!”
혹여 그녀가 우려할 만한 점을 먼저 줄줄줄 읊어냈다. 그러자 오벨리아 왕비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위치는 리프리에게 일러두마. 라티에의 지리는 익숙지 않을 테니까.”
“알려만 주시면 저랑 카르벨만 가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유능한 마법사를 놀려서 뭐에 쓰겠니. 그 녀석이 못되게 군 기간도 있으니, 마음껏 부려 먹으렴.”
“그, 그래도 저하이신데…….”
“내가 허락했다는데 뭐가 문제겠어.”
더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듯해 엘로니아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엘로니아를 보며 오벨리아는 그리운 듯 되물었다.
“가끔 라티에 왕국도 들려주렴. 이렇게 즐거운 대화를 나눈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지. 라티에를 둘러보려면 한 일주일은 지내야 하지 않겠어?”
“너무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해서요.”
“나중에 내가 에스피디 제국으로 가도 될 일이고. 카르벨이 어릴 적에는 자주 갔었는데. 그곳도 많이 변했겠구나.”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과 사이가 좋았다고 들어서 그런 걸까. 그녀는 늘 함께하던 말동무를 잃은 공허함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 시간이 지나 마음속에 묻었을 뿐. 이 모든 상황을 사실상 아셀리 황녀가 만든 것과 진배없었다. 따뜻한 어른의 정을 처음 느껴서인지 몰라도, 엘로니아는 라티에 왕국이 좋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녀의 말대로 조금 여유를 가지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었다. 그래서 엘로니아는 확실하게 답을 건넬 수 있었다.
“네, 전하.”
이렇게 떠밀리듯, 일을 처리하러 오는 게 아닌. 진심으로 그녀를 보러 오고 싶었다. 엘로니아는 손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열쇠 꾸러미를 꽉 움켜쥐며 웃었다.
“꼭 다음에는 전하를 뵈러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