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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라티에 왕국 (102/234)

102. 라티에 왕국2021.11.21.

카르벨의 권유에 엘로니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야 이번 일에 당사자이기도 하며, 리프리와 가족이 아니던가. 하지만 엘로니아는 생판 처음 보는 남이었다.

‘여기서 빠져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로엘 황태자와 카르벨의 관계라면 몰라도, 자신이 어디까지 발을 담가도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잠시 대답을 미루며 머뭇거리는 사이, 리프리도 흔쾌히 말을 이었다.

“정령사님도 함께 가시죠. 라티에 왕국은 따뜻하고 경치도 좋아서 정령들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

[와, 오랜만이다!]

라티에 왕국에 도착할 때쯤부터 닉스는 신이 나 있었다. 님프와 노움도 쪼르륵 창문에 매달려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님프가 무어라 손짓과 발짓을 하자, 노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이따가 따러 가자.]

곧 노움은 뒤를 돌아 엘로니아를 보며 물었다.

[님프가 레드란 꽃으로 꽃차를 해서 먹자는데, 먹어도 돼?]

“레드란 꽃?”

[여기서만 자라는 꽃인데, 단맛이 강해서 우유에 넣어서 우려먹으면 맛있대!]

세 정령의 기대감 가득한 눈이 엘로니아를 향했다. 그녀는 조용히 마주 앉은 카르벨을 힐끔거리며 그들을 달랬다.

“여기는 왕궁 정원이라서 마음대로 꺾으면 안 될 것 같은데. 이따가 리프리 저하께 여쭤볼게.”

[한 무더기 정도는 티가 안 나지 않을까?]

닉스는 제법 진지하게 되묻고 있었다. 혹여 그들이 정말 남의 꽃을 꺾을까 우려된 엘로니아는 단단히 일러두었다.

“아니야, 내가 꼭, 반드시 허락을 받아 올 테니까 절대 먼저 꺾으면 안 돼. 알았지?”

[흐음…….]

대답 대신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는 그들을 엘로니아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힐끔거렸다. 그런 그녀에게 카르벨이 나직하게 말했다.

“오는 내내 정령들을 살피는군.”

“세 명이나 되는데 타국까지 온 거라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엘로니아는 조금 멋쩍게 답했다. 손님의 입장으로 온 터라 되도록 무탈하게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는 내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정령들을 조용히 살폈다. 생각해 보니, 카르벨을 앞에 두고 너무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뒤늦게 깨달은 엘로니아가 사과라도 건네려던 찰나. 톡, 카르벨이 손등으로 마차의 창문을 가리켰다. 자연스럽게 창문을 향해 시선을 옮긴 엘로니아는 곧 감탄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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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투명하리만큼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정원. 그 주변으로 화사하게 형형색색으로 피어난 꽃과 거대한 분수는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제야 엘로니아의 귀에는 미세하게 지저귀는 새의 소리가 들렸다. 헤일튼 공작저를 비롯해 에스피디 제국까지 수많은 정원을 보았으나, 이 정도로 화사한 곳은 처음이었다.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이 환했다.

“예쁘다…….”

카르벨은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뱉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이 보여줘 놓고, 정작 그는 라티에 왕국의 정원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엘로니아는 따스함이 느껴지는 바깥을 보며 말했다.

“리프리 저하와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께서 어떻게 그리 구김살이 없으시나 했더니……. 왕국은 전부 이런 분위기인가요?”

“아마도.”

“가끔 이런 것도 좋네요.”

오랜만에 편하게 미소가 지어졌다. 평온한 분위기가 좋아, 나중에 그녀가 지낼 곳도 이렇게 꾸밀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꼼꼼하게 눈에 담기를 얼마간. 본궁에 다다르자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그는 먼저 마차에서 내려 기다리고 있던 리프리를 보며 말했다.

“저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안내에 리프리는 눈짓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본궁은 정원과 비슷하리만큼 하얀 석고상과 화려한 그림들로 가득했다. 엘로니아는 두리번거리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른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리프리 저하도 카르벨을 의심했는데, 라티에 전하는 다를까?’

방문을 알렸을 때 리프리가 자세한 내용까지 전한 것 같지 않았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다다른 접객실 앞은 슬며시 긴장감이 도는 듯도 했다. 하지만 리프리는 태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어머니, 아버지. 리프리입니다.”

문이 열리고, 리프리를 똑 닮은 백금발에 해사한 인상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글썽이는 눈동자와 반가운 듯 상기된 얼굴은 엘로니아가 괜한 우려를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카르벨! 이게 얼마 만이니.”

“라티에 왕국의 전하를 뵙습니다.”

카르벨의 깍듯한 인사에 엘로니아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차린 격식과 맞지 않게 라티에 왕비는 자리에서 곧장 일어날 뿐이었다.

“굳이 격식을 차릴 필요가 있니. 카르벨은 못 본 사이에 인상이 더욱 기분 나빠졌구나!”

으응……? 엘로니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당황함에 고개를 들었으나, 라티에 왕비는 반가운 이에게 말을 건네는 듯 온화하기만 했다. 무서운 점은 카르벨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람들이 기분 나쁜 인상을 퍽 좋아해서요. 어쩌겠습니까, 대중들이 그런데 그 탓을 해야지요.”

“사람들이 하여간 보는 눈이 없어요. 내 동생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엘로니아는 빠르게 눈을 굴리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다들 일상인 양 신경쓰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리프리조차도 태연하게 자리에 앉아 그들을 투명한 눈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워, 원래 이런 성격이신가 봐!’

받아칠 수 있을까. 엘로니아는 그녀의 익살스러운 말투에 오히려 더욱 긴장이 되었다. 카르벨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그녀는 곧 엘로니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정령사님이라 들었어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 착하고 고우실까.”

“……아, 안녕하세요. 엘로니아 데브니입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내 진심으로 존경해서 그래요. 카르벨 이 녀석이 여간 까칠해야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가리켰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어요. 앉아서 잠시 차라도 해요.”

얼떨결에 자리에 앉자, 시녀들이 잔을 가져왔다. 꽃이 동동 떠다니며 달짝지근한 향이 감미롭게 접객실을 채웠다.

‘이게 닉스가 말한 레드란 꽃차인가?’

언뜻 마차에서 정령들이 가리킨 것과 비슷해 보였다.

‘닉스가 알면 뒤집어지겠는데…….’

그를 떠올리며 잠시 고민하는 그녀를 오해한 것인지, 라티에 왕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라티에 왕국에서 제일 자신 있는 차라네. 자연과 함께하시는 분께도 선보일 수 있을 만큼이지.”

“향이 되게 좋아요. 이렇게 귀한 차를 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카르벨을 붙잡은 사람에게, 이 정도가 아깝겠나.”

마셔도 되는 건가. 마지막 말에 그녀는 잠시 움찔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 리프리나 라티에 왕비는 너무도 태연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괜한 생각인가 싶어 그녀가 입에 머금는 순간. 라티에 왕비가 호호,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정령사님께 꼭 필요한 차예요. 체력 증진에 탁월한 효과가 있죠.”

“신기하네요, 차에 그런 효과가 있다니.”

“그래서 보통 신혼부부에게 많이들 권한답니다.”

“쿨럭.”

엘로니아는 마시다 말고 코로 차가 나올 뻔한 것을 가까스로 삼켰다. 순간 매운 향이 가득해진 코를 엘로니아가 움켜쥐자 카르벨은 손수건을 내밀며 조용히 라티에 왕비를 타박했다.

“아직 약혼만 한 사이입니다. 장난이 지나치시네요.”

“내가 못할 말 했니?”

“그간 라티에 왕국에 방문을 안 한 것은 제 책임입니다. 그러니 괜한 사람 놀리지 마시죠.”

“얘는. 좋아서 그러지, 좋아서. 내 맨날 시커먼 아들과 조카만 보는 게 다였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겠니?”

조카라는 말에 동시에 모두의 입이 다물렸다. 조금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 있던 리프리조차도 순간 시선이 굳을 정도였다. 엘로니아는 순간 카르벨이 왜 그간 라티에 왕국으로 방문하지 않았는지를 알 수밖에 없었다. 라티에 왕과 왕비는 진심으로 그를 아끼고 있었다. 혈통이 확실하지 않은 데다, 스스로도 의심을 하던 차였다면 카르벨은 거리를 두는 게 낫다고 판단할 사람이었다. 입궁한 뒤로 줄곧 그가 늘 비즈니스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짓던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 있는 것 또한 그런 이유인 듯했다. 차분해진 분위기에 라티에 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었다.

“무슨 일이 있기에 방문한 것이로구나.”

리프리가 먼저 입을 열려고 하였으나, 카르벨은 간단하게 그를 저지했다.

“내가 설명하지.”

곧 그의 입에선 무엇보다 간결한 말이 튀어나왔다.

“죄송하지만, 제가 전하의 조카가 아닙니다.”

이, 이걸 이렇게 설명한다고? 당황한 것은 비단 그녀뿐이 아니었다. 허공에서 리프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참지 못한 엘로니아와 리프리가 다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저,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말씀드리자면 복잡한데 이게 출생의 비밀, 뭐 그런……!”

“어머니, 아버지.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헤일튼 공작께서 진짜 황태자 전하의 안전을 걱정하여 로엘 전하를 입양한 뒤, 바꿔치기하신 듯합니다.”

순식간에 우다다 쏟아져 나온 말에 라티에 왕비는 눈만 깜빡였다. 너무 충격적이라 말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만약 속였다고 라티에 왕궁에서 쫓겨나면, 영영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의 별장은 알 수 없게 된다. 리프리에게만 기댈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좀 해 봐요.”

엘로니아가 카르벨을 팔을 붙잡고 흔들었으나, 그는 태연하게 답했다.

“괜찮아.”

도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답답함에 무슨 변명이라도 더 하려던 찰나. 라티에 왕비의 입이 열렸다.

“그러니까, 원래 황태자인 카르벨을 헤일튼 공작가로 입양시켰다는 말이니?”

“정확하게는 로엘 황태자 전하가 입양되신 거지만, 서류상 제가 입양아로 되어 있기는 하겠네요.”

평온한 카르벨의 답에 라티에 왕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 조카가 맞네!”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라티에 왕에게 조잘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요. 어찌 되었건 입양아도 호적상 조카이니 내 조카가 아니겠어요?”

“비의 말이 맞네. 무슨 대단한 소리를 한다고 그리 무게를 잡나 했더니.”

라티에 왕비는 시답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실망한 표정으로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잔뜩 심각한 목소리로 카르벨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 말 하려고 온 거니?”

“아뇨.”

“그래. 내가 봐도 결혼 준비하려고 온 줄 알았지. 신혼여행지는 정했고?”

“그것도 아닙니다.”

“재미없기는. 계획이 없는 남자는 인기 없단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답에도 카르벨은 꿋꿋하게 미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그가 사교계에서 언제나 웃을 수 있도록 단련된 것은 어릴 적부터 자주 교류하던 라티에 왕과 왕비의 덕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카르벨은 그녀의 농담을 아주 간단히 넘기며 본론을 꺼냈다.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께 라티에 왕국 소유로 되어있는 별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릴 적에 아버지가 선물로 각자 하나씩 준 별장이었지.”

“그 별장을 잠시 조사하고 싶습니다만.”

카르벨의 단도직입적인 요청에 라티에 왕비는 싱긋 카르벨을 따라 웃으며 단호히 말했다.

“싫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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