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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보라색 (101/234)

101. 보라색2021.11.18.

방계 친족들은 엘로니아에게 몇 번이고 사과를 반복하며, 나중에 원로회가 열릴 때 꼭 연락을 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끝내 거의 카르벨이 부른 기사들에 의해 강제 반, 자의 반으로 끌려 나가다시피 헤일튼가를 떠났다. 한바탕 소동이 가라앉자 엘로니아는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와, 정말…….”

차마 대놓고 가문을 삼키러 온 이들을 대단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카르벨의 방계 친족들에게 무어라 말을 할 수도 없으니 엘로니아는 뒷말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시끄러운 이들이 사라지자, 무섭도록 적막이 찾아왔다. 워낙 혼란스러웠던 탓인지 그 대비가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도르르륵 눈동자만 움직여 카르벨과 리프리의 사이를 종횡무진 옮겨 다녔다.

‘부, 분위기 무서워!’

차라리 카르벨이 화라도 내주었으면 했다. 아니면 비아냥이라도 한다면 고마울 것 같았다. 하지만 카르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마치 리프리가 없다는 투로 엘로니아를 향해 말을 걸 뿐이었다.

“못 볼 꼴을 보였군. 이런 사람들이라서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에요. 어차피 마, 만나야 했을 분들이고…….”

“모진 소리를 할 때 그냥 베어낼 걸 그랬나. 내가 대신 사과하지.”

언뜻 들으면 살벌한 말이었으나 친절한 말투 탓에 일상적인 대화처럼 들려오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소리 없이 고개만 빠른 속도로 저어가며 답을 대신했다.

“사과하지 마요. 저는 어르신 분들에게 사과를 받았잖아요. 카르벨이 무슨 잘못이에요.”

“……그대는…….”

카르벨은 묵묵하게 그녀를 지켜보며 입을 열었으나 끝마치지는 못했다. 다음 말을 기다리듯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직시하는 눈동자만 보일 뿐이었다. 카르벨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상냥해서 괴로워.’

방계 친족들이 언질도 없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 카르벨은 심장이 낮게 뛰는 기분이었다. 전장에 나갔을 적에도, 반란군 수장의 목을 베서 돌아왔을 적에도. 큰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을 때도 덤덤하던 그였다. 방계 친족들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고, 엘로니아를 못마땅하게 여길 게 분명했다.

‘나 하나면 트집이라도 잡을 수 있지만, 정령사는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은근하게 추켜세워주는 척 엘로니아에게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지 않던가. 질려서 도망쳐도 카르벨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싫었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야 하는 거냐, 카르벨 헤일튼.’

엘로니아는 용서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그녀처럼 너그럽지 못했다. 카르벨이야 그들의 행태가 익숙하다지만 그녀는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재고 따져도 방계 친족들의 행동거지가 용서되지 않았다. 죽여야 마땅했다. 순간, 엘로니아의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카르벨. 나는 피는 보기 싫어요.”

“……알아.”

“원래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유병장수래요.”

“……뭐?”

“한 번에 깔끔하게 죽는 것보다 아픈 채 가늘고 길게 사는 게 더 괴롭다고요.”

엘로니아는 제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했다. 카르벨의 분위기가 영 가라앉아 있었다. 분명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엘로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고개까지 끄덕이며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일순간 단단하게 굳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서히 옅어졌다. 그런 그에게 엘로니아는 짐짓 비밀스러운 말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어차피 다 쓸데없는 소리였어요. 카르벨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잖아요.”

혹시나 상처를 받을까 봐 엘로니아는 힐끗, 멀찍이 뒤에 앉아 있던 리프리를 곁눈질했다. 카르벨은 엄지로 그녀의 눈가를 가벼이 쓸며 다정히 말했다.

“친족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저 벌써 다 까먹었어요.”

“누가 같은 소리를 하면 내게 말하고.”

“에이, 누가 감히 제게!”

일부러 가소롭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그제야 호선이 그어진 그의 입매가 진정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리프리는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약병을 쥔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아드라 남작 부인이 숨기고 있던 약병…….’

투명한 녹색 액체가 그대로 그의 손 안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여전히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괴롭다는 듯 그가 팍, 고개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리프리에게서 괴로운 음성이 새어 나왔다.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의 끝은 낯설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형님의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편협했습니다.”

우는 걸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후회가 가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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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벨은 그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앉아 리프리의 사과를 듣고만 있었다.

“믿었어야 했는데, 형님을 따랐던 만큼 배신감도 커서 제가 분별력을 잃었었나 봅니다.”

엘로니아는 덤덤히 흘러나오는 그의 속죄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리프리가 마지막에 아셀리를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 하나. 그 역시 카르벨에게 아직 애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고민에 잠긴 듯 카르벨의 손가락이 느리게 툭툭 소파 팔걸이를 두드렸다. 용서는 본인이 해야 하는 일. 워낙 원칙이 확고하고, 자신을 배반한 이들에게 가차 없던 카르벨인지라 결과가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조금은 관계를 회복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가 조금은 열린 마음으로 봐주었으면.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카르벨의 입이 열렸다.

“됐다, 리프리.”

편안하게 부르는 답에 리프리가 빠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미세하게 눈가가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카르벨은 오만하게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옳았으니 내가 용서하고 말고 할 이유가 있던가.”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리프리는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듯 눈을 끔뻑였다. 카르벨은 목을 가볍게 돌려 스트레칭하며 말을 이었다.

“헤일튼가의 적통은 맞으나, 그대의 추측도 틀리지는 않았다는 뜻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시약병을 줘 봐.”

카르벨이 손을 내밀자, 리프리가 테이블 위에 병을 밀 듯이 보냈다. 간단하게 병을 손에 넣은 그는 코르크 마개를 따 다시 한번 손가락을 베어내어 피를 흘려 넣었다. 그러고는 태연스럽게 리프리를 향해 건넸다.

“네 피를 넣어 보면 알게 될 거다.”

얼떨떨하게 시약병을 받은 리프리는 장갑을 벗어내며 천천히 자신의 손을 단도로 그어냈다. 그의 피가 시약 속에서 섞이자, 이전과 달리 보랏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리프리는 혼란스러운 듯 약병을 노려보았다. 엘로니아는 아무래도 좋았다. 카르벨이 한 발짝,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저도 모르게 얼굴에 기쁜 기색이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카르벨이 그녀를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으니 말이다. 엘로니아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여기부터는 제가 설명해 드려도 될까요?”

카르벨과 리프리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는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그보다 그녀가 설명하는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카르벨이 먼저 용서하기로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금 편하게 웃으며 다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참은 모양이군, 엘로니아.”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직접 본 것이니까 설명해 드리기 편할 것 같아서요!”

“그대라면 기뻐할 줄 알았어.”

카르벨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엘로니아는 리프리에게 그동안 보아온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셀리의 본성, 죽은 로엘 황태자. 그리고 황후와 카르벨,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와의 이야기들. 처음에는 놀란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던 리프리의 얼굴은 점점 험상궂게 변해갔다.

“아셀리 전하께서 대체 몇 명의 삶을, 하……!”

기가 막혔는지 말도 채 끝내지 못한 그가 자신의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크게 숨을 들이쉰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래요.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죠. 카르벨의 마음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그게 그런 뜻이었을 줄이야. 리프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후우, 큰 소리로 호흡을 가다듬는 그를 보며 카르벨은 꼭 남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능글맞게 답했다.

“그래. 그런 뱀 같은 여자를 앞에 두고 모르는 네 아둔함에 혀를 내둘렀다.”

“정말, 정말 이 정도로 하는 이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세상이 다 너처럼 정직한 사람만 사는 건 아니거든.”

카르벨의 말에 리프리는 분노를 삭이는 듯 커다란 상체를 들썩였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가 무언가 생각난 듯 다급히 되물었다.

“그럼 지금 렌디먼 폐하께서는 괜찮으신 겁니까?”

“엘로니아가 정령에게 부탁해서 임시방편은 해 놓았어. 지금 당장 실각시키려면 원로회부터 소집해야 하지.”

“그냥은 힘들 텐데요.”

현재 황위를 물려받을 이는 아셀리 한 사람뿐이었다. 평소 인품 좋기로 정평 나 있고 성실하고 맡은 일까지 척척 잘 처리해낸 덕에 그녀를 밀어주는 이들도 없지 않았다. 특히나 렌디먼 황제의 건강에 비상이 걸린 지금. 보수적인 구귀족 중에서도 일부는 그녀의 편으로 섰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원로회를 열기 위해서는 에스피디 제국 내의 각 가문들의 70%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그들의 동의를 얻는 일이 과연 쉬울까.

“동의를 받는다고 해도, 원로회가 모였을 때 설득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요. 만약 소집은 해도 결정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엘로니아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히려 헤일튼가의 입지가 불안해질 수도 있었다. 아셀리가 황위에 오른다면, 엘로니아를 비롯해 진실을 알고 있는 이들을 그냥 둘 리 없기 때문이었다. 카르벨은 고심하는 듯 턱을 문지르다 조용히 물었다.

“로엘 전하의 친부모는. 아는 정보가 전혀 없나.”

“분명 과거에서 본 바로는 별장에 계신다고 했어요. 카르벨은 아는 게 없나요?”

“왕실의 재산은 헤일튼가에서 관리할 수 없어.”

왕실의 재산. 그 말인즉슨.

“어머님은 황후 폐하께서 왕국까지 와서 별장에서 몸조리한 것으로 알고 계셨습니다.”

“알고 계시겠지.”

“물론이죠.”

리프리의 확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자리에서 당차게 일어난 리프리는 잠시 멈칫하며 말을 덧붙였다.

“다만, 그곳에서 지내고 계실지는 알 수 없습니다. 헤일튼 공작저에서도 지원을 하지는 않으셨을 거 아닙니까.”

“그래. 자금이 새어 나가고 있는 걸 알았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지.”

“일단, 그 별장부터 찾아보겠습니다. 어머님이 아직도 이모님을 잊지 못해 왕궁에 있는 어린 시절 쓰던 방조차도 그대로 보존하고 계시거든요.”

진실을 알고 난 뒤라서인지 몰라도 리프리는 적극적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무언가 발견하게 되면 서신 드리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출발할 것처럼 채비를 하는 그를 보며 카르벨이 슬쩍 엘로니아를 불렀다.

“엘로니아. 그대도 나랑 같이 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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