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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친자 검사 (99/234)

99. 친자 검사2021.11.11.

문이 열리자, 날이 선 시선들이 엘로니아에게 박혔다. 정면으로 보이는 카르벨의 얼굴에 방금까지 걸려 있던 비아냥과 적당히 약이 오르는 듯한 여유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놀란 듯 그대로 굳은 그를 향해 엘로니아는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늦어서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나요?”

“……아니.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와도 된다지 않았나.”

“그래도 약혼 전에 인사도 못 드렸는데, 기회가 있을 때 일찍 뵈어야죠.”

눈치 빠르게 말을 맞춘 그가 능숙하게 답변을 이었다.

“그러게. 헤일튼가의 이름이 아직 무너지지는 않은 모양이군. 뒤늦게나마 이리 찾아오는 걸 보니.”

그의 말에 앉아 있던 방계 친족들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과거, 카르벨이 막 가주로 앉았을 적을 꼬집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는 그가 마치 헤일튼가를 무너트리고, 명예를 더럽힐 거라며 손가락질하던 이들이었다. 하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말처럼 이뤄진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에스피디 제국에서 헤일튼 공작저는 기사들의 우상이자, 명예와 세를 지닌 가문이었다.

‘하긴. 여태 도와준 것 하나 없는데 인사를 하는 것도 웃기기는 하지.’

자세히 들리진 않았지만 복도까지 큰 소리가 흘러나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어지간히도 그가 속을 긁어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방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미리 서신이라도 띄워 주셨다면 일찍이 마중을 나갔을 텐데요.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아쉽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주 앉아있던 방계 친족들의 목소리가 간드러지게 올라갔다. 마치 꼬투리 잡을 건수가 생겼다는 듯이 말이다.

“서신을 미리 드릴 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모자란 이가 제 분에 넘치는 것을 얻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한 가문의 중대사를 이리 넘기지만 않았어도…….”

“저희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누셨다면 앞으로 피곤해지실 일도 없으셨을 텐데 말이에요.”

“정령사님, 안쓰럽기도 하여라…….”

갑작스럽게 받은 위로에 엘로니아는 당황스러웠다.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있자, 동의한다고 생각했는지 방계 친족들은 서로 고개까지 주억거리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리 친근한 관계였다고. 그들은 마치 그녀를 위로하듯이 저들끼리 결론을 내어 말했다. 마치 헤일튼가의 주권이라도 잡고 있는 듯이 굴고 있었다. 불쾌함이 앞섰으나, 엘로니아는 곁눈질로 제일 먼저 카르벨을 살폈다. 정작 그는 방계 친족들의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무슨 생각에 잠긴 것인지, 그녀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속으로 품은 의문을 애써 누른 채 그녀는 상냥하게 답했다.

“미처 인사드리지 못한 점은 아쉬우나, 저는 헤일튼가에서 충분히 즐겁게 지내고 있어요. 감사하지만 염려는 내려 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적당히 하고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째서인지 과장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이러니 저희가 걱정을 안 할 수 있습니까. 대체 어디까지 속인 것인지, 원.”

아드라 남작 부인이 들으라는 듯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 자리에 있는 방계 친족들이 거의 그러했으나, 그녀는 유독 카르벨에게 적의가 대단한 듯했다. 그녀가 툭, 옆에 앉은 이를 치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정령사님을 무슨 감언이설로 속였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황궁에서 대단한 것을 보냈더군요.”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황궁이라는 말에 엘로니아의 시선이 미세하게 차가워졌다. 아주 작은 차이인지라 처음 그녀를 본 방계 친족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며 말했다.

“정령사님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모두 쉬쉬하면서도 헤일튼 공작가를 보고 하는 소리를요.”

“……네, 그런데요?”

“그 소문에 대한 진상을 밝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녹색 액체가 작은 병 안에서 찰랑였다. 처음 보는 약이었다. 엘로니아가 가만히 테이블 위에 놓인 병을 보고 있자, 아드라 남작 부인은 기고만장해져서 다른 친족의 말을 가로챘다.

“친자 검사가 가능한 약이더랍니다.”

“……확실한 건가요.”

“물론이죠. 이미 저희끼리 해보았습니다. 아주 확실하더군요.”

난 또 뭐라고. 엘로니아는 조금 김이 빠졌지만 애써 친절히 경청하는 척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카르벨이 전대 헤일튼 공작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황후의 태생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인 조건은 충족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드라 남작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손수건까지 꺼내 자신의 눈가를 찍었다.

“정령사님께서 많이 궁한 가문에서 자라셨다 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긴요. 그 탓에 이런 일까지 휘말리시고. 다 이해합니다.”

눈물은커녕, 걱정조차 하지 않아 보였으나 그녀는 꿋꿋하게 엘로니아에게 말했다.

“지금 파혼하시면 저희가 다 덮고 가겠습니다.”

“뭘 덮으신다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엘로니아는 조금 딱딱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아드라 남작 부인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지금 여기서 그만두시면, 친자 확인 전에 정령사님이 알아서 물러나신 것처럼 좋게 끝을 낼 수 있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유롭게 앉아 있던 카르벨의 손끝이 작게 톡톡, 소파 팔걸이를 건드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지만 불안한 듯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그의 심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카르벨이라면 분명 친족들이 파혼을 부추길 것을 알고 있었을 터. 엘로니아가 시선을 올리자, 그의 매서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얼굴이 그녀를 올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엘로니아가 답을 하지 않자, 오해를 한 아드라 남작 부인이 다시금 말했다.

“원래 다 그렇죠. 돈 앞에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보아하니 데브니 남작도 썩 좋은 인품은 아니었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셨겠어요.”

사실인데 기분이 나빴다. 데브니 남작은 제 아버지라도 도저히 감싸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고, 돈은 아니지만 제 이득을 위해 카르벨과 손을 잡은 것도 맞았다. 모두 맞는 말인데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애써 입매를 늘리며 답했다.

“돈 때문이 아닙니다. 가문에서 나오고 싶어 카르벨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요.”

“하하, 저는 누구보다 솔직한 자연과 친숙한 분이라 하셔서 거짓말은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이거 신기하군요.”

“…….”

정령까지 들먹이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정령들에게 괜히 죄를 지은 것 같고,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잘한 것 하나 없는 시작이었다는 점에서 면죄부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조용히 보이지 않게 테이블 아래로 자신의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말을 해야 한다.

‘아니라고 잡아떼기라도 해야 해.’

거짓을 다시 거짓으로 덮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스릉. 날이 선 검이 친족들 앞에 길게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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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만하게 앉아 있던 그들의 자세도 어느새 칼날을 피해 잔뜩 뒤로 물러선 뒤였다. 그런 이들 틈으로 카르벨의 낮은 음성이 잔뜩 분노를 참아내며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입이 가볍고 방정맞은 이는 일찍이 죽는다는 말이 있지.”

그는 손에 든 검을 익숙히 움직여 그들의 목덜미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대들의 말대로라면 내 이제 잃을 것이 없는데, 귀족 서넛 죽인다 한들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지, 지금 그 말은 우리를 속여왔다고 실토하는……!”

“글쎄. 내가 헤일튼가의 태생이 아니더라도 그대들은 죽고, 내가 헤일튼가의 태생이 맞다면 제일 먼저 내 약혼녀와 가문에 위협을 가하려던 자들을 죽일 테니 결과는 같겠군.”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똑똑, 노크가 울렸다. 곧 문이 열리고 조금 굳은 얼굴로 리프리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를 보자마자 방계 친족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마치 살았다는 듯 간절하게 리프리를 향해 외쳤다.

“저하!”

리프리는 눈앞에 펼쳐진 상황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푸른 눈동자가 침착하게 카르벨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런 모습을 보여 좋을 게 없었기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카르벨의 팔을 붙잡았다.

“카르벨, 괜찮아요.”

그녀의 말에 친족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으나, 엘로니아는 그 작은 싹마저 빠르게 잘라버렸다.

“나중에 결과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아요.”

“그대는.”

아무리 그녀가 힘을 주었다고 한들, 평생 검을 다뤄온 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검날을 친족들을 향해 뻣뻣하게 겨누고 있던 그는 고개만 돌려 엘로니아에게 묻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에게 한 말은 용서가 되지 않아.”

“……그러니까, 조금 나중에.”

엘로니아는 달래듯 그의 단단한 팔을 쓸어내렸다.

“조금 나중에 해요. 난 지금 피를 보고 싶지 않아요. 알잖아요, 이런 거 보기 힘들어한다는 걸.”

그제야 수긍이 되었는지, 카르벨이 깔끔하게 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던 친족들이 그제야 크게 숨을 내뱉었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리프리에게 무언가 한 마디라도 해달라는 듯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리프리는 정작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했다.

“……시종을 보내셔서 놀랐습니다. 헤일튼저에서 머물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무, 물론이죠. 아셀리 전하를 뵙느라 제국까지 오셨다면서요.”

눈치를 보던 방계 친족 중 한 명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답했다. 아셀리의 이름이 들리자, 리프리의 턱이 움찔거렸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빈 소파에 묵묵히 앉으며 단호히 물었다.

“가족 모임에 제가 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헤일튼가의 가족 모임이라면 더더욱 리프리 저하께서 참석하셔야죠.”

“……저는 헤일튼가에 일절 관여하지 않습니다만.”

“이, 이번은 다릅니다. 저희가 친자 확인이 가능한 약을 가져왔으니까요.”

그가 다급하게 시약을 가리켰다. 순간 리프리의 푸른 눈동자가 눈에 띄게 커졌다. 그는 친족들이 가리킨 시약을 한 번 보고는 곧장 고개를 돌려 카르벨을 응시했다. 누구보다 이 상황을 바라던 이 중 하나였을 텐데, 썩 기쁘거나 궁금한 듯 보이지 않았다. 혼란, 의심, 호기심. 모든 것들이 뒤섞여 복잡한 듯 리프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아드라 남작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병을 열며 말했다.

“이, 이것에 두 사람의 피를 넣으면 됩니다. 혈족이면 붉은색으로 변하고, 아니면 보라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저를 부르신 이유가 이것입니까.”

“예. 그러니 저하의 피와 카르벨…… 공의 피를 한 방울씩만 넣으면 알 수 있겠죠.”

리프리는 주저 없이 장갑을 벗었다. 당장이라도 손을 베어 피를 낼 수 있어 보였다. 그런 그의 행동을 막은 엘로니아는 친족들에게 말했다.

“카르벨과 어르신분들의 피를 넣어보죠.”

“……예? 이 시약은 가까운 친족일수록 색이 진하다고 합니다. 저희는 멀기도 하고, 굳이 사촌을 두고…….”

방계 친족들이 어리둥절하게 되묻자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헤일튼가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러니 헤일튼가의 피로 해야 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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