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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유모 (98/234)

98. 유모2021.11.07.

“폐하께서는 차도가 어떻게 되고 있나요?”

현재 황궁에서도 가장 바쁜 아셀리의 집무실. 최근 경비가 삼엄하다 못해 개미 한 마리조차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빡빡해진 궁 안은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아셀리의 집무실 역시 겹겹이 쌓인 서류를 제외하더라도 렌디먼 황제의 병세 탓인지 고요했다. 아셀리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주치의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차도는 없습니다.”

“……금방 쾌차하실 수 있으시겠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렌디먼 황제의 건강이 악화된 이후, 모든 업무는 아셀리가 도맡았다. 그의 건강 상태까지 당연히 그녀에게로 보고가 들어갔다. 하나뿐인 황손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그녀마저 잘못된다면 에스피디 제국은 혼란에 싸일지도 모른다. 현재 방계 중 제국 내의 상황을 잘 아는 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셀리는 그간 쌓아온 명성답게 흠 하나 없이 일을 마치고 있었다. 주치의의 말에 서류를 보던 아셀리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오전에 뵈었을 때 얼굴이 좋아 보이셨어요. 그대들을 믿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헤일튼 공작저에서 온 찻잎이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찻잎이요?”

처음 듣는 소식에 아셀리가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을 이었다.

“예. 정령사님께서 직접 보내셨다 하여 연구원들과 함께 성분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진정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묘하게 낮은 음성에 고개를 숙였던 주치의가 슬쩍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은 그에게 친절히 응원을 보낼 뿐이었다.

“정령사님이 이리 챙겨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추후 제가 따로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예. 그럼 내일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할 일을 마친 주치의는 조용히 그녀의 집무실에서 벗어났다. 달칵, 문이 닫히자 웃고 있던 아샐리의 얼굴이 단번에 굳었다.

‘정령사가 찻잎을 보냈다고?’

정령이 과거만 읽는 줄 알았더니, 독을 해독하는 찻잎까지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초조함이 앞섰다. 엘로니아가 언젠가 자신의 모든 것을 파헤쳐 볼 것 같았다. 자신의 모친은 물론, 과거 빈민가에서 살던 초라한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내면 어쩌나.

‘죽어도 안 돼.’

다시 그 밑바닥 인생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냄새나고, 술에 취한 남자가 돈을 내놓으라며 찾아와 제대로 보안조차 되지 않는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지옥 같은 삶. 아침에 돈을 벌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 자존심을 굽히며 구걸하는 매일.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승계를 마쳐야 해.’

렌디먼 황제만 없으면 그 뒤는 일사천리일 게 분명했다. 카르벨은 헤일튼가의 적통이 아니니, 언제든 그녀가 터트리기만 하면 될 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황궁에서 그 누구도 그녀가 차기 황제라는 사실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다만 건강하던 그를 갑작스럽게 죽일 수는 없으니 조금 시간을 들여 천천히 자연스럽게 독살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령사가 나타난 시점부터 아주 거슬려.”

아셀리는 조용히 으득, 이를 갈았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으로 만년필을 내려둔 그녀는 옆에 있던 늙은 여자에게 앙칼지게 물었다.

“유모, 그 찻잎의 효과는 확실한 건가.”

“물론입니다, 전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유모는 조용히 다가와 그녀의 뒤에 섰다. 슬그머니 고개를 내린 유모는 아셀리의 귓가에 아주 작은 음성으로 속삭이듯 말했다.

“황비 전하께서도 이렇게 황후 폐하를 물리시고 자리를 지키셨습니다.”

“……그때는 정령사가 없었을 거 아니야.”

아셀리의 예민한 반응에 그녀는 고민하는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오랜 시간 아셀리의 모친인 황비와 친구였던 그녀였다. 하녀에서 유모로, 유모에서 작위까지 받을 정도로 아셀리에게 있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고민하는 그녀를 두고 아셀리는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 카르벨 공작이 사실 공작가의 적통이 아니라고 밝힐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혈통집은 불에 타 사라졌다. 그쪽은 정령사가 있으니 의혹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엘로니아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극성맞던 헤일튼 공작가의 방계 친척들이 입을 다물고 있지 않은가.

“지금 독차를 수급해주는 사람 말이에요, 전하.”

유모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약초에 워낙 해박해서 전에 언뜻 물어보니, 친자인지 확인할 수 있는 시약도 있다더군요.”

“……그러면 뭐 하나. 이미 헤일튼 공작은 흙으로 돌아가고 없는데.”

“굳이 전대 헤일튼 공작으로 확인할 이유는 없지 않나요.”

“그게 무슨 소리…….”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을 꺼내던 아셀리는 불현듯 깨달았다. 꼭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가 대상일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조용히 떠오른 이름을 중얼거렸다.

“리프리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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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 헤일튼 공작 부인의 피가 섞였을 사촌 동생이니 적통이 맞다면 반응할 터. 더군다나 시기도 딱 적절하게 리프리는 현재 제국에 와 있지 않던가. 제아무리 엘로니아라 하더라도 눈으로 보이는 친자확인까지 어찌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아셀리는 곧장 편지지를 꺼내어 정갈한 글씨체로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여러 장에 똑같은 글을 적어 내린 그녀는 곱게 접어 유모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 시약을 구해다 줄 수 있어?”

“예, 물론입니다.”

“아니, 내가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도록 하지. 믿을 만한지 확인도 해야 하니.”

방계 귀족들이 믿을 수 있게 테스트용도 함께 첨부해야 하지 않겠는가. 계산을 끝낸 아셀리는 기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시약을 구한 뒤, 서신과 함께 헤일튼가의 방계 친족들의 가문으로 전달해.”

  *** 다음 날 아침, 헤일튼 공작저에서 엘로니아는 끙끙거리며 서신을 적어 내렸다.

“헤일튼 가에서 후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표를 찍고 나서야 개운한 듯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빈민가에서 만난 애니는 아카데미로 보내기로 했다. 헤일튼 가에서 전적으로 모든 학비를 지원하는 대신, 가끔씩 가문의 일을 돕는 조건이었다. 물론, 아카데미에서 빈민가의 아이는 차별을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똑 부러지게 답하던 애니의 성격과 대단한 그림 실력을 본다면 누구든 깔볼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헤일튼 공작가의 후원까지 있으니 말이다. 엘로니아는 뿌듯하게 서신을 바라보았다.

“너는 그래도 아카데미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한때 그녀도 얼마나 가고 싶던 아카데미였던가. 이제 자신에겐 의미가 없다 싶지만, 애니는 아직 어리니 훨씬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엘로니아는 기분이 좋았다. 서신을 보내기 위해 에이미를 부르려던 찰나. 똑똑. 노크가 그녀의 방 안에 울렸다.

“에, 엘로니아 님! 엘로니아 님!”

“마침 잘됐다. 내가 에이미를 부르려고 했는데.”

“그게, 그게 아니라.”

헉헉, 숨을 몰아쉰 그녀는 제대로 말을 뱉지도 못한 채 어버버거렸다. 이렇게 당황한 에이미를 처음 본지라 엘로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왜 그래? 카르벨이 불러? 추천서 보내고 간다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에이미를 닦달한 거야?”

“아니, 그것도 있지만요!”

간신히 숨을 고른 에이미는 불안한 듯 말을 이었다.

“바, 방계 가문에서 방문하셨어요!”

“이렇게 이른 아침에?”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재차 되물었다. 약혼을 했을 때도, 엘로니아가 정령사라고 밝혀졌을 때조차도 한 번도 서신이나 인사를 하러 오지 않은 이들이었다. 카르벨을 가주로 인정하지 않아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었기에, 불편해서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카르벨 역시 그들을 신경 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여태 관심조차 주지 않던 이들이 갑자기 헤일튼 가에, 그것도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란 말인가. 오늘부터 아셀리에 대해 카르벨과 의논할 생각이었다. 그 일정이 방계 친족들의 방문으로 어그러지자 조금 불쾌하기까지 했다. 엘로니아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건넸다.

“갑자기 왜?”

“모, 모르겠어요. 다짜고짜 공작님을 뵙겠다고…….”

“가자. 안내해.”

엘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에 에이미는 필사적으로 문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아, 안 돼요! 공작님께서 되도록 나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째서? 약혼까지 했는데, 어른들이 오셨으면 인사를 드려야지.”

“그래서예요.”

“뭐가?”

“약혼까지 하셔서 안 되는 거예요.”

엘로니아는 더욱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에이미를 응시했다. *** 헤일튼 공작저의 접객실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시종들조차 잔뜩 긴장해 발발 떨리는 손을 애써 모른 척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여유로운 이는 하나였다.

“갑자기 연락도 없이 찾아오시다니. 무례하시군요.”

혼자 기다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카르벨은 찻잔을 느긋하게 들며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방계 친족들이 그 꼴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독기가 가득한 데다, 카르벨의 작은 실수 하나라도 잡겠다고 불을 켜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 그에게 방계 5촌 친족 중 하나가 날카롭게 말했다.

“우리에게 할 말이 없니.”

“아, 있죠.”

카르벨은 떠올랐다는 듯 달칵, 찻잔을 내려두며 말했다. 일순간 싸늘한 시선이 그들을 매섭게 응시했다.

“아드라 남작 부인. 예를 갖추시죠.”

그의 냉정한 음성에 친족들은 잠시 움찔했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응에 그는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인지, 얼굴이 벌게진 아드라 남작 부인이 다시금 날카롭게 말했다.

“약혼도 멋대로 하시더니, 이제는 기본적인 가문의 예의마저 무시하는 이가 할 말은 아닌 듯하군요.”

“제 가문이니 가문의 규칙을 어찌 정하든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네 가문이라고? 누구 멋대로!”

그의 말에 울컥한 아드라 남작이 몸까지 들썩이며 일어나려고 하자, 옆에 있던 다른 친족이 그녀를 말렸다.

“누이, 참으시오. 벌써 이러면 그의 수에 말리는 걸세.”

“하, 들었어요? 내 정말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카르벨은 그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전혀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시하는 모습에 더욱 약이 오른 친족들은 조용히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카르벨은 그들에게 조용히 되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찾아오신 이유가 그것입니까. 가문의 예의를 무시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는지 알고도 그렇게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군.”

“뭘 듣던 별로 새로울 것 같지는 않군요.”

“글쎄.”

방계 친족은 비릿하게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그 순간, 똑똑. 날카로운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러운 노크가 들려왔다.

“엘로니아 데브니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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