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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싸움 구경 (94/234)

94. 싸움 구경2021.10.24.

  다음날 아침, 오전. 리프리가 헤일튼 저택에 머문다는 확답을 받은 뒤 긴장이 풀렸는지 자고 일어난 몸이 가뿐했다. 개운한 기분에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엘로니아가 느긋하게 준비를 마쳤을 때. 침대를 힐끔 본 에이미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갑자기 웬 퍼즐이세요?”

“아, 저거. 정령들이 좋아해서.”

밤새 닉스가 맞추고 간 것인지 퍼즐이 놓여 있었지만 정작 그는 보이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대충 얼버무리며 답을 건네자, 에이미는 정리하려던 침구를 건드리지도 못한 채 뒤로 스스슥 물러섰다. 아무래도 정령이 맞췄다고 하니, 정리하다 실수할까 봐 걱정되는 눈치였다.

“그냥 조심조심 빼서 가져가도 돼.”

“어우. 안 되겠어요. 실수로 쳤다가 다 흩어지면 어떡해요? 나중에 정령님께 허락 좀 맡아주세요.”

“으응……. 물어는 볼게.”

엘로니아의 답에 여전히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침구를 한 번 훑은 에이미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기듯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 방울방울 물이 모였다. 곧 그 물방울은 닉스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와, 엘로니아. 진짜 엄청 오랫동안 잤어!]

눈을 뜨자마자 닉스가 그녀를 반겼다. 자는 동안 내내 곁에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가끔 아기들은 자다 호흡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고 그래서 내가 주기적으로 숨을 쉬는지 확인까지 했다니까.]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퍼즐을 맞추면서 엘로니아를 기다린 모양이었다.

“밤새 혼자 논 거야?”

[아니. 님프랑 같이 맞췄어. 일어나면 같이 맞추려고 기다렸는데, 어제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말이야.]

“미안해……. 일이 있어서 어제 조금 바빴어.”

[어쩔 수 없지. 관대한 내가 이해할 수밖에. 그래서 완성작 보여주려고 내가 기다렸잖아!]

닉스는 뿌듯하게 어깨를 펴며 포르르 날아서 침대에 널린 완성된 퍼즐 위를 빠른 속도로 빙빙 돌아다녔다. 마지막에는 짠, 자그마한 두 손을 뻗어가며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여태 맞추기만 했지 완성된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라 엘로니아도 조금 그가 대견하게 느껴져 칭찬했다.

“이걸 해냈구나!”

[아, 당연하지. 내가 누구인데! 이 정도는 금방이라고!]

“멋있다! 닉스가 은근히 끈기가 대단하다니까.”

혼자 기다렸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편한 이야기도 아닌데, 리프리와 협상하는 자리에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열심히 박수까지 곁들이자 잔뜩 신이 난 닉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애써 참느라 묘하게 어정쩡한 표정이 된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퍼즐을 툭툭 자그마한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믿을 만한 건 나밖에 없지?]

“응. 난 원래 닉스를 믿었다니까. 우리는 메티카 감옥 동기잖아?”

비록 잡힌 건 그녀 혼자였지만. 정작 본인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 볼을 씰룩였다. 엘로니아는 신기한 듯 퍼즐을 보며 물었다.

“다음 퍼즐도 벌써 정했어?”

[응. 어제 노움이랑 골랐는데, 완성하면 조랑말이 엄청 멋있는 그림이 있어서 그걸로 할 거야.]

조랑말이 멋있을 수도 있는 건가. 엘로니아의 의문을 느꼈는지 닉스는 자랑스럽게 퍼즐 조각이 담긴 상자를 자그마한 몸으로 번쩍 들어 옮겼다. 호기심에 자랑스럽게 닉스가 여는 퍼즐 상자에 시선이 갈 무렵. 똑똑. 노크가 들렸다.

“리프리입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오전부터 대뜸 찾아왔다는 소식에 엘로니아는 재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엘로니아에게만 이른 시간이었지, 카르벨은 한창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있을 시간이었다. 곧 리프리가 조금 더 굳은 얼굴로 들어와 빠른 속도로 말을 이었다.

“이제 편하게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네? 무슨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세요?”

“제국의 예법대로 따라주셔도 괜찮습니다.”

그제야 그가 왕실 예법대로 따르는 시종들에 관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그래도 바로 철회하기에는 망설여졌다.

‘왕실 예법 운운하면서 붙잡았는데, 바로 철회하면 너무 속 보이지 않나.’

하지만 그녀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 리프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오랫동안 보아온 시종들입니다. 갑작스럽게 익숙하지도 않을 라티에 왕국의 예법을 따르는 것을 보려니…….”

“집사에게 말씀을 드려 보시지 그러셨어요.”

“집사장과 시녀들은 엘로니아 양께서 지시하신 일이라 철회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이런 부분에서 헤일튼 가에서 일하는 사람의 티가 날 줄이야. 제아무리 왕족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헤일튼가 주인들의 명령을 우선으로 여긴다. 그들의 철두철미한 직업정신에 엘로니아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그럼 집사장에게 전해둘게요.”

“감사합니다.”

대놓고 환히 핀 얼굴로 답을 하는 리프리는 밝은 음성으로 인사까지 건넸다. 그러고는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떠올렸는지 급격하게 굳어갔다.

“……엘로니아 양의 방이었군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저도 방금 들어온 참이고…….”

안 그래도 잘 되었다. 카르벨과 있을 때는 날이 선 그에게 질문을 건네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둘이 있을 때는 제법 편안한 분위기였다.

“제가 궁금한 게 있거든요.”

“아셀리 전하에 관련된 일이라면 죄송합니다.”

리프리는 아직도 섣부르게 말을 꺼내는 것을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무래도 제국과 얽힌 일이다 보니 더욱 그런 듯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역시 왕족이었다. 잘못했다가는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니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뇨. 아셀리 전하 말고요.”

그만이 대답해줄 수 있는 일이 있다.

“황후 전하에 관해서 여쭙고 싶어요.”

“황후 전하……. 말씀이십니까.”

이미 돌아가신 황후 전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렌디먼 황제는 현재 병상에 있으니 꼬치꼬치 물었다가는 건강이 더 나빠질까 우려되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 아셀리가 승계받는 일은 일어나면 안 되었다. 때문에 가장 적합한 이는 라티에 왕국에 있을 왕비였다.

“전대 공작 부인과 자매간의 사이가 각별하다 들었거든요. 혹시 들으신 것은 없으신가요?”

“……황후 폐하라면 저도 몇 번 만나 뵌 적은 있습니다만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냥 단편적인 것이라도 괜찮아요.”

아셀리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서일까. 리프리는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엘로니아가 가만히 그를 보며 기다리고 있자, 쑥스러운 듯 리프리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어머님께서 예전에 말씀하시기를, 한때 황후 폐하께서 전대 헤일튼 공작님과 꽤 심하게 다퉈 말을 안 나눴던 기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다퉈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탓에 이모님께서 굉장히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들이 가족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일이야 흔하니까.’

결혼해서 떨어져 살면 애틋해진다던데. 닉스가 보여준 과거 속에서 보았던 헤일튼 공작과 황후의 관계는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가족은 그러다가도 싸울 수 있으니 이상하지는 않았다.

‘황후 폐하의 건강에 유독 신경을 쓰시는 느낌이었는데…….’

전대 헤일튼 공작은 차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이던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황후가 지시하지 않은, 아직 아셀리가 렌디먼 황제의 딸인지도 모르는 단계에서 황비의 동향까지 파악할 정도였다. 그 정도라면 싸워도 금방 화해할 법한 관계가 아닐까. 가만히 듣고 있자, 심심한 듯 허공을 배회하던 닉스가 슬그머니 엘로니아의 머리 위로 다가와 앉았다. 엘로니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되었길래…….”

“모르겠습니다. 그 탓에 이모님도 전대 공작님을 여러 번 달래려고 하셨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만 압니다.”

리프리의 말을 곰곰이 듣던 닉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오, 세상에서 싸움 구경이 제일 재밌지!]

유독 밝아지는 음성을 듣고 있자니, 진심인 듯했다. 팍, 튀어 오른 닉스는 리프리의 주변을 배회하며 부산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싸웠대? 어디야? 거기 물도 있어?]

“니, 닉스…….”

[엘로니아, 뭐 해. 빨리 물어봐. 싸움 구경이라잖아. 세상에서 불구경, 싸움 구경, 사랑싸움이 최고라니까!]

엘로니아는 빠르게 생각을 갈무리한 뒤,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황후 폐하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그냥……. 닉스가 좀 이런 부분에 관심이 있어서요.”

“아, 역시 자연을 수호하는 분들은 다툼에 예민하시군요.”

차마 싸움 구경을 보고 싶어 한다고 솔직하게 말을 할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일단 무조건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리프리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가자마자 곧장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좋아, 갔다.”

리프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그녀는 빠른 속도로 저택을 내달렸다.

[지금 싸움 구경 보러 가는 거지? 같이 가!]

“당연하지. 빨리 와.”

엘로니아는 기억을 더듬어 전대 헤일튼 공작이 썼던 방을 찾았다. 사고가 난 이후, 그 방은 폐쇄되었다. 아무래도 사고로 세상을 달리 한 사람의 방이기도 하고, 카르벨 역시 가문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기에 그대로 방을 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주변의 방 또한 현재는 사람이 사용하지 않는 탓에 거의 창고처럼 쓰이고 있었다.

‘옛날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지!’

부지런히 달려오자, 그녀의 예상대로 방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리를 잡아당겨도 잠금이 되어 있는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아, 열쇠가 어디 있지.”

“여기 있네.”

“와, 다행이……. 어?”

얼굴 옆으로 갑작스럽게 내밀어지는 열쇠를 아무 생각 없이 받으려던 엘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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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벨이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열쇠를 들어 흔들고 있었다.

“왜, 찾던 것 아니었나?”

“아, 아니. 어떻게 여기 있어요?”

“지나가는데 그대가 열심히 뛰어가길래. 뒤에서 쫓아와도 모를 정도로 급한 일이 있나 했지.”

“불렀어야죠!”

“불렀는데 못 듣더라고.”

아, 내 잘못이네. 엘로니아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벙긋하다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에요, 잘됐어요. 카르벨이 열쇠를 갖고 있을 줄은 몰랐거든요.”

“내 저택인 것을. 여기가 어떤 방인지는 아는 거야?”

“전대 공작님 방이요.”

엘로니아의 답에 닉스는 궁금한 듯 거의 문에 달라붙어 보챘다.

[엘로니아, 빨리빨리!]

그녀가 눈짓으로 방을 흘기는 것을 본 카르벨은 성큼, 나서서 먼저 문을 열어주었다. 달칵,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손수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같이 해. 혼자 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견디기 힘들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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