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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협상 (92/234)

92. 협상2021.10.17.

카르벨은 큰 반항 없이 엘로니아가 시키는 대로 환복을 마쳤다. 하지만 적당히 표정을 갈무리하는 것을 보아하니, 내심 리프리와의 상황이 흔쾌히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넥타이를 고쳐매는 그를 뒤편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왕족의 예우를 다하기 위해서는 카르벨과 함께 리프리를 맞이해야만 했다. 해서 그의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살폈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네.’

짙은 고동색 원목으로 제작된 침대와 줄 맞춰 딱 각이 선 책장. 햇빛이 싫어 커튼을 꼭 쳐두는 엘로니아와 달리 벽에는 흔한 초상화 하나 걸린 게 없었다. 깔끔했고, 그래서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집무실에서 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인간미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게 사람 손을 탄 흔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에 비하면 엘로니아의 방은 상대적으로 어질러진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설마 잠도 집무실에서 자나?’

일전에 집무실 소파에 구겨지듯 누워 자던 모습이 떠오른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등을 슬쩍 노려보았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밤에 급습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카르벨의 웃음기 섞인 음성이 조용히 방 안을 가로질렀다.

“처음이군.”

“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카르벨이 뒤를 돌아보며 입매를 늘렸다.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평소보다 단단해 보였다. 최근 들어 풀어진 모습을 더 많이 마주해서 그런지 몰라도, 조용히 가라앉은 그의 모습은 날렵함이 돋보였다. 미소를 지어도 지워지지 않는 서늘한 분위기가 존재했다. 천천히 걸어 온 카르벨이 상체를 숙였다. 소파의 팔걸이에 두 손을 지탱하자, 꼭 그의 품 안에 갇힌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느리게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이대로 나가지 않으면 그대가 싫어하겠지.”

“……리프리 저하가 기다리시잖아요.”

“그 부분도 조금 불만이고.”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엘로니아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하필 그놈이 기다려서 나가야 한다니.”

“그, 그놈이라뇨!”

엘로니아는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눈동자만 굴려 빠르게 훑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왕족에게 이런 식의 말투를 쓰는 건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검지까지 세워 조용히 하라고 눈치까지 주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평소와 달리 가라앉은 듯 굳은 표정이 차가웠다. 망설이는 그를 처음 보는 듯했다.

‘조금 풀이 죽은 건가.’

웃을 여유조차 없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안쓰러움에 엘로니아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그 정도로 싫은 거예요?”

“괜찮아. 단지 둘이 있어도 모자랄 시간을 방해꾼이 갉아먹는 게 언짢을 뿐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을 의심하는 사람과 마주하는 순간부터 유쾌하지는 않았을 터. 엘로니아는 위로하듯 그를 달랬다.

“그래도 거절하지 않고 나서줘서 고마워요. 끝나면 같이 소소하게 파티라도 해요.”

혹여 그가 많은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 파티로 오해할까 싶어 엘로니아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소수로! 최소한의 인원!”

“최소한이면 몇 명이지.”

“으음. 데드 경이나 그레이터 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것도 많아.”

그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엘로니아의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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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에 입술을 짙게 누른 그가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그대만 있으면 돼.”

진득하게 마주친 눈동자에서 어느새 열기가 피어올랐다. 맞닿은 손에 입술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지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손을 거둬들이며 시선을 피했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리프리를 만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숨소리를 크게 내는 것조차도 신경이 쓰이는 탓에 호흡을 느리게 하며 답했다.

“그, 그래요. 그럼.”

씨익, 그의 입매가 만족스러운 듯 호선을 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놀란 엘로니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카르벨은 조금 나른한 듯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설명을 건넸다.

“이건 행운을 빈 거야. 그대는 정령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리프리 저하랑 협상은 잘하실 수 있는 거죠?”

“아마도.”

그의 속삭임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금 입술에 따뜻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엘로니아는 팔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

“리프리 저하의 눈이 닿는 곳은 일단 급하게 세팅을 마쳤습니다.”

카르벨과 엘로니아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에이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빠릿빠릿하게 보고를 건넸다. 엘로니아는 평소와 달리 빠르게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도 열기가 채 가시지 못한 탓에 두 뺨은 조금 붉은 상태였다. 이유를 모르는 에이미는 의문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보고가 모자라서 그런 걸까. 엘로니아의 반응을 살핀 에이미는 빠른 속도로 착실하게 말을 덧붙였다.

“워낙 급하게 준비를 시작한지라, 다른 곳은 접객실에 계실 동안 빠르게 끝마치겠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하지만 엘로니아는 손으로 입술을 가린 채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엘로니아에게서 다른 지시가 없자, 에이미는 자연스럽게 옆에 서 있던 카르벨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표정은 한결 더 가라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참는 듯 조금 크게 심호흡을 한 그는 다시금 친절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표정과 달리 갈라진 듯 낮은 음성이 냉정하게 답했다.

“지금 접객실로 가지.”

“네, 알겠습니다!”

확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옮기는 에이미의 뒤로 그의 낮은 한숨이 들려왔다.

“하, 미루고 싶군.”

“안 돼요.”

“손 치워도 돼. 별로 흐트러지지 않았어.”

뒤에서 퍽, 작게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엘로니아가 팔을 때린 듯싶었다.

‘헉. 예비 마님께서 공작님을……?’

카르벨은 절대 누구에게 맞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 작은 손해만 끼쳐도 단호하게 내치는 사람이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를 애써 감춘 채 에이미는 걸음을 빨리해 그들을 접객실로 안내했다. 혹여 그가 엘로니아에게 화를 낸다면 기꺼이 앞을 막아서야겠다는 다짐은 덤이었다. 정작 뒤에 있는 카르벨은 엘로니아가 귀엽다는 듯이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접객실에 들어서자, 리프리가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엘로니아와 카르벨이 예를 갖춰 왕족에게 건네는 인사를 건넸다. 이를 보는 리프리의 시선이 어정쩡했다. 곤란한 듯하면서도 어색한지 습관처럼 인사를 받으면서도 멋쩍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에요. 마땅히 대접해드려야 할 일이었는걸요.”

“다른 곳도 아니고 헤일튼 가라면 시종들도 약식이 더 익숙할 겁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라티에 왕국의 예절대로 바뀐 접객실이 신기한 듯 찻잔이 놓인 테이블을 힐끔거렸다. 곧 시녀가 들어오고, 모든 시중을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해 왼쪽으로 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단하시군요.”

리프리의 칭찬에는 거짓이 없었다. 순수한 감탄에 가까웠다. 에스피디 제국에서 타국의 예절을 잘 아는 시종이 드물었다. 유능한 집사의 도움과 엘로니아의 지식으로 이뤄진 결과물이었다. 카르벨은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친절한 얼굴로 정중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다시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겨 영광이군요.”

“……예. 마찬가지입니다.”

갑자기 달라진 태도에 리프리는 경계하듯 딱딱하게 답했다.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평소 제국의 예절대로라면 왼쪽에 놓여야 할 찻잔과 포크를 자연스럽게 오른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리프리가 잠시 멈칫했다. 그건 카르벨이 그간 라티에 왕국의 예절을 알면서도 제국의 예절을 고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실상 헤일튼 공작저는 제국령에 속해 있으니 틀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랬던 그가 태도를 바꾸었다는 것은 큰 의미였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리프리가 먼저 운을 뗐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그제야 카르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되물었다.

“최근 폐하께서 건강이 좋지 않으시단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예.”

“하면 입궁하셨을 때 뵈었겠군요.”

“……아셀리 전하와의 자리가 끝난 뒤에는 더는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여 뵙지 못했습니다.”

아셀리의 이야기가 나오자 엘로니아는 초조함에 괜히 퍽퍽, 케이크만 빠르게 퍼서 입 안으로 넣었다. 달달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찻잔을 들었을 때. 카르벨이 되물었다.

“폐하는 아셀리 전하께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이자,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그런 폐하의 건강이 좋지 못하십니다. 그런 상황인데도 폐하께 리프리 저하를 안내하지 않았다니. 이상하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제 쪽이 선약이었습니다.”

“물론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죠.”

싱긋, 미소를 지은 카르벨이 조용히 되물었다.

“하지만 아셀리 전하께서 폐하의 건강상의 문제로 약속을 미룬다 한들, 리프리 저하께서 책잡을 분은 아니시잖습니까.”

그가 찻잔을 들어 짧게 목을 축였다. 리프리는 대답 대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제복 자락을 움켜쥐었다. 이를 힐끔, 눈으로 훑은 카르벨은 확고하게 못을 박았다.

“두 분께서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마인데.”

“……꼭 전하와 나눈 대화를 다 아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글쎄요.”

카르벨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모습에 리프리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만약 부당했다면 진즉 반박했을 리프리가 어째서인지 입을 꾹 다물 뿐. 조용하기만 했다.

‘아셀리 전하와 대화하면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신 거야……!’

그래서 헤일튼 공작저로 방문한 것이다. 카르벨 역시 눈치를 챈 모양인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저하께서 불온한 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신다는 것은 압니다.”

“……과찬이시군요.”

“형제처럼 지낸 친족을 잘라 내실 정도이니.”

그 말에 리프리가 불쾌한 듯 빠르게 반박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죽이지 않았습니다.”

웃음기 하나 없는 확고한 답이었다. 여태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고수하던 리프리조차도 놀랐는지 커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카르벨은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며 답했다.

“믿으시는 건 전하의 몫입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한결같이 답변드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헤일튼 공작저의 적통이라는 답은 아니었다. 물론 적통이 아니기에 선대 공작 부부를 해치고 공작가를 승계받았다는 의혹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셀리와 친분이 있던 리프리라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이 마음에 걸릴 것이다. 리프리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카르벨은 여유롭게 답했다.

“제가 협상에 성공하는 방법을 알려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저는 지금 저하께 원하시는 것을 내드렸습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카르벨이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러니 이제 저하께서도 공작저에 방문하신 진짜 목적을 밝히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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