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 협상 테이블 (91/234)

91. 협상 테이블2021.10.14.

집사가 리프리에게 손님방을 안내하기 위해 먼저 앞서 나갈 때. 정작 하인과 시녀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눈치만 보고 있었다. ‘헤일튼가의 사촌 리프리 라티에’는 익숙하지만, ‘라티에 왕가의 리프리’는 어색하기 때문이었다. 왕족이 머무를 때와 똑같이 맞이해야 하는지 헷갈리는 눈치였다. 엘로니아는 급하게 시녀들을 불러 지시했다.

“페이는 다과실의 식기를 오른쪽부터 시작하는 배열로 바꿔줘. 에이미는 차를 준비하고. 전에 님프가 선물해준 찻잎 있지?”

“네, 있습니다!”

“그걸로 부탁할게.”

라티에 왕가의 식사 예절은 무조건 오른쪽부터 시작된다. 그녀의 말뜻을 알아들은 시녀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 엘로니아도 빠르게 준비를 위해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갑작스럽게 방에 들어오자마자 환복을 하니 닉스는 신기한 듯 주변을 돌아다녔다.

[뭐야? 어디 가? 나 빼고 재밌는 거 하려는 거지.]

“아니야. 리프리 저하랑 대화를 좀 나누려고.”

[퍼즐도 있어? 전에는 했잖아.]

“안타깝게도 오늘은 조금 격식을 차려야 할 것 같아.”

닉스는 들었던 호기심이 팍 식었는지 볼을 씰룩였다. 보석함을 보던 시녀 중 하나가 물었다.

“약혼반지는 착용하실 건가요?”

“아, 그래야겠지?”

“왕족을 맞이하는 예절대로라면……. 그게 공식적이기는 하죠.”

혼인하거나 약혼한 이는 모두 반지를 착용해야 했다. 엘로니아는 거의 착용하는 일이 없다시피 했던 약혼반지를 생소하게 응시했다. 보석에 미세하게나마 마력이 들어 있는 걸 알게 된 후로는 액세서리를 상시 착용하지 않았다. 카르벨도 검을 잡고, 장갑을 끼고 있는 시간이 긴 터라 약혼반지는 착용하고 있지 않을 터.

“그래. 오늘만큼은 껴야지.”

어색하게 약지에 낀 반지를 바라보며 엘로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기 전, 닉스에게 사과도 잊지 않았다.

“닉스, 내가 사실 꼭 누군가를 붙잡았으면 하는 일이 있었거든?”

[흐음.]

“그래서 닉스 핑계를 대었어. 미안해.”

[그러든지. 아기니까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런 건 혼내는 거 아니라고 그랬어.]

아, 아기……. 졸지에 큰 아기가 되었지만 엘로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만큼은 아기라 불려도 상관없을 듯했다.

“조, 좋은 말을 해주셨네. 누가 그랬어? 노움?”

[아니! <신생아를 다루는 방법>이라는 책인데, 노움에게 빌려서 봤어. 지금은 님프가 보고 있을 거야.]

“우, 우와……. 서로 지식도 공유하고 참 사이좋아 보여서 좋다.”

[원래 화목한 가정에서 애가 바르게 자라는 법이래.]

하하, 멋쩍은 웃음을 남긴 엘로니아는 혹여 자신에게 이유식이라도 먹이지 않을까 두려워 스스슥, 빠른 속도로 방을 벗어났다. *** 카르벨은 집무실 책상 뒤에 위치한 창문으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정원 입구에서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볼 수 있었다. 라티에 왕가의 인장이 박힌 흰 마차는 결국 떠나지 않았다. 엘로니아까지 들어간 뒤, 분주해진 저택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깔 덮개를 준비하고, 모피나 가죽으로 된 제품들을 커튼으로 가리거나 치우는 걸 보아하니 왕족의 대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하.”

조금 아이러니하기까지 했다. 어릴 적 리프리는 제2의 집이라 할 만큼 헤일튼 공작저에서 살다시피 했다. 창고에서 발견한 저택 약도를 보물 지도인 줄 알고 온 저택을 누비고 다닌 시절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순진한 시절에는 서로를 형제처럼 여겼다. 그렇게 쌓았던 것들은 카르벨이 헤일튼가의 태생이 아니라는 의혹 하나로 모두 사라졌다. 아주 간단하게. 고작 혈통 하나로 말이다. 얼마나 우스운가.

“그래놓고 이제 와서 묻는 것도 웃기는군.”

아셀리에게 부탁을 받고 에스피디 제국까지 온 게 확실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렌디먼 황제가 쓰러진 시기와 맞물릴 수 없다. 엘로니아의 서신을 받아서 방문했다고 보기에는 그의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제안했을 테고, 리프리가 수락했을 터. 그조차도 못마땅했다. 헤일튼가의 가주는 그였다. 정식으로 혼인을 올리지 않았지만 엘로니아는 예비 안주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왕족 대접이랍시고 고개를 조아릴 걸 생각하면 기분이 더욱 가라앉을 뿐이었다.

“정령사라면 그렇게 숙이지 말라고 했거늘.”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대상이 리프리라는 데에서 불쾌함이 일었다. 냉정한 그의 얼굴이 창문 유리에 비쳤다. 딱딱하고, 매섭고, 거리감을 두기 딱 좋은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뒤로 엘로니아의 음성이 울렸다.

“카르벨, 바빠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카르벨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한 미소를 걸쳤다.

“아니. 오히려 그대가 바쁜 줄 알았는데.”

카르벨의 답에 엘로니아는 단걸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다정한 말투와 싱긋 웃는 미소. 거기다 매일 서류를 보던 것과 달리 느긋하게 정원을 보는 여유까지. 리프리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게 무색했다. 그의 시선이 엘로니아의 드레스로 향했다. 실크 소재의 드레스는 평소와 달리 흔한 레이스나 화려한 원단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단순했다. 그 대신 군데군데 포인트가 들어간 장신구들이 단순한 드레스를 고급스러워 보이게끔 만들었다. 저택에서는 잘 하지도 않는 복식인지라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급하게 환복해서 어색하죠?”

“아니. 잘 어울려.”

그가 진득하게 바라보며 책상을 돌아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말을 꺼내지.’

괜한 초조함에 손에 낀 반지를 엄지로 굴렸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리프리 저하가 저택에서 하루 머무르실 거예요. 아마도 내일 오전에 가실 것 같아요.”

“그대가 그리 결정했다면 일일이 보고하지 않아도 돼. 안주인에게 그 정도 권한은 있다.”

“이건 안주인으로서의 보고가 아니라…….”

엘로니아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부릅떴다.

“제 부탁 들어주실 수 있으세요?”

“리프리에 관한 거라면 들어보고.”

방금 먹었던 용기가 금방 사그라들었다. 엘로니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카르벨.”

“응, 듣고 있네.”

“카르벨이 그랬잖아요. 협상이라면 제안하는 쪽에서 먼저 상대방에게 유리한 부분을 드러내야 한다고.”

“그랬지.”

“그걸 카르벨이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짧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쪽은 아쉬울 게 없는데, 어째서.”

“나는 리프리 저하가 아쉽거든요.”

엘로니아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잿빛 눈동자에 그림자가 졌다. 무섭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가 되물었다.

“그의 어느 부분이 아쉬운지 자세히 이야기해줄 수 있나.”

“그러니까, 으음. 어찌 되었든 카르벨이랑 어린 시절부터 지낸 사람이잖아요.”

카르벨의 이름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의 굳은 얼굴이 조금 느슨해졌다. 곧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을 건넸다.

“지금은 아니지.”

“그래요, 아니죠! 그렇지만 자주 들르시기는 하잖아요.”

“감시하러 오는 거야.”

“그마저도 애정이에요. 보통은 귀찮아서 사람을 시키지 본인이 오지 않아요.”

엘로니아의 설득에도 카르벨은 미동조차 없었다. 카르벨은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혈통이 전부인 줄 아는 귀족들이라면 더더욱. 모든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돌아설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엘로니아는 조금 간절한 듯 그의 손을 붙잡았다. 카르벨은 가만히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응시하며 답했다.

“아셀리의 사람이다. 믿을 수 없어.”

“무, 물론 그렇지만. 완벽하게 아셀리 전하의 편에 설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녀 역시 숨기는 게 많은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로엘 황태자의 이야기만 들어도 리프리는 단번에 그녀를 끊어낼 성격이었다. 그만큼 올곧은 사람이기에 그 정도의 확신은 있었다.

“나는 카르벨이 리프리 저하와 협상이라도 시작해 봤으면 좋겠어요.”

“…….”

카르벨은 답이 없었다. 대신 그녀가 붙잡았던 손에 있는 반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16566371039245.jpg

  장갑을 낀 손으로 가볍게 굴리는 손놀림에 그녀가 조금 단호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르벨.”

아래를 보던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그 순간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엘로니아와 눈을 마주친 카르벨이 진득하게 물어왔다.

“그대가 원하는 게 리프리 저하와의 협상인가.”

“정확하게는, 카르벨이 리프리 저하와 조금 더 대화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그 둘의 사이를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같이 지낸 세월만큼의 감정은 누적되어 있을 터.

“알겠네. 내 약혼녀가 원하니 들어주어야지.”

“고마워요.”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 나는 가주로 거래를 할 생각이지, 어설픈 감성팔이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사람은 아니라서.”

그가 엘로니아의 손을 들어 반지에 입을 맞췄다. 순간, 장갑을 낀 그의 손 위로 투박한 형태가 눈에 들어왔다. 반지를 껴서인지 몰라도 그 형태가 오늘따라 선명하게 보였다.

“카르벨, 손에 그건 뭐예요?”

“그대와 같은 것.”

설마, 반지를 끼고 다녔나? 엘로니아는 믿기지 않아 입을 벌리며 외쳤다.

“검을 잡는 분이 그걸 매일 끼고 다니셨어요?”

“그래서 장갑을 끼잖아. 혹여 검과 닿아서 좋을 게 없으니.”

“에이, 그래도……. 빼, 빼고 다닐 때도 있었겠죠. 그쵸?”

왠지 홀로 빼고 다녔던 자신이 더없이 못된 사람처럼 느껴졌다. 미미한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해 묻는 말에 카르벨은 보란 듯 장갑을 벗어 손을 보여주었다. 투박하고 거친 손 위로 꽤 오랫동안 반지를 낀 탓에 눌린 자국이 그대로 굳은 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약혼을 했으면 끼고 다니는 게 당연하지.”

“……앞으로 열심히 끼고 다닐게요. 미안해요.”

“그대는 상관없어. 괜히 또 아셀리의 수작질에 이상한 것을 달고 오면 곤란하잖아.”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손에 입을 맞췄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녀의 손에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역시 내심 바라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녀가 미미하게 울상을 짓고 바라보자, 카르벨은 부채감을 덜어주기 위해 농담을 건네기까지 했다.

“끼고 있으면 괜한 사람들이 집적대지 않아서 마음에 들거든.”

그는 손을 바짝 마주 잡으며 물었다.

“리프리 저하를 잡아두었다고 했지. 어디까지 진행되었나.”

“일부러 라티에 왕국의 예절을 들먹이면서 잡아두었어요.”

“그런 것까지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뿌듯하게 어깨를 펴며 답했다.

“카르벨이 저를 개처럼 굴리면서 암기시킬 때의 효과를 좀 보았네요.”

손을 마주 잡았던 그가 잠시 움찔했다. 그대로 굳은 듯한 그의 앞으로 엘로니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왜 그래요?”

“미안하군.”

“아, 외우게 시킨 거요? 저는 좋았어요. 어찌 되었든 도움이 많이 되었거든요.”

결론적으로 이번에도 도움이 되었고, 연회에서도 제법 유용했다. 아마 그때 외우지 않았어도, 결국은 따로 공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 가요. 얼른 옷 갈아입고 나와요. 시간이 없어요!”

엘로니아는 환복을 위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