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아군 혹은 적2021.10.07.
닉스는 이해가 안 되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보여준 과거도 최근이잖아.]
로엘 황태자가 아기일 시절이면 족히 20년은 더 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닉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엘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뚫어질 것처럼 응시하는 순진한 눈망울에 엘로니아는 침을 삼키며 침착하게 설명했다.
“닉스에게는 그럴 수 있어! 근데 나는 태어나기도 전의 과거였거든.”
[뭐……?]
충격을 받은 닉스는 허공에서 주춤, 뒤로 물러섰다. 늘 미미하게 푸르스름했던 얼굴이 조금 더 하얗게 질리기까지 했다.
[정말이네. 엘로니아는 완전 아기였어…….]
그것참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말씀하시니 제가 기분이 묘합니다만……. 엘로니아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오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충격이 컸는지, 닉스는 새삼스럽게 중얼거리며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아기는 어떻게 다뤄야 하지? 노움은 알고 있나?]
“그렇게까지 안 해도…….”
[아니야. 움직이지 마! 뼈라도 부러지면 어떡해!]
성인식까지 지난 그녀를 두고 바람 불면 날아갈까, 잘못 걷다가 넘어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양새였다. 어쩐지 님프는 산딸기부터 꽃까지 바리바리 싸서 주고, 노움은 자꾸 구황작물을 캐서 주더라니.
‘다들 나를 공동육아 했니……?’
엘로니아는 스쳐 지나가는 과거 정령들의 모습에 두 눈이 흔들렸다. 옆에서 닉스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카르벨이 그런 그녀의 기척을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다. 애써 티를 안 내려고 했으나,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뭐가 잘못되었나 보군.”
“닉스가 잠깐 시기를 착각했나 봐요.”
허공을 돌아다니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 닉스를 두고 그녀는 태연하게 답을 이었다.
“아, 여기가 황후 폐하의 침소였던 것 같은데. 혹시 오신 적 있으세요?”
“아주 어릴 때 뵌 게 전부야. 난 폐하보다 로엘 전하를 더 자주 뵈러 들어왔었고.”
하긴. 일전에 정령들이 보여준 과거에서도 로엘 황태자가 공작저를 찾아왔었다. 나이대도 얼추 비슷하고, 몸도 아픈 황후보다는 같은 제국 출신의 사촌끼리 친할 수밖에. 엘로니아는 과거 속에서 보았던 덜덜 떨던 하녀를 떠올리며 기대 없이 물었다.
“주근깨가 있고, 일자 앞머리를 한 오렌지색 머리를 한 하녀를 본 적 있으세요?”
“최근?”
“으음. 아주 오래전에 궁에 있던 하녀 같아요. 황후 폐하께서 계실 적이요.”
“그때면 나도 입궁을 제법 하던 시기니 지나치면서 얼굴은 보았을 텐데.”
그는 기억을 더듬는지 이맛살을 찌푸렸다. 카르벨이 고민하는 사이, 닉스는 마음 정리를 끝냈는지 자그마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당당히 외쳤다.
[어쩔 수 없지. 엘로니아, 내가 앞으로 지켜줄게.]
“그래, 고마워.”
[동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거지!]
졸지에 오라버니까지 생겼다. 제법 의욕적으로 눈을 빛내는 닉스를 보고 있자니,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엘로니아는 그저 하하, 어색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닉스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힘차게 답했다.
[내 동생이 원하니 어쩔 수 없지. 아주아주 최근이면 되는 거야? 아기의 기준으로 최근은 얼마나 되는 거야?]
“으응, 대충 한두 달 내외?”
[좋아. 완전 눈 깜빡하면 지나가는 시간이네!]
닉스는 포르르, 날아와 그녀의 이마에 다시금 입을 맞췄다. 시원한 감각이 퍼지고, 곧 복도를 걷는 아셀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조한 듯 렌디먼 황제가 있던 침소로 향하는 걸음은 예절과 거리가 멀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그런 그녀의 뒤로 처음 보는 하녀가 트롤리를 끌며 따라오고 있었다. 빠른 걸음을 따라잡느라, 트롤리를 잘못 몰아 비싼 찻잔의 이가 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쓰느라 잔뜩 긴장한 모습이었다. 굼뜬 그녀가 거슬렸는지, 앞서 나가던 아셀리가 휙, 고개를 돌렸다.
“느리구나.”
“죄송합니다, 전하. 혹여 차와 찻잔에 문제라도 생길까 하여…….”
하녀의 입에서 차라는 말이 나오자, 조금 사납게 올라갔던 아셀리의 눈매가 서서히 온화하게 내려앉았다. 단호하게 물었던 목소리도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괜찮다. 폐하께서 몸이 편치 않으신 바람에 내 마음이 급했구나.”
“상심이 크시겠어요.”
아셀리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조금 더 느린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트롤리 위를 훑었다. 맑은 듯 붉은 기운을 가진 색의 차가 있었다.
‘황후 폐하가 마셨던 것과 같아.’
비슷한 색의 비슷한 모습. 심지어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진 황후와 렌디먼 황제. 깨닫는 것과 동시에 현재로 돌아온 엘로니아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다급하게 카르벨을 찾아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카르벨의 입에서 깨달았다는 듯이 짧은 탄성이 나왔다.
“아, 그래. 유모였어.”
“네……?”
“아셀리 전하의 유모. 그녀가 비슷한 외형이었지.”
“유모……라고요?”
“하녀 출신의 황비와 친분이 있는 자였지. 궁으로 들어온 후, 적응이 필요하던 아셀리 전하를 맡았고, 황태녀로 책봉된 이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준남작 작위를 부여받았다.”
모든 조건이 일치했다. 결국 황후도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난 것이었다. 엘로니아는 그의 손을 붙잡아 이끌었다. 한시가 급했다. 약초에 관해서라면 잘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라면 분명 제대로 된 해결책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집으로 돌아가요. 님프를 만나봐야겠어요.”
그녀의 말에 카르벨은 잠시 멍하니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조금 미세하게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을 꽉, 마주 잡아 주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복잡한 황궁 복도를 빠져나왔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헤일튼 공작가의 시종이 고개를 숙이자, 카르벨은 마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그 틈에서 주변을 훑었으나, 과거와 달리 모두 새로운 얼굴이었다. *** 급하게 헤일튼 공작저로 돌아오자 처음 보는 마차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하얀 라티에 왕국의 인장이 박힌 마차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엘로니아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는 조금 곤혹스러운 투로 보고를 올렸다.
“리프리 저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사촌의 입장으로 방문한 건 아니겠군.”
“그러신 듯합니다.”
집사는 조용히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이전에 리프리는 마법을 사용해 간단하게 오고 갔다.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다 보니, 마차가 향하는 것 하나로도 온갖 추측이 돌아다니고는 했다. 이전부터 헤일튼 공작저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입장에서는 굳이 공적인 일로 방문하는 것처럼 마차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편의를 봐주었던 것이다. 엘로니아는 일전에 리프리가 보냈던 서신의 답신을 떠올렸다.
‘방문하겠다는 게 공적인 방문이었어?’
이전처럼 오겠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혹여 무슨 말이라도 잘못한 건가 싶어 엘로니아의 눈이 도르륵 굴러갔다. 카르벨은 까닥, 고개를 끄덕이며 집사에게 지시했다.
“엘로니아를 안내한 뒤에 곧 뵈러 가겠다고 전하게.”
“그게, 예비 마님도 함께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엘로니아를 저하께서 왜.”
“글쎄요.”
집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일전에 그에게 직접 리프리가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서인지 카르벨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알겠네. 접객실로 가지.”
그는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돌려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그대는 어떻게 하겠나. 원치 않는다면 그대는 동석하지 않아도 돼.”
“어, 그래도 돼요? 그래도 왕국에서 오신 분인데.”
“제국에서는 제국법을 따르는 것. 한낱 왕자가 미래의 헤일튼 공작 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 그것도 우리 저택에서.”
“그래도 오셨을 때는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 들어볼게요.”
조금 못마땅한 듯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엘로니아를 향한 감정이라기보다, 리프리와 마주쳐야 하는 현실 자체가 싫은 듯했다. 조금 아이다운 구석에 엘로니아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아니다 싶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게요. 그럼 되지 않을까요?”
“……무례하거나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 있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할 테니.”
“알았어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을 건넸다. 그런 그녀의 손등 위로 불쑥, 푸른 곱슬머리가 솟아났다. 불퉁한 시선이 뚫어져라 카르벨과 마주 잡은 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동생의 손을…….]
“…….”
[오라버니는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엘로니아는 아기라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손잡는 건 안 돼!]
닉스는 으르렁 이를 내세우며 소리쳤다. 아, 정말 아무도 정령이 하는 말을 듣지 못해 다행이었다. 접객실에 도착하자 리프리가 조금 침착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오셨습니까, 헤일튼 공, 데브니 영애.”
호칭도 공식적인 어투로 바뀌어 있었다. 확실히 이전처럼 그저 잠깐 들린 눈치는 아니었다. 덩달아 긴장되어 엘로니아는 얌전하게 인사를 건네며 소파에 앉았다. 카르벨이 차를 내오는 시녀를 두고 리프리에게 물었다.
“서신도 없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놀랐습니다만.”
“입궁하고 곧장 들렀습니다.”
리프리는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으로 평온하게 답했다.
‘황궁에서 곧장 오셨구나. 시차로 길이 엇갈린 건가.’
렌디먼 황제가 쓰러졌으니 외교차 방문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차가 도착한 것을 보면 그리 큰 텀을 두고 알현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이상하다. 그럼 스치듯이라도 마주쳤을 법한데.’
엘로니아의 머릿속에 의문이 들기 무섭게, 리프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셀리 전하를 뵙고 왔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올곧은 말이었다. 옆에 앉은 카르벨의 목에 긴장으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무슨 의도로 먼저 꺼내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리프리는 차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헤일튼 공에게 리프리 라티에 왕자로 질문을 드리러 왔습니다.”
“말씀하시죠.”
“헤일튼 공작가의 사람이 맞으십니까.”
리프리의 건조한 시선과 목소리에서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확인하러 온 거구나.’
아셀리와 비즈니스적으로 친분이 있던 리프리였다. 그녀의 성격으로 짐작하건대, 카르벨에게 했던 것처럼 리프리에게도 혈통집의 내용을 가지고 무어라 이간질을 했을 수도 있었다. 만약 여기서 카르벨이 솔직하게 답을 한다면.
‘리프리는 카르벨의 편에 서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친분이 두터웠다고 했다. 지금은 한 톨도 남지 않은 우정이지만, 이전부터 느꼈던 바로는 리프리는 친했던 만큼 카르벨에게 배신감도 큰 모양이었다. 아셀리가 어디까지 말을 했을까. 엘로니아는 빠르게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워낙 덤덤하고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리프리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기란 쉽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카르벨은 접객실의 멀찍이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곧 그의 지시를 알아들은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접객실을 나갔다. 텅 빈 공간. 그 안에서 리프리에 올곧은 질문이 다시금 울렸다.
“마지막으로 드리는 기회입니다, 헤일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