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간단한 방법2021.09.26.
‘아셀리는 렌디먼 폐하의 딸이 아니었던 거야.’
엘로니아는 조용히 놀란 숨을 삼켰다. 그간 계속 가지고 있던 의구심이 한 번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죽인 거야.’
그녀의 모든 행보가 마치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아셀리는 유독 빈민가의 사람들만 노려왔다. 황녀씩이나 되어서 굳이 큰 힘도 없을 이들을 왜 죽음까지 내몰았나 했더니.
‘황비 저하의 전남편을 알고 있는 사람. 그 사람들만 찾아 죽인 거야.’
물론 예외도 있었다. 베오는 여태 잘 살아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아셀리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연락을 주고받는 모양새였다.
‘은혜를…… 갚는 건가?’
은혜라니. 아셀리의 행보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노파의 말대로 어린 시절 많이 도와준 사람이라서일까. 불길 속에서도 아셀리를 도우려고 하던 로엘 황태자를 냉정하게 두고 가버리는 장면을 보아서인지, 영 납득이 되지 않았다. 순간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과거 속 서고에서 외치던 로엘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가질 수 없는 건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해, 아셀리. 그건 네 것이 아니야.’
혈통집을 두고 다투던 중 로엘 황태자가 타이르듯 하던 말이었다. 단순히 넘겼던 말이 이제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설마…… 황태자 전하께서 다 알고 계셨나?’
정령들이 보여준 과거에서 로엘 황태자는 아셀리와 단둘이 대화하기를 원했다. 아셀리가 그저 무시하니 다시 찾아와서 나오라고 종용할 만큼. 보초병과 마법사까지 물려야 할 일인가 했지만, 다 알고 있었다면 확실히 듣는 귀를 늘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럼 다 알면서 불길 속에서 아셀리 전하를 감싼 거란 말이야?’
얼마나 마음이 넓어야 가능한 일일까. 아니, 애초에 로엘 황태자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폐하께서 알게 된다면 적어도 사형이야.’
다른 것도 아니고 렌디먼 황제의 핏줄이라고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황가는 물론이고, 귀족들까지 기만했으니 단순히 사형으로 끝날 리 없을 터. 헤일튼 공작가 출신의 황후와 렌디먼 황제 사이에서 태어난 로엘 황태자가 굳이 감싸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동생으로 알고 지낸 세월이 길지 않은 두 사람이었다. 단순히 정 때문에 덮고 가기에는 너무 위험한 문제였다. 엘로니아는 복잡한 심경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노파가 있는 한, 이곳에서 섣부르게 확실하지 않은 말을 흘릴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과거의 모습보다 훨씬 주름이 늘어난 노파는 걱정스럽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디 아픈 거 아닌가? 아가씨 얼굴이 창백해.”
“아니에요, 카드는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주술에 걸렸을까 하는 걱정이라면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말아요. 나는 그런 대단한 능력까지 없거든.”
안심시키기 위해서인지 넉살 좋게 위로하는 노파의 말에 엘로니아는 애매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를 지켜보던 카르벨은 얼추 눈치를 챘는지, 엘로니아의 어깨를 감싸며 적당히 노파의 말을 끊어냈다.
“알려주어 고맙소. 크게 사례하지.”
“아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이곳에 찾아왔다는 사실은 평생 함구하는 게 자네에게도 좋을 듯싶군.”
카르벨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아셀리가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노파는 카르벨의 협박으로 알아들었는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좁다란 노파의 방에서 나와 마차에 앉기 무섭게 엘로니아는 두서없이 카르벨에게 말을 던졌다.
“아셀리 전하가 황제 폐하의 자식이 아닌 것 같아요!”
크게 놀라는 일이 없는 카르벨조차도 잠시 멈칫했다. 곧 납득했는지 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 앉았다.
“하, 그래놓고 나를 그런 식으로 협박했다니. 어이가 없군.”
“아셀리 전하께서 정령을 안 믿는다고 하셨죠?”
“예전에는 그러했지. 지금은 아니겠지만.”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라면, 과거를 보는 정령사가 달갑지 않을 만도 했다. 엘로니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마차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대체 로엘 전하께서 왜 아셀리 전하를 감싸셨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속이 좁아서 당장 폐하께 일러바쳤을 거 같은데.”
“…….”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벨의 얼굴이 조금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를 몰라 멀뚱하게 그를 보고 있자, 카르벨은 몸을 일으켜 마부와 연결된 뒤쪽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그의 신호에 마부가 힐끔 뒤를 돌았다.
“저택으로 돌아가지 말고, 황실로 가주게. 최대한 빨리.”
“예, 알겠습니다.”
곧장 마부는 헤일튼 공작저로 향하던 길을 틀었다. 엘로니아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멀뚱하게 그를 응시하며 물었다.
“황실에 볼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카르벨은 마부가 듣는지를 살피며 조용히 목소리를 낮췄다.
“엘로니아.”
“네. 듣고 있어요.”
“아셀리 전하가 로엘 황태자를 죽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유일한 계승권을 얻기 위해……?”
카르벨의 가라앉은 시선이 침착하게 그녀를 직시했다. 이 답이 아닌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아니면 황태자 전하께 렌디먼 폐하의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켜서……?”
“그럼 정령사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이라면.”
엘로니아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간 정령사가 가짜라고 믿었기에 안심하는 면이 있었을 터. 하지만 정령사가 이프리트를 입증하는 것을 본 아셀리라면.
“황위를…… 강제로 받으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 정령사는 헤일튼 공작저의 중심부에 있어 건드리기 쉽지 않으니, 그쪽을 손쓰는 편이 간단하지.”
워낙 편하게 지내서 느끼지 못했지만, 헤일튼 공작저의 경비는 꽤 삼엄한 편이었다. 펠런 백작저에는 손쉽게 들어오던 마법 상단주 키레일이 헤일튼 공작저만큼은 찾아오지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무엇보다 아셀리에게도 황궁이 훨씬 편한 장소일 것이다. 이를 깨닫기 무섭게 빠르게 달리는 마차가 느리게만 느껴졌다. 렌디먼 황제는 아무것도 모른 채 아셀리를 신뢰하고 있었다. 불이 났던 서고가 하나 남은 딸의 트라우마로 남지 않기를 바라던 황제의 모습을 떠올린 엘로니아는 조용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 ***
“아버지, 괜찮으세요?”
황제의 침실치고 검소한 장소에서 아셀리는 똑똑, 문을 두드렸다. 이미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를 렌디먼 황제는 상체를 일으켜 맞이했다.
“이런, 오지 않아도 괜찮다니까. 바쁜 네가 뭐 하러 찾아왔느냐.”
아셀리는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무릎까지 꿇고 앉아 그와 눈을 맞춘 그녀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데 어떻게 일을 해요.”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 잠깐 현기증이 돌았을 뿐이야. 며칠 푹 쉬면 괜찮아질 거다.”
렌디먼 황제는 따스한 눈길로 그의 하나 남은 딸을 응시했다. 로엘 황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부른 무희를 쏙 닮은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웠으나 그뿐이었던. 그래서 크게 인상에 남지 않았던 여자였다. 하지만 술에 잔뜩 취해 눈을 뜨니, 그의 옆에는 그 무희가 있었다.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증언했다.
‘폐하께서 직접 무희와 함께 침소로 향하셨습니다.’
스스로 믿기지 않아 재차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렌디먼 황제는 하나뿐인 황후를 아꼈다. 정략혼이었고, 사랑이라기엔 신의와 책임감이 더 앞서는 관계였으나 관계를 흔들 수 있는 여지가 되지는 못했다. 몸이 약한 황후는 참석하지 못한 연회였다. 로엘을 낳은 직후, 시녀들이 붙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좌절한 그를 두고 무희가 말했다.
‘폐하, 아무 일도 있지 않았습니다.’
‘사실이더냐. 내 책임을 질 터이니 거짓 없이 고하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희의 단호한 말을 믿었다. 하지만 몇 년 뒤, 아셀리를 안고 들어온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황비의 자리까지 차지했다. 이미 황궁까지 들어왔을 때, 그녀의 몸은 많이 망가져 있었다. 혼자 아셀리를 키워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찾아왔다며 눈물로 호소하던 황비를 그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거둬들였다. 그게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이라고 생각했기에. 처음에는 정이 가지 않던 아셀리도 착하고 바르게 지내는 모습을 보니, 점차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아들부터 황후와 황비까지 일찍이 떠나보낸 처지가 된 터라 그는 마음이 씁쓸했다.
“내 너를 두고 갈 리 있겠느냐. 뒤를 이을 때까지 건강히 지낼 터이니 걱정 말거라.”
“당분간 업무를 대리로 맡고 있을게요. 제 걱정은 마시고 빠르게 털고 일어나세요.”
아셀리의 나른한 음성에 그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마부를 독촉한 덕인지 예정보다 일찍 황궁에 도착했다. 하지만 시녀가 하는 답변이 단호했다.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아 당분간 알현을 받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벌써 손을 썼구나. 엘로니아는 내색하지 않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궁 주치의부터 시녀와 하녀들까지 어수선한 분위기가 그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듯이 보였다. 카르벨은 모른 척 걱정스럽게 황궁 시녀에게 되물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십니까.”
“추후 전달드릴 이야기가 있다면, 보좌관께서 직접 서신을 전할 터이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공작님.”
내부의 일을 발설할 수 없으니 적당히 하고 돌아가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원로회가 열리지 않은 것을 보면, 목숨이 위중한 상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잠시만요, 카르벨 공!”
복도 뒤편에서 빠른 속도로 황제의 보좌관이 뛰어오고 있었다. 그가 다급해 보이자, 덩달아 시종과 의사들이 긴장했다. 하지만 보좌관은 곧장 다가와 시녀에게 짧게 눈짓으로 양해를 구하며 말했다.
“폐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그러한데.”
“들어오십시오. 폐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말을 끝낸 보좌관은 곧이어 엘로니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정령사님께서도 함께하시면 좋으실 듯합니다.”
본디 집무실이나 접객실을 이용해야 하지만, 렌디먼 황제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침소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검소하고 소탈한 침소를 보며 엘로니아는 표정을 관리했다.
“에스피디 제국의 한 분이신 폐하를 뵙습니다.”
카르벨의 인사에 맞춰 엘로니아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다행스럽게도 황제의 안색이 그 정도로 안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겸연쩍게 웃으며 답했다.
“늙은이가 쓰러졌다고 다들 찾아오니 좋구먼. 한 번쯤은 이런 일도 있는 게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카르벨은 미소를 띠고 있으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듯 딱딱하게 답했다. 렌디먼 황제는 긴장이라도 풀어주려는지 평소답지 않게 능글맞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 카르벨 공이 혼인식 치르는 건 보고 가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