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The king2021.09.23.
“와, 각하. 오늘 기분 좋으신가 봅니다. 컨디션이 장난 아니신데요!”
데드는 땀을 닦아내며 곤란한 듯 큰 소리로 외쳤다. 평소 워낙 무식하게 체력이 좋고 호승심이 강한 그와의 대련을 귀찮아하던 카르벨이었다. 오늘은 날벼락이라도 맞았는지, 데드가 청하는 대련을 흔쾌히 승낙해주더니 아주 가뿐하게 그를 이겨버렸다. 데드는 목검을 바닥에 세워 잔뜩 긴장한 몸을 기대며 되물었다.
“연무장에 늦는 일도 없으셨잖아요. 뭡니까? 이거 분명 뭐 있는 거죠?”
그러나 정작 그의 주변에서 대련을 구경하던 기사들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피했다. 카르벨은 들고 있던 목검을 그에게 가볍게 던져 건네며 답했다.
“데드 경은 그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들어.”
“예? 뭐가요?”
“바로 지금 그런 점. 앞으로도 쭉 그렇게 지내줘. 그래야 엘로니아가 편안하게 생각하지.”
턱, 던져진 목검을 넘겨 받은 데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의문에 답을 해주지 않았다. 카르벨은 시간을 확인했다. 환복을 하고, 집무실로 가면 엘로니아가 딱 맞춰서 올 시간이었다. 그는 뒤에서 따라오던 그레이터에게 조용히 말했다.
“엘로니아 방으로 그 좋아하던 케이크를 주문해서 보내.”
“집무실로 준비하라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데브니 영애께서도…….”
우뚝, 멈춰선 카르벨이 조용히 뒤를 돌았다. 뒤따라오며 말을 이어가던 그레이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크흠, 가볍게 기침을 뱉은 뒤 곤란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을 정정했다.
“예비 마님께서도 어차피 집무실로 오실 테니까요.”
매번 준비했었던 터라 이상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따로 시녀에게 맡기고, 케이크 한 홀은 방으로 보내. 아, 퍼즐 중에 괜찮은 게 있다면 그것도 같이.”
“퍼즐이요? 갑자기 이게 다 무엇인지…….”
“뇌물.”
어리둥절한 그레이터를 두고 카르벨은 미련 없이 환복을 위해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곧장 집무실로 향하던 그는 익숙한 뒷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망설이는 듯 느릿느릿 걷는 주황빛 머리카락과 잘 차려입은 드레스. 바로 코앞의 집무실을 놔두고 최대한 늦게 가겠다는 의지가 가득해 보였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카르벨은 슬쩍, 어깨 너머로 상체를 숙이며 고개를 내밀었다.
“왜 이렇게 느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우악!”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엘로니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크게 튀어 오른 어깨를 커다란 손이 가볍게 감싸 쥐었다. 그녀를 곧게 세워준 카르벨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일찍 왔네. 조금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서고 재, 재건해야죠! 그쵸! 요 며칠 좀 설렁설렁 일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요!”
“응, 그래야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카르벨의 입매는 길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만 보면 저도 모르게 어젯밤이 떠올랐다. 연거푸 고백을 하던 그의 조금 다급한 목소리와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답을 해야 하는 건가?’
막상 무어라 그에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망설이는 엘로니아를 두고, 카르벨은 독촉하지 않았다. 그저 집무실까지 자연스럽게 안내를 해줄 뿐이었다. 그를 따라 소파에 앉으면서도 엘로니아는 혼란스러웠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해……?’
자신도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판을 깔아두고 물어도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을 만큼. 다행스럽게도 카르벨은 다른 말 없이 서류를 내밀 뿐이었다.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그는 평소처럼 태연하게 답했다.
“그 신문을 팔던 베오라는 남자. 그레이터에게 조사를 시켰지.”
기구한 그의 삶이 종이 한 장으로 축약되어 있었다. 베오가 신문을 팔아 번 돈을 모두 술과 도박에 탕진하는 아버지, 집을 나간 어머니. 그 외에는 이전에 베오가 직접 이야기했던 대로, 어린 시절에는 죽은 아이들 중 친했던 아이들이 기록돼 있었다. 그중 조금 알아볼 만한 내용이 있었다면.
“베오의 아버지도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군요.”
“그래. 그리고 그를 아는 여자가 있더군. 혹시 기억하나. 빈민가에서 나온 노파.”
영 감이 잡히지 않아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카르벨은 가볍게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답했다.
“일찍이 빈민가에서 나와 점쟁이로 살던 이가 살아 있어. 오늘은 그쪽으로 가볼까 해.”
“아, 예전에 보고로 들은 것 같아요.”
“그때는 그대가 없었으니까. 혹시 모르지. 가면 정령이 또 다른 무언가를 보여줄지.”
*** 묘한 향냄새가 가득한 점집에는 연금술도 아니고, 마법 서식도 아닌 기묘한 종이들이 벽에 잔뜩 붙어 있었다. 바닥에 깔린 카펫도 오랫동안 세탁을 하지 않았는지, 꼬질꼬질 때가 타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죽이 그 위에 한 겹 더 덮여 있었는데, 눈인지 무늬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가죽을 피해 엘로니아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자, 노파는 미안한 듯 말했다.
“귀한 분들에게 좀 누추하지만, 늙은이가 지내는 게 이래서 말이죠. 미안해서 어쩌나.”
“아,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빠르게 부정했으나, 노파는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끌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베오. 이 녀석이 아직도 살아 있었구먼요.”
“이쪽도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터라. 이렇게 말을 하는 걸 보면 노인께서 아는 사람인가 보지.”
“아비가 하도 애를 못살게 굴어 기억하죠. 그래도 애가 어찌나 착한지.”
노파는 그리운 듯 베오라는 이름의 글자를 주름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럼 베오와 친하게 지내던 그 아이는 어찌 되었나요?”
“릴리라는 아이인가.”
“이름이 기억이 안 나는데. 어미가 제법 예뻐서 빈민가에서 눈독 들이는 놈팡이들이 많았더랬죠.”
카르벨은 서류에 있던 릴리의 초상화를 다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이 아이일세.”
“아닙니다. 기억에는 아이가 금발에 자주색 눈동자를 지녔던 것 같은데.”
그녀의 말과 동시에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아셀리. 금발에 자주색 눈동자. 어린 시절, 평민으로 자랐다가 뒤늦게 황궁에 들어온 한 사람. 그리고 마차 사고를 사주한 사람.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카르벨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는지, 조용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아주며 되물었다.
“그 아이와 여기 죽은 아이들과 무슨 관계인지 기억하나.”
“으음, 빈민가의 아이들은 워낙 두들겨 맞는 일이 흔합니다. 베오가 그중 유독 한 아이와 좀 친분이 두터웠는데, 대신 맞아서 다리도 다치고 그랬던 일이 잦았던 기억이 나네요.”
“혹시 죽은 이들과 어떤 관계인지 아나.”
“잘 모르겠네요. 그 아이는 베오만 따랐던 터라.”
노파는 기억에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녀는 무언가 떠올랐는지 서류를 팔락, 넘기며 말했다.
“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는 없네요. 그래도 어미가 무희로 돈은 꽤 벌었으니 빈민가를 일찍이 떠났으려나.”
무희라는 말에 엘로니아는 확신했다. 아셀리다. 황궁까지 들어올 수 있는 무희는 많지 않았다. 그만큼 뛰어난 실력과 외모를 겸비해야지만 가능했다. 황비는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 정도면 적게 벌지는 않았을 텐데……?’
엘로니아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타운하우스에 별장을 짓고 사는 건 힘들더라도, 빈민가가 아닌 다른 곳에 지내기에는 충분할 만큼의 벌이였다. 엘로니아가 의상실에서 일을 하던 때, 가끔 무희들이 옷을 맞추러 오고는 했다. 따로 옷을 맞출 만큼의 재력은 된다는 뜻이었다. 엘로니아는 그녀에게 곧장 물었다.
“혹시 그 아이가 살던 곳을 기억하시나요?”
“시간이 오래 지나서 아마 없을 텐데…….”
“그, 그럼 아무거나 괜찮으니까 당시 그 무희나 딸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나 그런 건 없나요?”
잠깐 고민을 하던 노파는 테이블 위에 널린 카드를 톡톡, 검지로 건드리며 말했다.
“빈민가에 살 적에 제게 점을 본 적은 있었죠. 질문이 뭐였더라.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도 안 나는구먼요.”
“그거면 돼요.”
엘로니아가 손을 내밀자, 노파는 카드를 모아 내밀었다.
‘이프리트.’
가볍게 속으로 이름을 부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발밑으로 검은 연기가 모여들었다. 이프리트를 대신해 살라만더들이 나온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카르벨이 곁에 있고, 노파까지 있으니 본인이 직접 나오기는 좀 꺼려진 모양이었다. 동시에 곧 눈앞이 까맣게 변하고, 한창 젊은 황비와 노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파의 이상한 방보다 훨씬 좁고, 당장이라도 기울어질 것 같은 장소. 여전히 벽에 이상한 종이들이 잔뜩 붙어 있었지만, 지금보다 깨끗했다. 그런 곳에 황비는 익숙한 듯 앉아 있었다. 연습을 하다 다치기라도 한 것인지, 팔꿈치에 자잘한 멍과 긁힌 상처가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노파가 혀를 차며 물었다.
“얼굴이 또 왜 그 모양이야.”
“남편이 자꾸 찾아와서 돈을 달래요.”
남편이라고? 렌디먼 황제가 빈민가까지 손수 찾아갔을 리는 없다. 돈을 뜯어 갔을 확률은 더욱 희박했다.
‘황비님께서 재혼이셨나?’
그런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노파는 익숙한 듯 카드를 섞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놈팡이에 걸려서는. 그래서, 그놈 떨어지나 봐줘?”
“아뇨. 그거 말고…….”
황비는 머뭇거렸다. 고작 점을 보는 일에 신중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 상이하게 비장하면서도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질문은 조금 의외였다.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해봐도 될까요.”
“도박은 하는 게 아니야. 돈도 모자라서 이제 목숨도 걸어?”
“그냥 이것만 봐주세요.”
노파는 여전히 말리고 싶은 눈치였으나, 고집스러운 시선에 익숙하게 카드를 깔았다. 곧 카드가 뽑히고, 노파는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왕 카드가 나왔네. 네 인생이 달라질 기회가 올 거야.”
“…….”
“다만 거꾸로 걸린 사내 카드를 보아하니, 그 일로 정말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겠어. 보아하니 누군가를 해치거나, 속여야 얻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가능은 하다는 거죠.”
“……일단 카드는 그래. 하지만 도박은…….”
노파의 답이 끝나기도 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면 돼요. 각오가 필요했거든요.”
미련 없이 뒤를 도는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그런 황비의 흐린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점점 현실감이 돌아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노파가 멀뚱하니 그녀를 보고 있었다. 검은 연기로 다가왔던 살라만더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