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마음의 준비2021.09.16.
“아, 네. 맞아요.”
알고 있었구나. 하긴, 먼저 보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굳이 입까지 다물었으니 알아챌 법도 했다. 그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니 한결 편안했다. 긴장으로 딱딱했던 그녀의 얼굴이 점차 풀려갔다. 엘로니아는 적당히 미소를 걸친 채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했는데. 다행이에요.”
“……그래.”
“카르벨이 지금 바쁘고 힘든 시기인 건 알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약속했으니 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어.”
쉽사리 본론이 나오지 않아 길어지는 말에 찻잔을 쥔 카르벨의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아닌 척해도 힘들 터. 이런 소식을 전하는 그녀도 편치 않았다. 자꾸만 목이 바짝 타는 기분에 그녀가 차를 한 입 머금었을 때.
“약속은 지킬 테니 그리 돌려 말하지 않아도 돼.”
카르벨이 혈통집과 관련해서 무슨 약속을 했던가? 그녀가 알아 오겠다는 일방적인 말만 했을 뿐. 그가 따로 무언가를 내건 적은 없었다. 혹여 무언가를 놓쳤나 싶은 엘로니아의 머릿속이 잠시 바빠졌다. 그런 그녀를 두고 카르벨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알고는 있는데,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군. 조금만 정리할 시간을 주겠어.”
“아, 그 정도는 당연하죠.”
서고 재건 일정에 관한 이야기인가? 아무리 그녀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마음 상한 이를 억지로 끌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별 의심 없이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카르벨이 쓰게 웃으며 답했다.
“이후는 어떻게, 예정이 있나.”
“알아볼 게 있는데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에요. 리프리 저하도 무엇 때문인지 조만간 에스피디로 오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리프리라는 말에 그의 눈매가 일순 날카롭게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참는 듯 잠시 숨을 삼킨 그가 다시금 말을 뱉어냈다.
“리프리는…… 그대에게 너무 모자라. 비록 가주가 무너진 가문이라지만, 데브니 가는 정령사 가문이다.”
“……네?”
“내가 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단호히 내쳤던 사람이야. 사람을 혈통으로 분류하는 사람보다, 그대를 믿어주는 사람을 만나.”
그가 하는 말은 어딘가 이상했다. 리프리가 모자랄 게 무엇이란 말인가. 무려 라티에 왕국의 왕족이었다. 거기에 마법으로도 제법 실력을 인정받고 있으니 어디 가서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정령사 가문이라고 한들, 왕족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그냥 의중만 알아보겠다는 건데, 믿음이 왜 필요한 거야?’
아셀리도 믿음을 가지고 만났던가. 곱씹을수록 말이 이상했다.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한 엘로니아는 한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저지했다.
“잠깐, 잠깐만요. 카르벨.”
생각이 뒤죽박죽 엉키는 덕에 잠시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얼마간 기다리던 그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실망했나. 치졸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카르벨. 지금 무슨 얘기 하는 거예요?”
“그대와 리프리를 반대하는 이야기.”
장난인 줄 알았더니,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엘로니아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저으며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쩌다 혈통집 이야기가 여기로 샌 거죠?”
“혈통집을 봤으니 그대가 파혼을 해달라는 것 아닌가.”
“파혼이요? 생각도 안 하고 있었어요!”
당장에 할 일이 산더미인데 지금 파혼하면 누구 좋으라고. 엘로니아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듯 어깨를 잘게 떨며 질린 목소리로 답했다.
“파혼하면 아셀리 전하는 또 혈통집을 핑계로 카르벨에게 협박할 게 뻔하잖아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예전이야 증거도 없이 왜 저러나 싶었지만, 막상 직접 혈통집을 제 눈으로 보고 나니 훨씬 크게 체감되었다. 무엇보다도 거짓이 아니기에, 정말 언젠가 카르벨이 그녀의 말대로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를 생각해서 혈통집에 대해 순순히 말을 못 하기도 했으나, 그 내면에는 아셀리에 대한 아슬아슬한 짜증이 공존했다. 향수부터 은근히 주변을 이용하는 영악함까지 지닌 사람이 아니던가. 아셀리를 떠올리니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상대가 차라리 아셀리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는 카르벨이 적당히 친절하게 구니까 안심이 되는 면이 있었다.
‘카르벨의 실제 성격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그 예외에서 아셀리는 벗어나 있었다. 그게 비록 조금 날카로운 반감이더라도 본래 성격이 드러나는 건 마찬가지 아니던가. 거기다 그를 흔들 수 있는 키를 그녀가 쥐고 있다니. 우습게도 그래서 싫었다. 카르벨이 닉스에 대해 이런저런 언급을 할 때도 그저 닉스를 보며 질투하는구나, 하고 넘겼는데 본인이 딱 그 모습이었다.
‘그래서 닉스를 제일 처음에 만난 건가. 어른스럽지 못하네, 나.’
정령사라는 그녀의 존재가 만천하에 공공연하게 밝혀진 이상, 아셀리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엘로니아는 조금 다급해졌다. 설마하니 그가 먼저 파혼을 생각하고 얘기를 꺼낼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카르벨도 그래요. 그런 거에 흔들리지 마요. 적자가 아니면 어때요. 방계 친인척들 중에 카르벨보다 헤일튼가의 검술로 뛰어난 사람이 어디……. 헉.”
엘로니아는 빠르게 제 입을 다물었다.
‘이,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조바심이 결국 일을 치렀다. 고개를 푹 숙인 엘로니아는 눈을 꽉 감고 자신을 질책했다.
‘멍청이, 바보. 아무리 신경질이 나도 그렇지, 이렇게 말해버리면 어떡해!’
기껏 그가 좋아한다던 조용한 공간을 만들어 놓으면 무얼 하는가. 희한하게도 그와 대화를 할 때면 엘로니아는 차분하지 못했다. 조용했다.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카르벨은 답이 없었다. 죄인은 말이 없는 법. 그녀는 차마 먼저 이 침묵을 깰 수 없어 초조하게 제 손등만 바라보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카르벨의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엘로니아.”
“…….”
“엘로니아, 괜찮아.”
무언가 꾹 눌러 담는 듯한 음성이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깊은 슬픔에 빠진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덜컹, 그가 일어나는지 테이블이 작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엘로니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조용히 답했다.
“미안해요. 이렇게 말할 게 아니었는데. 많이 상심했어요?”
“괜찮다니까.”
“제가, 이프리트랑 혈통집을 봤는데, 카르벨이 입양아라고 적혀져 있었어요. 어떻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건가.”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의 음성이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했다. 의문이 들기 전, 카르벨의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말했다.
“눈 좀 떠줘, 엘로니아.”
화가 났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달콤한 목소리였다. 귀에 또렷하게 박히는 낮은 음성. 머뭇거리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자, 눈앞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녀의 숙인 얼굴과 시선을 맞추고 있던 그가 보였다.
“이제야 보네.”
“카, 카르벨.”
“그래서 말을 못 하고 있던 건가.”
“미안해요. 빨리 전해주고 싶었지만, 카르벨이 힘들어할까 봐…….”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어. 단지, 확인이 필요했을 뿐.”
그가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적당히 웃는 미소로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엘로니아는 알 수 있었다. 얼마나 그가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의 그림자를 쫓아다녔는지 알아서 조금 눈물이 났다. 평생 믿던 바닥이 흔들릴 때의 불안감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메티카 감옥에서 부모에게 버려졌을 때. 닉스라도 없었다면 세상에 홀로 뚝 떨어진 기분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녀의 코끝이 찡해지자, 카르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 며칠 마음 좀 썼겠군. 그대는 너무 상냥해서 탈이야. 조금 이기적이어도 되잖아.”
“그래도 카르벨이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름 준비도 했다고요.”
“누가 그래, 내가 조용한 곳을 좋아한다고.”
리프리의 이름이 목구멍 끝까지 나왔지만, 그녀도 눈치는 있었다. 이럴 때 그의 사촌 이름은 썩 적절치 못했다. 엘로니아가 입을 다물자, 그는 알겠다는 투로 답했다.
“리프리겠군. 그건 그냥 주변에 잔챙이들 달라붙는 게 싫어 댄 핑계였다.”
“그럼 조용한 거 싫어하세요?”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던 카르벨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오늘부터는 조금 좋아질 듯해. 그대가 날 위해 신경 썼다니까.”
엘로니아는 속으로 리프리를 욕했다. 물론 그가 아는 카르벨의 모습을 알려준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틀렸으니 말이다. 그녀가 입을 삐죽이니 카르벨이 고개를 바짝 붙어오며 물었다.
“그래서, 파혼은 아니라는 거지.”
“네.”
“아셀리 때문인가. 내가 그 여자 덕을 보는 날이 다 오는군.”
“덕이라고 하지 마요.”
불퉁한 목소리로 엘로니아가 중얼거리자, 카르벨의 눈이 한층 아름답게 휘었다.
“그냥 날 버리고 가도 되잖아. 왜 남은 거야.”
“서, 서고 재건도 해야 하고……. 아직 독립할 저택도 못 알아봤고요.”
“응.”
천천히 그가 다가왔다. 목소리는 더 작아졌으나, 숨결에 섞여 들리는 음성은 또렷했다. 귀 뒤로 머릴 넘긴 손이 가벼이 그녀의 볼을 쓸었다. 느리게 닿는 곳마다 신경이 쏠리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새빨간 얼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카르벨은 꼭 그녀를 달래는 듯이 다정히 물었다.
“그리고?”
“며칠 전까지 연회에서 사이좋은 척을 했던 데다가…….”
그가 더 말해 보라는 듯 그녀를 보고 있었다. 숨을 삼키듯 그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두 눈에 오롯하게 담긴 자신을 보고 나니, 엘로니아는 솔직하게 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셀리 전하랑 계신 게 싫어요.”
“그걸로 충분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벨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숨결이 코앞에 닿았다. 빠르게 떨어진 온기에 엘로니아는 숨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보는 카르벨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환했다. 그녀가 농담처럼 보고 싶다고 했던 어린 시절의 순수한 그를 똑 닮은 미소였다.
“내가 들었던 어느 말보다 가장 기뻐.”
속삭이듯 말을 건넨 그가 다시금 고개를 틀어 조금 더 깊숙하게 입을 맞췄다. 조용한 공기가 점점 열기를 품은 듯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안쓰럽다는 핑계로 그를 조금 더 알아가고 싶었다는 사실을. 그가 꽤 엘로니아의 일상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꽉 다물린 그녀의 입술 선을 따라 노크를 하듯 짧게 맞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엘로니아가 점차 뒤로 밀려났다. 숨을 쉴 수 없어 그의 어깨를 붙잡은 채, 다급히 호흡했다. 그 틈을 카르벨은 놓치지 않았다. 굳은살로 거친 그의 손바닥 피부결과 달리, 그녀를 대하는 동작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볼에서 목덜미를 따라 내려온 그는 한 줌에 쥐듯 엘로니아의 허리를 붙잡았다. 맞닿았던 입술이 떨어졌다.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카르벨은 열띤 눈으로 응시했다. 번들거리는 그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싫으면 밀어내. 지금이 기회야.”
엘로니아는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