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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혈통집의 한 장 (80/234)

80. 혈통집의 한 장2021.09.05.

좁은 건물 사이로 들어가기 전, 두 사람은 주변을 슬그머니 훑었다. 멀리 전대 헤일튼 공작이 기사들을 훈련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미처 연무장을 빠져나온 두 소년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에 로엘 황태자는 걱정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빠져도 되는 건가? 헤일튼 공이 화가 나면 어떡해.”

“괜찮습니다, 전하. 아버지도 전하께서 무관보다는 문관이 어울리신다는 걸 아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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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난기 어린 미소로 답을 건넨 카르벨은 좁은 건물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태연히 말을 이었다.

“가끔 보면 아버지가 저보다 전하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고요.”

“그럴 리가. 카르벨이 워낙 검술에 재능이 있으니 더 열정적으로 가르치시는 걸 거야.”

멋쩍게 웃는 모습이 순수했다. 건물 틈으로 들어가는 둘의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가장 걱정했던 로엘 황태자는 신기한 듯 카르벨의 뒤에서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물었다.

“정말 여기로 나가면 서고가 나오는 건가?”

“예, 확실합니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어. 카르벨은 어떻게 이런 곳까지 알고 있던 거야.”

“저야 전하와 달리 워낙 어릴 때부터 연무장을 들락날락했으니까요.”

카르벨은 본인도 기억이 안 나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길이라. 우연히 알아낸 것 같아요.”

곧 어두운 건물 틈을 지나고, 지금은 불에 타 사라져서 볼 수 없는 화려한 황실 서고의 외관이 나타났다. 이프리트처럼 느껴지는 감각은 없었지만, 퍽 아름다운 건물이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로엘 황태자의 빛나는 눈동자에서 그가 서고를 아꼈다는 것 역시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을 끝으로 과거는 멀어졌다. 동시에 엘로니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과거와 대비가 될 정도로 초라한 서고가 눈앞에 있었다. 방금 본 소년 시절의 카르벨과 달리 건장한 남자가 된 그가 과거와 똑같이 소개했다.

“보고 싶은 만큼 봐.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다 보니 주변에 사람이 없어 한산했다.

‘하긴. 훔쳐 갈 것조차 없이 내부가 텅 비어 있으니까.’

보초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로니아에게는 다행인 셈이었다. 카르벨은 슬쩍 고개를 들어 연무장이 있는 방향을 살폈다. 유독 큰 데드의 웃음소리가 미약하게나마 들리는 것을 보면, 예상대로 그들이 서고까지 온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적당하게 선이 도드라지는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어릴 때 서고에 자주 오셨나 봐요.”

“어느 정도는. 로엘 전하께서 좋아하셨거든. 나이대도 그렇고,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 고모님이다 보니 자주 만났지.”

그러고 보면 이프리트가 숨어 있던 책도 끝이 그을려 있었다. 아무래도 서고에서 타고 남은 것들 중 하나를 가져온 모양이었다. 과거 속의 카르벨은 지금보다 구김이 없어 보였다. 로엘 황태자에게 정중하기는 해도, 제법 귀여운 면이 남아 있다고 할까. 그 모습이 조금 인상적이었다.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져서인지 몰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좀 보고 싶기도…….’

퍼뜩 떠오른 생각에 엘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누가 들을 수도 없는 속마음인데도 괜히 눈치가 보였다.

“가도 괜찮을 듯하군.”

그런 그녀의 상태를 모르는 카르벨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서고가 있는 건물로 그녀를 안내했다. 의식을 하니 묘하게 뻣뻣한 걸음을 느낀 걸까. 카르벨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며 달래듯 말했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내가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고, 고마워요!”

“이프리트도 내가 없는 쪽이 더 낫잖아.”

“그, 그렇죠. 맞아요! 이제 저보다 정령을 더 잘 아시겠어요!”

이게 무슨 헛소리야! 엘로니아는 멍청한 말에 제 입을 합 다물었다.

‘다음에 키레일을 만나면 뱉은 말도 주워 담을 수 있는 마도구를 꼭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하지만 카르벨은 그저 그녀의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적당한 미소로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었다.

“아직 한참 멀었지.”

역시 이 미소와는 조금 다르다. 그녀의 반응을 예민하게 눈치챈 카르벨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부탁할 거라도 있는 건가.”

“서고에 들어가는 게 전부인데요? 다른 생각 안 했어요!”

“흠…….”

힘찬 대답에도 카르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침음도 잠시. 둘 사이에 고요함이 흘렀다. 자수해서 광명을 찾는 쪽이 더 나을 듯했다. 엘로니아는 본인이 죽어도 범법을 저지르며 살 만큼 대범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다.

“살라만더들이 로엘 전하와 카르벨이 이곳을 지나가는 걸 보여줬거든요…….”

“아,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잊고 있었어. 워낙 옛날 일이라.”

“숨겼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엘로니아는 하릴없이 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카르벨은 그런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상체를 기울여가며 물었다.

“잘 안 들려, 엘로니아.”

“그……. 웃는……. 게…….”

“뭐라고?”

카르벨의 고급스러운 구두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후다닥 말을 이었다.

“우, 웃는 게 좀 귀엽길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다예요!”

팟, 고개를 들자 조금 놀란 듯 동그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는 카르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예상도 못 한 답이었는지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빤히 바라보는 잿빛 눈동자를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어 그녀의 시선이 다시 바닥으로 향했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줘!’

침묵이 더 창피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나……. 아이들에게 약한가 봐.’

안 그래도 이프리트가 닉스에게 어린 외형이 더 친근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조언했다던데. 자신도 모르는 약점을 닉스와 정령들은 이미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거다.

‘그 정도로 순진한 모습은 본 적이 없으니까.’

못된 호기심일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다독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웃기는지 몰라서 그를 가만히 노려보자, 시선을 느낀 카르벨이 큼, 목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여전히 입가에는 미세한 즐거움이 남아 있었다.

“매일 웃고 있는데, 그건 조금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달랐다고요! 지금처럼 능글맞지도 않고, 얼마나 귀여웠는데!”

“그때 어떻게 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습은 해보지.”

“됐어요. 지금은 타락해서 그때와 같은 느낌은 낼 수 없어요.”

휙. 몸을 돌린 엘로니아는 부끄러움으로 발개진 얼굴을 모른 척하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르벨이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빠른 듯했다. 그는 기쁜 듯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힌트를 줘. 정말 감도 안 잡히거든.”

“그럼 거울 봐요. 보다 보면 지금보다 훨씬 잘생겨 보일 것 같은 표정도 있을 테니까.”

아, 또 실수했다. 깨달은 엘로니아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창피함에 붉게 달아오른 두 뺨은 덤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벨의 두 눈매가 활짝 휘었다.

“잘생겨 보인다니. 정말 과거의 나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미치겠군.”

역시 그와 말싸움으로는 이길 재간이 없다. 엘로니아는 입을 꾹 다문 채 마구잡이로 달려 서고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니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정작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온 카르벨은 호흡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달칵, 그가 문을 열어주며 미련이 남은 듯 나직하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 알겠지, 엘로니아?”

“걱정하지 마요. 사람도 없는걸요.”

영 마뜩잖은 듯 그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매서운 눈을 흘기고는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탁, 가볍게 문이 닫혔다. 남겨진 엘로니아가 크게 심호흡을 하자 조금 묵은 듯한 서늘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제야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덩달아 다시금 잊고 있던 마차 사고의 무게가 다시금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곧게 정면을 보았다. 아셀리가 허가를 내주지 않았을 때는 다 이유가 있을 터. 엘로니아는 로엘 황태자가 죽던 밤. 화재 서고에서 혈통집을 손에 넣지 못해 기웃거리던 그녀를 떠올렸다. 로엘 황태자를 두고도 그녀는 혈통집에 더 미련이 남아 보였다.

‘분명 뭘 보기는 한 거야.’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게 정령을 불렀다.

“이프리트.”

스르륵, 문틈에서 검은 연기가 스며들 듯 새어 나왔다.

[부르셨습니까.]

그 안에서 어김없이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소도 있겠다, 일어난 시기도 알겠다. 엘로니아는 그에게 구체적으로 부탁했다.

“화재가 일어나던 날. 아셀리 전하가 보던 혈통집을 보고 싶어. 가능할까?”

[해당 당사자가 이곳에서 읽었던 부분만 가능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정령사여.]

“응, 괜찮아.”

엘로니아의 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고개를 숙였다. 검은 연기가 다시 엘로니아의 시야를 가렸다. 곧 건물 틈을 지나갈 적보다 성숙해진 로엘 황태자의 음성이 들렸다. 이전보다 단호하고, 화가 나 있었다.

“아셀리. 할 말 없어?”

“그게 뭔데? 오라버니가 그렇게 설명하면 내가 어떻게 알겠어.”

어린 아셀리는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에게 로엘 황태자가 답했다.

“혈통집.”

“……그게 왜 오라버니의 손에 있는 거야?”

그 한마디로 아셀리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앙칼진 목소리에 로엘 황태자는 단호하게 답했다.

“어머니께서 보여주셨어.”

“황후 폐하께서? 하. 이런 식으로 천민과 혈통을 나누시겠다?”

거칠게 그에게 다가간 아셀리는 팔을 뻗어 혈통집을 빼앗았다. 처음부터 보여줄 생각이었는지, 로엘 황태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순순히 넘겼다. 아셀리가 장을 넘길 때, 엘로니아는 그녀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갔다. 이미 지난 과거인지라 아무도 엘로니아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꼭 유령이 된 기분이었다.

‘정령들도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묘한 기분을 애써 넘긴 채 엘로니아는 어깨 너머로 아셀리가 보던 혈통집을 보았다. 그 안에는 빼곡하게 각 가문의 직계와 방계. 사생아까지 적혀 있었다.

‘와, 에루실리아 자작가는 사생아가 작위를 이어받았구나.’

엘로니아도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그 안에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셀리의 손이 <헤일튼 공작가>라고 적힌 페이지에서 멈췄다. 직계 출신의 전대 헤일튼 공작과 왕국의 아름다운 왕녀였던 공작 부인. 출가외인이 되어 헤일튼이라는 성을 쓰지는 않지만, 엄연히 직계 중 하나였던 황후. 그리고.

“입양?”

아셀리는 의외라는 듯이 그 두 글자를 읽어냈다. 또렷하게 들리는 그녀의 음성만큼이나, 혈통집에는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카르벨 헤일튼. 빈민가 출신. 1살에 양자로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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