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잔상2021.08.29.
한참 어린 시절과 다 커서 성인이 된 아이의 이목구비는 세월의 흐름을 제외하고는 아주 흡사했다. 그녀의 기억이 틀린 게 아니라면 말이다. 엘로니아는 곧장 상단주에게 물었다.
“혹시 그 직원이요. 지금은 뭘 하는지 기억하세요?”
“예? 그 애는 뭐 그만두고 어디 갔는지는 잘…….”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는 당황한 듯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을 이었다.
“성실하기는 해서 어디든 취직하기는 했을 겁니다. 어리바리한 놈이 착해 빠져서, 원. 어디서 사기나 안 당할는지.”
“어떻게 고용하신 거예요?”
“예전부터 알고 지낸 하녀가 있는데, 불쌍한 애가 인성은 좋다며 소개해줬습니다. 빈민가에서 신문팔이를 하다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대금을 다 빼앗겨서 가출했다고 들었죠.”
그의 말에 더욱 확신이 들었다. 당시 목검이 부러지면 피해를 보는 사람은 헤일튼 공작가밖에 없었다. 시기도 마침 그녀가 약혼을 하고 공작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시기였다.
‘아셀리 전하인가?’
아무리 아셀리라 하더라도 함부로 공작저를 뒤질 수는 없을 테니 그런 식으로 간을 본 건가 싶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침착하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그 하녀, 황궁 하녀인가요?”
“에이, 그런 아이면 저와 어울리겠습니까.”
상단주는 말도 안 된다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잘못 짚었나? 엘로니아가 멋쩍게 답을 건네려던 찰나. 상단주의 설명이 덧붙었다.
“에릴 후작가의 하녀였습니다.”
엘로니아의 선물을 손수 골라주고, 아셀리와 친분이 두터운 사람. 귀족을 해하려 한 죄로 메티카에서 오늘내일 사형만 기다리고 있는 처지의 에릴 후작 영애. 엘로니아는 모든 배후에 아셀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
“어이, 베오. 누가 너 찾던데?”
번화가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술집 창고. 누군가 이름을 부르자 술병이 든 나무 상자를 옮기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부른 남자는 손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자던데, 애인?”
“아, 아니에요. 그런 거.”
베오는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를 머쓱하게 쓸어내렸다. 남자는 팔꿈치로 그를 툭, 건드리며 히죽였다.
“에이, 아니긴. 표정 보니 좋아 죽네.”
“진짜 아니에요. 제가 감히 어떻게…….”
“하긴. 어디 좋은 집안에서 일하는 하녀인가 봐? 되게 깔끔하던데. 잘 해봐, 얀마. 이거 순진한 척하더니 할 거 다 하네.”
낄낄거리는 남자를 뒤로한 채 베오는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가 꾸벅,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부르십니다.”
답을 듣기도 전, 여자는 주변을 살피며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르며 베오는 자신의 어수룩한 머리와 옷을 빠르게 가다듬었다. 그래봤자 별다를 게 없지만. 골목을 돌고 돌아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한 식당에 들어섰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2층으로 그를 안내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그를 보고 있었다.
베오는 보자마자 헤벌쭉 웃으며 인사했다.
“아셀리!”
“어디 감히 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불러!”
“아, 그렇지. 아, 아셀리 전하, 헤헤.”
하녀의 꾸중에 베오는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그런 그를 보며 아셀리는 고고하게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일하는 거 그만둬.”
“어, 알고 있었어? 왜? 주인아저씨도 잘 해주시고 같이 일하는 형들도 좋아.”
“돈이라면 내가 지불할게. 그러니까 어디 멀리 가든지 해.”
철그렁. 그의 앞으로 금화가 든 주머니가 던져졌다. 베오는 우물쭈물하며 작게 읊조렸다.
“싫은데…….”
그럼 널 못 보잖아. 베오는 시무룩하게 뒷말을 삼켰다. 그는 최근 매우 행복했다. 어린 시절 첫사랑이 이렇게 제국민 모두가 칭송하는 황녀가 되었을 줄이야. 빈민가에 살 적에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감히 바라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곁에서나마 그녀를 지켜보고 싶은 욕심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어릴 적 친구라고 제법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취직도 시켜주었는데 실수로 잘려서 면목이 없었다. 나무 목재에 신경을 쓰라고 했는데, 하녀가 잘못 전달한 것인지 둘을 바꿔 말하는 바람에 상단에서 잘리고 말았다. 아셀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으니 하녀의 실수가 맞을 것이다. 그가 선뜻 돈을 받지 않자, 아셀리의 눈매가 조금 사납게 올라갔다.
“너, 빈민가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했지?”
“좀 됐어. 15살 이후로는 쭉 나와 살았으니까.”
“거기서 지내던 애들이랑 연락은 안 하고?”
“한 1년 정도는 연락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끊겼어. 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뭐. 괜히 아버지 소식은 듣고 싶지도 않고.”
편하게 말을 꺼내는 그를 지켜보던 하녀의 눈매가 쌀쌀맞았다. 하지만 아셀리는 질책하지 않았다. 역시 어린 시절 착했던 그녀는 여전했다. 황궁에 들어간다고 사람이 바뀔 리 없을 테니 말이다. 옛날 생각에 베오는 실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요즘도 옥수수빵을 좋아해? 어릴 때는 되게 좋아했잖아. 훔쳤다가 걸려서 내 뒤에 숨고 그랬는데.”
“그런 푸석한 빵은 안 먹은 지 좀 됐어.”
“아, 그렇지. 이제는 맛있는 것도 많을 테니까.”
말을 잘못 꺼냈는지, 아셀리의 입매가 단단하게 굳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몇 년 정도 제국 밖에서 지내란 얘기 하러 왔어.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게.”
여전히 금화 주머니는 그의 발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는 그녀의 뒤를 하녀가 따라나서며 그에게 엄하게 말했다.
“전하를 만난 일은 함구하십시오.”
“응, 물론이지!”
아무렴. 이제는 고귀해진 그녀가 저따위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아 발목을 잡길 바라지 않았다. 이렇게나마 가끔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아셀리가 나간 뒤 십몇 분을 더 기다린 그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술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더 있었다.
“헤일튼 공작저에서 나왔네. 베오, 본인이 맞는가.”
*** 엘로니아는 제 앞에 눈을 껌뻑이고 앉아 있는 베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상단주가 그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예상 밖의 인상인데…….’
엄청나게 못되게 생기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이렇게 순진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저기,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조심스럽게 묻는 베오의 말에 엘로니아의 옆에 앉아 있던 카르벨이 대신 물었다.
“헤일튼가에 납품하던 목재를 기억하나.”
“아, 예. 제가 실수로 잘못 담는 바람에 큰 피해를 드렸죠. 늦었지만 죄송했습니다.”
꾸벅 인사까지 건네는 모습이 더 당황스러웠다. 카르벨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로니아는 재빠르게 일전에 그가 주었던 빈민가 명단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베오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우습게도 이미 죽은, 꽃을 팔던 아이는 명단에 있었다.
‘이상하다. 분명 이프리트가 보여준 과거에서 봤는데…….’
상단주도 그가 빈민가에서 신문팔이를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거짓은 아닐 터. 사전에 얘기를 들었던 카르벨도 그 부분을 짚었다.
“예전에 빈민가에서 신문을 팔았다고 들었는데.”
“아, 예. 맞습니다. 조금 오래되었는데 어찌 아시고…….”
“꽃을 팔던 릴리라는 아이를 기억하나.”
“예……. 근데 마차 사고로 강에 뿌려준 지 오래된 것 같은데. 릴리를 찾아오셨나요?”
베오는 숨기는 것 하나 없이 술술 답했다. 이렇다 보니,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초조함에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손가락으로 못살게 굴었다. 그걸 언제 보았는지, 카르벨은 엘로니아의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붙잡았다. 온기가 돌기 시작하니 조금 불안정하게 뛰었던 심장도 천천히 제 박동을 찾아갔다. 카르벨은 힐끔, 그녀의 손에 들린 명단을 보고는 베오에게 물었다.
“바네사, 오드, 제이벨, 란트. 아는 사람인가.”
“어어, 빈민가에 지내던 친구들이죠!”
“연락은.”
“음, 끊긴 지 좀 됐는데……. 제가 빈민가를 좀 일찍 나와서 그 뒤는 잘 모릅니다.”
그가 골라 물어본 이름은 전부 생사가 불분명한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연락이 끊겼고, 그만 생존이 확인된다. 살아 있다면 사실 어떤 방면으로든 언젠가 찾을 수 있기 마련이었다.
‘죽었을 확률이 높겠지.’
마부가 했던 말을 보자면, 죽인 아이가 한둘이 아닌 듯하니 말이다.
“초반 1년 정도는 연락이 되었는데, 그 뒤로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습니다. 진짜예요.”
그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차 사고를 숨길 생각이었다면, 릴리의 일도 감췄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릴리가 죽었다는 사실까지 솔직히 말하는 것을 보아 거짓은 아닌 눈치였다. 카르벨은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 그를 돌려보냈다. 엘로니아가 머뭇거리며 나가는 베오의 뒷모습을 보며 허탈함을 느낄 때쯤. 카르벨이 조용히 말했다.
“1년 뒤라고 했다.”
“네?”
갑자기 뜬금없이 이게 무슨 소리지? 엘로니아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자, 카르벨이 찬찬히 설명을 덧붙였다.
“아셀리 전하와 베오라는 남자. 같은 또래더군.”
“네. 그런데요?”
“그가 15살에 빈민가에서 나왔다고 했으니, 그때라면 아셀리 전하가 막 황궁에 적응하던 시기야.”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거지? 아셀리는 조금 늦게 황궁에 들어왔다. 데브니 남작이 그녀의 교육을 맡으면서 다 큰 아이에게 이런 기초적인 걸 가르쳐서 쉽고 좋다고 했으니 말이다. 잠깐 눈을 깜빡이며 고민하던 엘로니아는 순간 깨달았다.
“로엘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뒤로군요.”
“그래.”
로엘 황태자가 죽은 뒤, 누군가 빈민가의 아이들을 차례차례 마차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 여태껏 전대 헤일튼 공작 부부가 빈민가를 찾았던 것이 카르벨과 관련된 줄 알았거늘. 로엘 황태자와 관련이 되었던 걸까. 여기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사실상 베오뿐일 확률이 높아 보였다.
“빈민가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던 걸까요?”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지. 베오라는 자는 보아하니 아는 게 전혀 없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린 애들을…….”
그때는 아셀리도 어린 나이였다. 그런 그녀가 수많은 사람을 사주해서 죽였다니. 심란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앞으로 마차 부품을 통해 과거를 얼마나 더 봐야 할까. 얼마나 많은 이들의 죽음을 더 마주할지 몰라서 두려웠다. 엘로니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카르벨은 붙잡았던 손에 힘을 주었다.
“마차는 그만 봐도 돼. 여기까지 알아냈으면 나머지는 내가 해도 될 일이야.”
“그래도 제가 보는 게 더 확실하잖아요.”
“그대는 혈통집을 보는 게 좋겠어. 그걸 꼭 보고 싶다며.”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인지 카르벨이 은근슬쩍 가벼운 투로 말했다. 이제는 이 또한 그의 배려라는 걸 알 것 같았다. 여태 그가 이런 식으로 도발하면 쉽게 넘어가 승리욕을 불태웠으니 말이다. 엘로니아는 조용히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