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함정을 파다2021.08.26.
물론 이조차도 아셀리가 혈통집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보았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직접 봤다면서 카르벨을 협박하기는 했으니까.’
만약 보지 않았다면 아셀리의 말이 거짓일 테니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다. 봤다면 진실을 알 수 있을 터. 어느 쪽으로든 그들이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예상했던 범위였는지 카르벨은 입던 옷을 마저 갈무리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를 엮어내려면 로엘 황태자의 일을 들쑤시는 쪽이 훨씬 효과적이니까.”
하나뿐이라는 말에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있잖아요, 카르벨. 현재 렌디먼 폐하의 직계는 아셀리 전하 한 분이신 거죠?”
“돌아가신 로엘 황태자 전하를 제외하면 그렇지.”
그녀를 떠올리니 불쾌한지 카르벨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게 문제야. 원로회에서 소극적으로 나올 게 뻔하거든. 소문이야 남들이 하는 말에 동조 몇 번 했다고 하면 될 일이니.”
원로회는 제국 내의 가문들이 모여 결정을 내리는 회의였다. 주로 황실의 일을 판가름할 때 열리고는 했다. 제국 내의 가주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다 보니 어지간한 안건으로는 턱도 없었다. 마지막 원로회가 황후의 서거 이후, 아셀리와 황비를 공식적으로 제국에서 받아들일 때였을 정도이니 말이다. 누구보다 원로회를 여는 것부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은 척 엘로니아를 위로했다.
“혈통집에 너무 매달리지 않아도 돼.”
“일단은……. 혹시 로엘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증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황실 서고에는 가 볼게요.”
아무래도 황실의 유일한 적통이다 보니, 그녀가 없으면 다음 대에는 섭정을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독 보수적인 귀족 사회여서 적통이 아닌 자의 통치를 환영할 리 없었다. 모르기는 몰라도 아셀리를 처벌하려면 결정적인 한 방이 필요했다.
‘역시 증거를 좀 더 모아야겠어.’
마법 상단을 운영하던 연금술사도 좀 만나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엘로니아가 황실 서고에 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카르벨이 넌지시 물었다.
“……그럼 이프리트라는 정령도 함께 가는 건가.”
“그야 불의 정령이니까 그렇겠죠?”
현재 그보다 더 도움이 되는 정령은 없을 테니 말이다. 엘로니아가 눈을 깜빡이며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자, 카르벨의 입매가 조금 굳은 듯했다.
“왜 그래요?”
“그 정령왕의 본모습은 어느 쪽인가 해서.”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근데 딱히 중요한 건 아니지 않아요?”
“……그래.”
카르벨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째 좀 못마땅하다는 글자가 이마에 박힌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인가? *** 이프리트는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편이었다. 얼마나 단호한지 연회에서 정령왕으로 모습을 드러내 준 이후부터 다시 카르벨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부르면 나타나기는 하나, 그가 있다면 한참 멀찍이 떨어져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카르벨도 만만치 않았다. 이프리트가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꿋꿋하게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럼 그대가 빈민가에서 사고가 난 것으로 본 마차는 이게 전부인가.”
“전에 인수하신 마차들을 보여주시면 정령들이랑 찬찬히 조사해 볼게요.”
카르벨의 집무실. 원로회를 소집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회의를 거쳤다. 사실상 지금 할 수 있는 건 정해진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엘로니아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 가세요?”
“입궁은 같이해.”
“마차 조사가 끝나면 말씀드릴게요.”
이미 문밖에서 그레이터가 그를 기다리다 못해 말라 비틀어져 가고 있었다.
거의 10분 간격으로 안절부절못하다 들어오고는 했다. 그새 10분이 지났나 보다. 똑똑. 귀신같이 노크가 들렸다. 달칵, 문이 열리고 그레이터의 얼굴이 문틈으로 잠깐 보였다.
“각하.”
“정령왕께서 사람을 싫어하신다지, 아마.”
하지만 그럴 때면 카르벨은 웃는 얼굴로 답했다. 문이 다 열리기도 전, 그레이터는 결국 다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라는 범주에 카르벨도 들어가는데…….’
엘로니아는 목구멍 끝으로 말이 나올 듯 말 듯 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이후는 저랑 이프리트가 할게요.”
“그래.”
그런 행동과 달리 엘로니아의 말에 그는 군말 없이 그녀를 보내주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카르벨이 인수했던 마차 업체의 일부 폐마차들이 줄줄이 공작저로 들어왔다. 시녀를 물린 채 이프리트와 단둘이 저택 뒤편으로 향하던 엘로니아는 다시 어려진 그에게 호기심 어린 질문을 건넸다.
“어제 보였던 모습은 뭐였어요? 연출?”
[본모습입니다만.]
“어……. 그럼 왜 지금은 어린 모습인 거예요?”
[정령사께서 유약한 생명체의 모습을 해야 덜 거부감을 느낀다고 하여.]
이것도 닉스가 알려준 정보인가. 대체 그가 어떻게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확실히 귀여운 닉스와 정령들에게 조금 유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만약 다 큰 남자가 퍼즐 5만 피스를 맞추자고 했다면 도망갔을 테니 말이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엘로니아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정말 그것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택 뒤편에 널찍한 장소에 도착하니 데드와 헤일튼가의 시종들이 폐마차의 부품들을 잔뜩 쌓아둔 것이 보였다. 확실히 세월이 꽤 지나서인지 몰라도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어떤 게 사고가 났던 마차인지 고르기 힘들겠는데?”
전부 부숴서 폐기처분 하려던 것을 카르벨이 인수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전부 형태가 조각조각 나 있었다. 엘로니아가 한숨을 내쉬며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툭, 하고 아마도 마차 문이었던 것을 슬쩍 찌르자 파삭, 하며 주저앉았다. 그러자 이프리트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떨어지십시오. 저희가 하겠습니다.]
“저희……?”
[닉스, 살라만더.]
이프리트의 호명에 어디서 검은 연기가 솜뭉치처럼 몽글몽글 발밑에 모여들었다.
‘이것도 정령이었구나.’
불의 하급 정령인 모양이었다. 이프리트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여기서 사고가 난 적이 있는 부품들을 골라내라.]
그의 명령에 검은 연기들이 통통 튀듯 마차 부품으로 향했다. 제일 먼저 하나의 부품이 엘로니아의 앞에 놓였다.
[그럼 보겠습니다.]
이프리트의 차분한 음성과 함께 곧 엘로니아의 눈앞에 낯선 마부의 모습이 보였다. 마차 안이었다. 창문 너머로 빈민가의 아이들이 길을 가는 이들에게 구두를 닦아준다던가, 호객행위를 하는 것이 보였다. 마부로 보이는 남자는 괴로운 듯 마차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이렇게 해야 하는 건가. 이렇게까지…….”
그는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남자의 옆에서 한 여자가 표독스럽게 다그쳤다.
“이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어요, 여보. 다 끝나고 받은 돈으로 제국을 뜹시다.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벌써 여섯이나 죽였어. 마차에 아이가 치일 때 그 표정을 알아?”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그래도 돈이라도 제대로 지급 받으니 그게 어디야. 다음 아이는 누구예요?”
여자의 질문에 마부가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작은 소녀가 방긋 웃으며 꽃바구니를 보였다.
“아저씨, 꽃은 안 필요하세요?”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달려들어 자신의 물품을 보였다.
“아저씨, 구두 닦는 건 안 필요해요?”
“신문이요, 신문! 오늘 준남작가의 셋째 아드님이 후작 부인을 꼬셨다는 이야기가 아주 인기 있어요! 무려 19살 차이예요!”
마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던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 아이군요.”
빈민가의 아이였다. 보는 순간 엘로니아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빈민가의 아이를?’
로엘 황태자의 죽음은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명확한 이유가 눈에 보였다. 하지만 빈민가의 아이는 황녀가 된 아셀리의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니면 마차 사고는 아셀리 전하의 지시가 아닌가?’
고작해야 10살 남짓한 아이였다. 옷조차 허름한 그 아이를 죽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 이들 중 묘하게 낯이 익은 이도 있었다. 신문을 파는 아이는 열심히 신문 속 가십거리를 읊어냈다.
“아니면 요즘 경매장에 투자하기 좋은 목록은 어떠세요? 싸게 사서 비싸게 팔 목적으로 요즘 부르주아 도련님들이 많이들 투자합니다!”
뭐지. 빈민가를 지나다 봤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부는 그저 아이들을 물린 뒤, 마차에서 나왔다. 말의 고삐를 떨리는 손으로 쥔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비장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과거는 끝이 났다. 아마도 꽃을 팔던 아이는 죽었을 것이다. 이렇게 부서진 조각만 봐도 당시 얼마나 거세게 들이박았는지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런 잔혹한 광경은 보지 않는 쪽이 더 나았다.
[빈민가의 위치를 찾아볼까요.]
옆에서 이프리트가 조용히 질문을 건넸다. 그러던 순간, 멀찍이 뒤에서 에이미의 음성이 들렸다.
“마님! 마님! 오늘 상단에서 나왔는데요, 제록 나무 판매 건으로 허가차 나오셨답니다!”
주변에 사람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이야기를 해두어서인지 더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한데 잠시 쉬어가시지요.]
“응, 그게 좋겠다. 미안해.”
[아닙니다.]
엘로니아는 멋쩍게 웃으며 에이미에게 고개를 까닥했다. 허락의 의미였다. 에이미는 곧장 뒤에 있던 상단주 부부를 불렀다. 오랜만에 본 이들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로 엘로니아를 맞이했다.
“엘로니아 님. 최근 정령사로 이름을 떨치신다 들었습니다. 아주 여기저기서 난리입니다!”
“아니에요. 별로 크게 한 일도 없는 걸요.”
“덕분에 상단에 정령사님이 키우시는 제록 나무 한 그루 사겠다고 아주 사람이 줄을 섭니다. 가격도 기존 시세보다 5배씩 뛰었어요!”
상단주는 희열이 느껴지는 듯 흥분해 말을 쏟아 냈다. 품에 한 아름 안고 온 서류를 보아하니, 구매자 명단인 듯했다. 이전에 에릭스 때문에 판매를 늦췄던 터라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제가 그래서 여기서 구매자 인품도 괜찮고, 또 대금 납부할 능력도 있으신 분들 위주로 추려왔습니다.”
그가 내미는 서류를 받은 엘로니아는 깔끔하게 정리된 문서를 쭉 훑었다. 직전에 마차 사고에 관한 과거를 봐서 그런가. 눈에 확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는지, 상단주가 눈치를 보며 멋쩍게 말을 건넸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실수하지 않을 겁니다. 확인도 여러 번 했고요, 전에 실수한 직원도 제가 해고했고, 직접 관리하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직원…….”
그래. 직원 때문에 그가 카르벨과 거래가 끊겼었지, 참. 곰곰이 떠올리던 엘로니아는 순간 한 얼굴이 떠올랐다.
‘직원?’
정령들이 당시 보여주었던 침수 목재를 헤일튼 공작저로 보냈던 사람. 젊은 직원. 그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엘로니아는 알 수밖에 없었다.
‘방금 신문 팔던 그 아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