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잠든 사이에2021.08.22.
엘로니아는 황급하게 닉스가 있는 곳을 두 손으로 공손히 가리키며 말했다.
“카, 카르벨. 제가 닉스와 약속한 게 있어서 퍼즐 5만 피스를 맞춰야 하거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닉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이 밤에라도 그는 정말로 그 많은 피스를 다 맞출 기세였다.
[지금이야? 진짜? 웬일이래! 맨날 연회 다녀오면 지쳐서 뻗어 자더니! 님프랑 노움을 불러도 돼?]
너희는 잠도 없는 거니……. 두 명의 정령까지 합세하면 정말 날밤을 꼬박 새울 수밖에 없었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망울들을 보며 이제 그만하자고 물릴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닉스도 굉장히 기대를 많이 하고 있고! 카르벨도 피곤할 테니까……!”
횡설수설 무슨 말을 하는지 엘로니아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닉스가 분명 숙취 해소를 시켜주었는데도 취한 것처럼 기분이 붕 뜬 것 같았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이런 기분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요즘 기분이 조증과 울증 사이를 오가서…….’
유독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카르벨을 보다 보면 자신이 꼭 청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말은 아니라고 해놓고 막상 내 말대로 들어주면 서운하고. 답을 정해놓고 떠보는 것도 아니고, 정말…….’
제가 생각해도 제멋대로인 감정이라 죽어도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다. 역시 혼자 있을 시간도 필요하다. 데브니가에서 지낼 적에는 늘 혼자였는데, 이제는 닉스부터 카르벨, 심지어 에이미까지. 언제나 곁에 누군가 있다 보니 혼자가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파혼 후 이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지금부터 서서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엘로니아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카르벨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강하지 않은 힘에 그의 잿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녀를 직시했다. 제 속내가 들킨 것 같아 엘로니아가 무어라 말을 뱉어내려던 찰나.
“그대가 잠드는 것까지만 보고 갈게.”
“밤이 늦었어요.”
“늦었으니까 하는 말이야.”
카르벨은 툭툭, 침대 위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이프리트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더니, 본 모습은 그게 아니었잖아. 닉스도 그럴지 누가 아나.”
[뭐, 인마? 지금 내가 조그마하다고 무시하냐? 엉? 나도 크면 엄청 잘생기고 키도 크고 멋있을 거라고!]
눈에 힘을 주며 고개를 기울인 닉스가 못마땅한 듯 그에게 시비를 걸었다. 정작 카르벨은 모르는 듯하지만.
“어차피 카르벨은 보이지도 않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약혼녀 옆에 외간 남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썩 좋지 못해서.”
그의 말 뒤로 작은 음성이 들릴 듯 말 듯 뒤따랐다.
“아직 나도 곁에 있지 못하거늘.”
“네? 뭐라고요?”
“아니. 이프리트도 그러했으니, 닉스도 혹시나 모른다는 뜻이었어.”
친절하게 웃는 미소가 수상했으나 이미 이프리트로 겪은 일이 있어 더 이상 밀어낼 말이 없었다. 엘로니아가 미적거리며 자리에 눕자, 그가 이불을 끌어다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 대놓고 판을 깔아주니 피로한 몸과 달리 눈은 말똥말똥했다. 자는 척이라도 하면 일찍 나갈까 싶어 눈을 꼬옥 감고 버텼다. 하지만 카르벨에게 통하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정말 자는 것만 보고 갈 생각이야.”
“드르렁.”
“누가 입으로 코를 골지.”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그녀의 앞머리를 가벼운 손길로 살며시 정리해 주었다. 곧이어 이마에 짧게 온기가 맞닿았다. 입을 맞춘 모양이었다. 본능적으로 그녀가 움찔거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기분 좋은 듯 울렸다. 닉스가 열심히 시비를 거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버티자, 연회 내내 긴장했던 심신이 서서히 풀려갔다. 한참 뒤, 엘로니아는 까무룩 잠들었다. 긴장한 듯한 호흡이 지속되기를 얼마. 자연스럽게 일정한 호흡이 돌아왔다.
“잠들었군.”
엘로니아가 잠든 것을 확인한 카르벨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녀가 붙잡은 손이 아니었다면.
“엘로니아?”
잠든 줄 알았는데, 깨어났나. 하지만 여전히 고른 숨소리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카르벨의 검지를 한참 작은 손이 꽉 쥐고 있었다. 빼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만큼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혹여 엘로니아가 깨어날까 싶어 조심조심 숨을 죽인 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가 좁아져서인지 짧게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이불이 흐트러지자 카르벨은 자유로운 한 손으로 다시 덮어주었다. 슬쩍 제게 향한 얼굴이 잘 보이도록 머리카락도 슬그머니 넘겼다.
그러자 엘로니아가 잠결인지 웅얼거렸다.
“닉스……. 때리면 안 돼……. 메티카로 갈지도 몰라…….”
“그럴 일 없어. 다시 꺼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시 부탁하면 너무 염치없잖아…….”
부탁해. 차라리 빚을 지워줘. 그녀가 욕심을 부려줬으면 좋겠다. 차라리 다른 영애들처럼 그에게 무엇을 사달라고, 해달라고, 데이트를 청해달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하길 원했다. 늘 제 곁에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부와 명예, 권력. 귀족들에게 선물이란 곧 그 가문의 힘이었다. 어떤 것을 선물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그 대상을 대우하고 있는지 보이니 말이다. 그에 맞춰 카르벨도 표면적으로나마 값비싼 것들을 보냈다. 대부분 에스피디 제국 내의 영애들의 취향은 꿰고 있었고, 얼추 맞춰서 보내면 오해하는 영애들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카르벨은 늘 일부러 그 취향을 피하고는 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그 취향마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붙여둔 시녀는 무엇을 주어도 그녀가 좋아한다는 답변만 전했다. 실제로 엘로니아는 호불호가 크지 않았다. 무엇을 주어도 기뻐했다. 하물며 정령이 가져다주었다던 산딸기 바구니조차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니. 차라리 욕심이라도 있었으면.
‘그럼 그것을 빌미로 곁에 묶어둘 텐데.’
하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정령을 보는 일이었고, 그것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친절로 그녀가 원하는 인간상을 표방했다.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했던가.’
그동안 참아왔다. 엘로니아가 원치 않으니까. 하지만 연회에서 그녀가 입을 맞추는 순간, 버틸 수 있을 리가. 보는 눈만 없었더라면 그대로 그녀를 몰아붙였을지도 모른다.
‘다행인 건가.’
하지만 연회에서 대놓고 수작을 부리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론이라 그랬지.”
그의 머릿속에 가드윈가에 대한 내력과 방계까지 도식화되어 쭉 그려졌다. 순간, 뒤척이던 엘로니아가 그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훅, 끼치는 시원한 향에 그의 턱이 움찔했다.
“하, 젠장.”
한참 만에 크게 숨을 몰아쉰 카르벨은 눈을 감았다. *** 아침 일찍이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묘하게 침대가 비좁고 더웠다.
‘정오인가? 햇빛이 들어와서 그런지 덥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찼다. 분명 닉스와 에이미에게 양쪽으로 잔소리를 듣겠지만, 그렇다고 시원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불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지……?’
닉스가 덮었을 리는 없고. 비몽사몽 눈을 뜨니 시야가 답답하게 꽉 막혀 있었다. 엘로니아는 흐릿하게 보이는 벽에 손을 갖다 대었다. 뭔가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게 사람 같기도 하고……. 더듬거리자 곧 크게 일렁이며 낮은 음성을 내뱉었다.
“아침부터 유혹이 심하군.”
“……카, 카르벨?”
잠이 훅 달아난 엘로니아가 고개를 팍, 치켜들자 묘하게 피곤한 듯 보이는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잤나?”
“아니, 왜, 여기, 있, 카르벨이!”
너무 당황한 나머지 말이 이어져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전부 알아들은 모양인지 카르벨은 태연하게 흐트러진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며 답했다.
“그대가 안 놓아줘서. 어쩔 수 없었어.”
“제가요? 그럴 리가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러나 한 손에 잡힌 것은 제 네글리제가 아니었다. 사색이 된 엘로니아가 설마 하는 눈으로 제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카르벨의 검지가 엘로니아의 손에 잡힌 채 그대로 딸려 올라왔다. 스스로가 놀라워 엘로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잡고 있던 손을 툭 놓아버렸다. 그러자 카르벨은 비스듬하게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해 일으키며 당당하게 답했다.
“그것 봐.”
“그냥 뿌리치고 갈 수 있었잖아요!”
“옆에 있어 달라는 약혼녀의 청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
“그냥 잠버릇이잖아요. 뿌리치고 가도 돼요. 제가 허락할게요!”
“난 그렇게 매정한 성격은 못되어서.”
하 참 내. 언제부터 그렇게 인정이 넘치셨다고! 기가 막힌 얼굴로 엘로니아는 눈을 끔뻑이며 그를 응시했다. 카르벨은 뻐근했는지 고개를 기울여 굳은 몸을 풀었다. 설렁줄을 잡아당기자 곧 시녀들이 들어왔다. 그들 중 일부는 카르벨의 옷가지를 들고 있었다.
“뭐, 뭐예요?”
“옷은 갈아입어야지. 이 차림으로 연무장에 갈 수는 없잖아.”
시녀들이 태연하게 그의 옷을 벗기자 곧 널따란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장난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아니면 이런 패션이 취향인가. 그렇다면 비슷한 스타일로 좀 더 맞추고.”
“뒤돌지 마요. 앞을 봐요!”
“왜. 밤에 꼭 껴안고 있었는데.”
그는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새빨개진 엘로니아는 시선 둘 곳을 찾아 제 방의 온갖 곳을 훑었다. 옷을 갈아입는 카르벨의 등에 상흔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엘로니아는 철렁, 심장이 내려앉았다. 제법 큰 흉터가 그의 어깨에서부터 허리까지 가로지르고 있었다.
“……흉터는 뭐예요?”
“아, 이거. 괜찮아. 그냥 흉터만 남은 것뿐이야.”
“아니, 그래서 왜 생긴 건데요.”
어느 귀족의 등에 저런 흉터가 존재한단 말인가. 심지어 작은 부상으로 끝날만 한 크기가 아니었다. 그녀의 심각한 음성을 알았는지, 카르벨이 셔츠를 잠그며 말했다.
“이전에 반란군을 토벌할 때 입은 상처야. 이미 아물어서 고통은 없어.”
“아…….”
시녀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카르벨은 손을 들어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나머지는 내가 하지. 나가 보게.”
“네, 주인님.”
탁, 방문이 닫히고 둘만 남자 카르벨은 뒤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놀랐나?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군.”
“세상에, 이렇게까지 다칠 일이에요? 헤일튼가의 유일한 장손을!”
“그렇게 위험한 일을 끝마쳤기 때문에 헤일튼가에서 나를 인정한 거야.”
아. 그의 말에 엘로니아는 짧게 탄식했다. 그 위험한 길을 그는 죽기 살기로 가서 살아 돌아온 것이다. 아무도 그를 헤일튼가의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많이 아팠겠다.”
“아니, 별로. 며칠 누워 있다 눈을 뜨니 폐하께서 공로를 인정하시겠다며 공문을 내리셨거든. 방계가 싹 입을 다물었지. 아픔보다 기쁨이 크던데.”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마저 정비했다. 그 덤덤한 답 안에는 그간 그가 감내하느라 무뎌진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카르벨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아셀리 전하부터 일단 허위 소문의 당사자로 잡아들일 거야. 쉽진 않겠지만.”
엘로니아는 그런 그를 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아셀리 전하가 혈통집을 봤어요.”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엘로니아는 단호하게 답했다.
“정령에게 부탁해서 내용을 볼 수 있도록 해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