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 이프리트의 인사 (74/234)

74. 이프리트의 인사2021.08.15.

그레이트 홀의 정중앙. 그녀를 두고 모두 멀찍이 서서 구경하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렌디먼 황제와 그 뒤에 있는 아셀리를 올곧게 응시했다. 멀리 있어도 아셀리의 살짝 굳은 미소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로니아는 환히 웃었다. 당황한 듯 잠시 주춤거리는 아셀리를 보며 엘로니아가 입을 열었다.

“이프리트.”

조용한 공간에 그녀의 청량한 음성이 바람을 타고 퍼지듯 울렸다.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자 긴장이 풀어지려던 그 순간.

“어, 바닥에…….”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모를 검은 연기가 천천히 스며들 듯 바닥에 깔렸다. 드넓은 홀을 천천히 잠식해가는 연기에 불쾌함을 느낀 일부 참관객들이 소리를 질렀다.

“이, 이게 뭐야!”

“콜록, 세상에. 이 냄새는 뭐죠?”

낮은 연기는 절대 발목 높이에서 올라오지 않고 엘로니아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우왕좌왕 흐트러진 인파를 뚫고 그녀의 앞에서 연기가 모였다. 몸집을 불리고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된 연기는 순식간에 팽창해 터지듯 확 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이프리트를 닮은 누군가가 나왔다.

16566369559081.jpg

  그는 곧장 엘로니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말했다.

[불렀습니까, 정령사여.]

‘누, 누구세요?’

똑 잘린 단발과 무심하면서도 묘하게 기력이 없는 목소리. 이프리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무엇보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던 이프리트와 달리 눈앞에 있는 남자는 완벽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령의 장난을 어디 한두 번 당해보는가.

‘이제 정령에 놀라는 것도 익숙하다고!’

엘로니아는 능숙하게 마치 처음부터 그를 부른 척 손을 내밀며 말했다.

“미안해요. 미리 얘기했다시피, 저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어 불렀어요.”

[익숙한 곳이군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정령은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가 렌디먼 황제와 아셀리가 있는 단상 위를 보며 중얼거렸다.

[로드리가 아니군요.]

이를 들은 렌디먼 황제가 놀라운 듯 답했다.

“내 조부님의 존함이로군. 조부를 알고 있는가?”

[아아. 조부라면 그대는 갈리먼의 아들인가. 그의 그 자그마한 아이가 벌써 제국을 통솔하게 되었다니.]

갈리먼은 전대 황제의 성함이었다. 오랜 세월이 자조적인 음성에서부터 느껴졌다. 정령. 이제는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는 이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렌디먼 황제는 미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령을 뵙겠소. 조부님을 알고 있으실 줄은 몰랐다오. 실례가 아니라면 귀한 분의 존함을 물어도 되겠소.”

[이프리트. 불의 정령왕이다.]

정령왕이라고? 내색하지 않고 있던 엘로니아의 눈동자가 동시에 커졌다. 데구루루 주변을 훑었으나, 이프리트에 정신이 팔려 그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카르벨 역시 내심 놀랐는지 슬쩍 곁눈질로 이프리트를 훑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 닉스가 너무 싫어하더라니. 상사를 보고 좋아할 사람……, 아니. 정령이 어디 있겠어.’

과하게 펄쩍 뛴다 했더니. 이프리트의 인사에 렌디먼 황제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리 좋지 않은 일로 뵙게 되어 면목이 없소.”

[인간이란 늘 그러했지. 정령사가 간곡히 부탁하는 덕에 모습을 비췄으나, 정령사란 자연과 함께하는 자. 더는 인간의 입에 정령사의 고귀한 존함이 오르내리는 것을 거둬주기를.]

“이번 일로 그런 자들은 엄중히 벌할 것이오. 걱정하지 말고 자연으로 돌아가시게나.”

그의 인사에 이프리트는 건조한 눈으로 그의 뒤를 바라보았다. 이를 꽉 문 채 애써 미소를 유지 중인 아셀리를 보며 그가 중얼거렸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

작은 음성이었으나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렸다. 아셀리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참관객은 물론, 렌디먼 황제까지 그 말뜻을 엘로니아의 가짜 정령사 소문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했다. 그러나 아셀리는 본인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알고 있는 거야?’

전대 황제의 이름을 운운할 때부터 모르는 게 없다는 투였다.

‘하필 불의 정령…….’

불을 과거의 매개체로 삼는다면, 제 사고 현장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불의 정령왕을 지니고 있다면 엘로니아는 이미 그녀를 간파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정령이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을 터. 만약 그랬다면 지금 모든 것을 폭로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그의 폭로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 엘로니아가 딱 집어내 물었다면 모를까. 아셀리는 초조함에 손바닥이 땀으로 눅눅해졌다. 이가 갈렸으나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데브니 남작을 믿는 게 아니었어!’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라더니. 이런 식으로 제게 물을 먹인 것인가? 이프리트는 그런 아셀리를 차갑게 바라보고는 등을 돌렸다. 넋이 나간 엘로니아에게 다가간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제 되었습니까.]

이프리트는 당장이라도 사람이 많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가 할 일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라질 준비를 하듯 연기가 모이는 것을 보며 엘로니아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저, 정령왕이었어? ……요?”

[편히 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정령왕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지 않은가. 엘로니아의 망설임에 그는 더욱 거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차분하게 답했다.

[이렇게 등장하면 효과적일 것이라 하더니. 이래서 하급 정령들의 말은 믿을 수 없군요.]

“하급 정령?”

[닉스와 아이들이 정령사를 잘 안다며 이런 방법을 추천했습니다.]

“아…….”

사람을 싫어하는 그답지 않게 모두의 주목을 이끌며 등장한다 했더니. 정령 중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이는 닉스밖에 없었다.

‘싫어한다더니 할 때는 또 다 하네.’

짧은 탄식에 이프리트는 그저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부지런히 모이던 검은 연기는 다시금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연기가 흩어졌을 때, 이프리트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미세하게 느껴지던 탄내 역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황궁 악단에서부터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이 넋이 나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고요한 홀에서 카르벨의 음성이 울렸다.

“가짜 정령사라 소문을 낸 근원을 찾아 벌해야겠군요.”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걸어 나왔다. 순식간에 주목된 시선 속에서 카르벨은 렌디먼 황제에게 말했다.

“그게 정령왕께서 바라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더군. 카르벨 공은 이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정신을 차린 렌디먼 황제의 질문에 답은 카르벨이 아닌 그의 뒤에서 나왔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아셀리는 고아하게 한 걸음, 렌디먼 황제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카르벨은 재밌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셀리 전하께서 이런 가십거리에 호기심이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싫든 좋든 황족에게는 들리는 게 많지요.”

“그렇다면 보신 건 아니시로군요. 전달해주신다면 조사를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카르벨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은근한 호선을 그린 입매와 부드럽게 휘어진 눈으로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나긋나긋하고 정중한 말투에 품위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화법. 하지만 어째서인지 분위기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프리트보다 더 불타오르네.’

묘하게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벨의 권유를 거절할 명목이 없었는지, 아셀리는 한층 수그러진 듯 답했다.

“당연히 그렇게 이뤄져야 할 일이지요.”

“그자가 누구입니까, 전하. 말씀해 주시지요.”

“데브니 남작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제 아비라면 메티카에서 나오기 위해 그녀를 어떤 방식으로든 팔아먹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말이지만 입맛이 썼다. 어쩜 이렇게 제 예상에서 하나도 벗어나지 않을까. 수감이 되어서도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는 데브니 남작과 이제는 안녕을 고할 수 있게 되는 걸까. 그녀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귀족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데브니 남작이 이전부터 그런 분위기를 풍기기는 했지요.”

“예전에 한번 이 소문이 돌았을 때도 그러지 않았던가요?”

“맞아요! 정말, 자식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네요.”

의심할 여지 없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카르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 또한 명명백백히 조사하겠습니다. 허가해주십시오, 폐하.”

“허가한다. 헤일튼 공에게 오늘부로 정령사에 대한 불온한 소문의 수사권을 일임하겠다.”

렌디먼 황제의 허락과 동시에 많은 이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럼요! 거짓 소문을 낸 이는 처벌해야지요!”

방금까지 소문을 나르던 이들이 엘로니아를 향해 다급하게 아부를 건네기도 했다. 순식간에 풀어진 분위기 속에서 아셀리는 웃고 있을 뿐이었다.

‘왜 저렇게 긴장하지?’

무언가 더 있는 건가. 엘로니아는 아셀리를 더 살피려고 했으나, 몰려드는 참관객 탓에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정령사님, 그간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제 영지에는 소문 하나 없도록 공문을 내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는 제 아들 제론입니다. 정령사님과 엇비슷한 나이에, 조신하고 문무 모두 출중합니다.”

얼굴을 익히기 위해 몰려드는 이들 중에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소개도 있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저, 저는 카르벨과 약혼을 했어요!”

“아휴, 요즘 같은 세상에 약혼했다고 친구도 못 하는 게 말이 됩니까. 카르벨 공께서 그리 속이 좁으신 분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 친구요.”

“그럼요. 친구요. 혹시 압니까. 황실 서고 재건의 일에 도움이 될지도요.”

어느 쪽으로 보아도 문무가 필요한 일은 아닌 듯하지만 착각한 본인이 쑥스러운 탓에 엘로니아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수없이 외웠던 명단 속 사람들이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해왔다. 대화를 하며 도수 낮은 샴페인 잔도 얼마나 비웠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살짝 취기가 오르는 기분이었다. 앞에 있는 제론이라는 귀족의 말이 흐리멍덩하게 들렸다.

“어릴 때부터 데브니 남작의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친우의 아버님께도 정령사님의 이름을 운운하며 돈을 빌렸다지요?”

“아, 그렇군요.”

“따끔하게 그러지 말라 일렀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감사하다고 해야 하나.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짧게 고개를 젓자, 그가 물었다.

“아,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나 해서 여쭙는 것이지만……. 혼인식의 날짜는 정해지셨습니까?”

“카르벨과요? 아직이요.”

“그렇군요. 오랜 기간 지켜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일은 모르지 않습니까.”

듣던 소리 중 반가운 이야기였다. 그런 식으로 세상이 봐준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 그녀가 답을 하려던 찰나.

“변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지요.”

카르벨이 휘청이던 엘로니아의 허리를 감싸며 딱딱하게 답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