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이프리트와의 약속2021.08.12.
조용한 공간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듯 고요했다.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대상인지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엘로니아가 들여보냈으니 존재는 하겠지.’
카르벨은 마치 앞에 사람을 두고 있는 것처럼 손으로 맞은편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앉으시죠. 아무래도 대화가 길어질 듯하니.”
카르벨은 자리에 앉아 빈 소파를 마주 본 채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낯을 가리신다는 이야기를 들어 시종들은 전부 물렀습니다.”
그는 편안하게 앉아 자연스러운 투로 말했다.
“이전에는 경황이 없어 짧게 인사를 드리고 끝냈는데, 오늘은 드릴 말씀이 있어 엘로니아에게 자리를 마련해달라 부탁했습니다.”
혼자 대화하는 기분이군. 답이 없는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것은 여간일이 아니었다. 표정을 읽을 수도, 그쪽에서 생각하는 바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정보는 오로지 엘로니아가 전해준 것뿐. 카르벨은 마치 앞에 사람을 둔 것처럼 계속해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최근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전부터 암암리에 수군대는 인간은 있었으나, 이렇게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처음입니다.”
본론을 꺼내기 위한 초석이었다. 하지만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근원지를 알 수 없는 탄 냄새가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카르벨은 내색하지 않으며 주변을 훑었다.
‘불이 난 것은 아니고.’
매캐한 향은 화재에서 나는 냄새와 달리 검은 연기 같은 징조가 전혀 없었다. 마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화가 난 건가.’
제 말에 반응 한번 없던 정령이 가짜 정령사라는 소문이 있다는 한마디에 매캐한 향을 흘렸다. 적어도 무언가 감정을 표현한 것이 분명했다. 동시에 카르벨은 안심했다.
‘적어도 가짜 정령사라는 말이 못마땅한 모양이군.’
엘로니아에게는 거리낌 없으니 다른 의미는 생각할 수 없었다. 카르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이제 엘로니아도 정령에 익숙해졌으니 소문을 정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뢰를 가득 담아 미소까지 지어 보이며 말을 덧붙였다.
“정령께서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황궁에서는 제 입지가 나쁘지 않습니다. 동행하신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캐한 향이 사그라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바심이 난 카르벨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단호한 투로 말했다.
“엘로니아에게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도움이 되면 되었지, 방해가 될 일은 없다. 적어도 카르벨은 제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엘로니아의 소문을 뿌리째 뽑고 싶었다. 한편으로 그녀와 파혼하기로 한 약속이 마음에 걸렸으나, 그보다는 엘로니아의 평판이 더 중요했다. 이따금 그 사실을 떠올리면 머리가 차가워지는 기분이었다. 엘로니아는 한 번도 그와의 결혼을 꿈꾼 적이 없는 듯하니 말이다. 사실 카르벨은 소문에 그리 예민하지 않았다. 한평생 소문을 달고 다녔는데, 이 정도는 그저 고만고만한 이들의 장난질일 뿐이다. 가십거리에 무너질 헤일튼가가 아니었으며, 그 역시 엘로니아를 고작 그런 것들에게 휩쓸리게 두지 않을 터. 하지만.
‘엘로니아가 바라니까.’
저 스스로 자유를 찾고 싶다는데, 날개를 꺾을 수는 없지 않은가. 비록 제 품에 가둬두고, 소문과 말도 안 되는 이들에게서 지켜주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엘로니아의 책임감이 강했다. 당장에 제록나무를 전량 사들여 그녀의 자금 융통을 막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이들을 총사령관이라는 직위로 잡아들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엘로니아는 불편해할 것이다. 고작 정령과 퍼즐을 못 맞춰 주는 걸로 미안해하는 그녀라면. 자신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에 대한 거부감이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이조차도 카르벨에게는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의 일환에 불과했다. 그런 속마음을 친절로 잘 가려두었다고 생각했는데. 순간, 그의 눈앞에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을 가득 채운 연기는 카르벨의 시야를 가렸다.
“이프리트. 진정하십시오.”
콜록, 작게 기침을 뱉으며 카르벨이 손을 휘젓자 어딘가에 빨려 들어가듯 연기가 사라졌다. 시야가 탁 트인 것과 동시에 소파에는 낯선 소년이 앉아 있었다. 단발머리에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연한 눈동자. 기껏해야 10대 중반의 외형을 했으나 앉은 자세와 풍기는 기운이 만만하지 않았다.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그가 이프리트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프리트는 기력이 없는 미성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속내가 시커먼 것이 살라만더보다 더하구나.]
“시커먼 놈이라 죄송하군요. 어쩌겠습니까, 이리 생겨 먹은 것을.”
속일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제 속내를 알고 있다면 거짓말은 무의미할 테니 말이다. 카르벨의 뻔뻔한 답에 이프리트는 짧게 이맛살을 구기며 답했다.
[정령사를 네 곁에 잡아두려 하다니. 하찮구나.]
“아직 잡아 두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저를 떠날 수 있다. 그는 뒷말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혹여 사실이 될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전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정령사의 자유를. 돕는 조건이다.]
“어차피 엘로니아의 소문을 방관하실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조금 더 마음 쓰시지요.”
[네 놈의 곁에 한시도 머무르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만.”
[인간에게 손끝은 굉장히 넓고 광활한 모양이군. 네 놈의 손이 닿은 곳이 어디 손끝뿐이던가?]
이런. 보이지 않아 몰랐더니, 시시각각 어디서든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카르벨은 미소로 난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프리트의 얼굴은 찌그러졌다. 카르벨은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엘로니아의 곁에 머무르는 걸 허락해주시지요.”
[싫다.]
망설임조차 없는 즉답에 카르벨의 입매가 보이지 않게 움찔했다.
‘이거, 완전히 장인어른이 따로 없군.’
작은 정령들도 엘로니아의 곁에 못 붙어 안달이더니. 난데없이 보이지도 않는 이들과 다퉈야 하는 그의 입장이 훨씬 불리하지 않은가. 하지만 카르벨은 더욱 신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파혼을 하고, 정령까지 보인다면 엘로니아가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지.]
“사기꾼이 득시글한 제국입니다. 정령사의 도움 한 번 받겠다고 이곳저곳에서 돈과 사연을 싸 들고 찾아가겠죠. 누군가는 그녀에게 재혼이랍시고 별 같잖은 놈들을 붙이려 들 수도 있겠고.”
[…….]
카르벨의 청산유수와도 같은 말에 이프리트가 입을 다물었다. 고심하는 듯 눈매가 씰룩이는 것을 보아하니, 그도 정세를 모르지 않는 분위기였다. 과장이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불쌍한 이를 보면 마음이 약해서라도 한 번은 대화를 들어줄 것이다. 제 부모도 힘겹게 떨쳐낸 사람일진대, 파혼을 하면 위험도가 배로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카르벨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에스피디 제국에서 헤일튼가 정도면, 그녀의 배경과 방패가 되어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은 협조하지.]
이프리트도 계산이 끝났는지,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좋습니다. 저도 그 이상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카르벨이 만족스러운 결과에 손을 내밀었다. 습관처럼 악수를 청한 것이었으나, 이프리트는 간단히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의 선조답게 뻔뻔한 것은 똑같군.]
선조라고? 카르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제 선조라면 헤일튼가를 말하는 것인가.
“그게 무슨 뜻입니까.”
[황궁에서 보지. 약속은 지키겠다.]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이프리트의 주변에 다시금 연기가 휩싸였다. 무어라 더 묻기 전, 그는 이미 사라졌다. 카르벨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적어도 그는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카르벨은 조용히 제 손을 꽉 쥐었다. ***
“가짜 정령사라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글쎄요, 그렇게 되면 헤일튼 공작도 사기당한 것이니…….”
“파혼하겠죠?”
“데브니 남작도 그렇게 돈을 빌리며 사기를 치더니, 딸마저…….”
“그 아들도 그래서 메티카 감옥에 수감된 거 아니에요.”
수군거리는 이들이 잔잔한 황실 악단의 노래 속에 숨어 있었다. 연회를 빙자한 이 시간은 결국 자신을 시험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엘로니아는 힐끗 스치는 시선들을 보며 침을 삼켰다.
‘이거,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
제국의 온갖 귀족들은 다 모인 눈치였다. 일부 그녀와 친분이 있는 이들이 눈인사를 건네기는 했으나, 보는 눈이 많으니 차마 친근하게 말을 걸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이건 나라도 긴장되는데.’
아무리 제가 떳떳하기로서니 손에 땀이 찼다. 그런 그녀에게 카르벨이 작게 속삭였다.
“렌디먼 폐하의 방식답지 않군.”
“그래요? 폐하께서 자리를 마련하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분은 이렇게 시끄럽게 일을 처리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분명 아셀리 전하의 조언이겠지.”
망신을 당하게 된다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큰 연회였다. 그런 곳에서 아셀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황제의 옆에 서 있었다. 카르벨은 그곳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엘로니아에게 되물었다.
“이프리트는.”
“부르면 나올 거예요. 안 그래도 아침부터 오만상이었어요.”
사람이 많은 곳인지라 연회 초반부터 함께하자고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나서주기로 한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괜히 마음 바뀌면 안 되니까.’
엘로니아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다들 알고 있을 거라 믿고 있소.”
렌디먼 황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렸다는 듯 연회에 흐르던 음악이 멈췄다. 음악이 뚝 끊긴 공간 속에서 그의 음성만이 묵직하게 퍼져나갔다.
“안 그래도 최근 소문이 무성하더군. 정령사가 가짜라고 하던가.”
그의 말에 여태 수군거리던 귀족 중 일부가 헛기침을 흘렸다. 그런 모습에 아셀리는 뻔뻔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그런 소문이 있다니. 정말 창피하네요. 제국의 명예도 함께 추락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셀리의 답에 많은 이들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렌디먼 황제가 엘로니아와 좌중들을 훑으며 말했다.
“고대 문헌에는 정령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들이 종종 기록을 남겨두었다지. 물론 외형에 대해선 상이했으나, 공통된 점은 정령을 보았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일세.”
어디서인가 훅,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엘로니아 역시 전부 아는 내용이었지만,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갑갑함에 짧게 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카르벨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커다란 손이 따스하게 감싸자 엘로니아도 조금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렌디먼 황제가 물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그대가 확신을 주었으면 하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엘로니아를 향했다. 그 사이에서 엘로니아는 방긋 웃으며 얌전히 드레스 자락을 쥐고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