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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보이지 않는 소개 (72/234)

72. 보이지 않는 소개2021.08.08.

무슨 자신감이지. 황당해서 순간적으로 답을 할 수 없었다. 이프리트의 대화도 들을 수 없고, 보지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수로. 아니,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프리트였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카르벨만 보면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질 정도로 멀찍이 도망간단 말이야!’

속도도 얼마나 빠른지, 차마 그녀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였다. 카르벨은 그의 낯가림이 얼마나 심한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도 구면이니 다행이군. 초면에도 대화를 나눌 정도면 잘 될 여지는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그날도 도망갔는데요. 점점 멀어지는 이프리트를 두고 얼마나 아련하게 바라봤던가.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다른 정령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이프리트가 그럴 놈은 아닌데.]

[정령사! 정말 이프리트가 맞아? 불의 정령들은 가끔 심술궂기도 한데 혹시 이름을 잘못 들은 거 아니야?]

[그치? 노움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저건 이프리트가 돌았거나, 미쳤거나, 아니거나. 셋 중 하나다.]

뭘 또 마음 아프게 부정을 세 번씩이나. 님프조차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고 있었다. 불의 정령과 상극이라 그런가? 님프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카르벨만 싫어한다면 다른 일로 호감이라도 사보겠는데, 본래 성격이 그렇다면 이마저도 쉽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카르벨은 서재에서 나눈 대화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진지하게 계획을 짜고 있었다.

“번거롭겠지만, 잠시만 옆에서 대화를 전해주면 좋겠어. 나이대는 대충 어떻게 보이나. 아, 정령은 상관이 없는 건가.”

그 역시 이렇게 실체 없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려니 막막한 모양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검지만 느리게 까닥였다. 이를 보는 엘로니아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그날 넘어가지 않았다면, 이프리트와 단둘이 빈민가에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건가 싶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카르벨, 사실 제가 미처 말을 못 한 게 있는데요.”

“중급자가 이프리트 하나뿐인가. 그, 당신과 친한 정령의 위급 정령에게 보고를 올릴 수는 없나.”

“사실 이프리트가 당신을 싫어해요!”

엘로니아는 숨조차 쉬지 않고 단번에 말을 뱉었다. 놀란 눈으로 카르벨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응시했다. 그런 그에게 엘로니아는 쉬지 않고 말을 덧붙였다.

“막 격렬하게까지는 아니고, 그냥 성격이에요, 성격! 카르벨이 막 친근한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유독 그런 걸 거예요.”

말을 꺼내놓고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떤 수식어를 사용해서 포장해도 결국 그가 싫다는 말이니까. 카르벨은 꼭 예상이라도 한 사람처럼 담담히 답했다.

“그거 참 유감이군.”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은 그는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다만 엘로니아의 앞에서는 이제 보기 어려워진 표정이었을 뿐.

‘말이 좀 심했나.’

힐끗, 곁눈질로 그를 살피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돼.”

“그래요. 아까 말하려고 했잖아요. 그게 뭐죠?”

“연금술사를 찾아가 보려고. 검을 하나 주문 제작할까 봐.”

그래! 연금술사가 마법이 섞인 물건을 제법 잘 만들었으니, 정령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쯤은 일도 아닐 수 있겠다.

‘근데, 검……이라고……?’

엘로니아의 인생에서 잡아볼 일이 없다시피 한 그 물건을 왜? 엘로니아가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기 직전. 카르벨이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정령을 자를 수 있는 검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무, 뭘……하게요……?”

“협박.”

아……. 이런 사람이었지, 참.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살벌한 답에 앞에 있던 님프와 노움이 닉스의 뒤로 숨었다. 닉스도 겁을 먹었는지 잔뜩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엘로니아, 너도 내 뒤에 숨어!]

‘숨을 곳이 없잖아!’

[저 미친놈이 잘해줄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그래, 엘로니아를 인질로 잡아서 우리를 해치워버릴 생각이었구나! 엘로니아, 넌 이용당한 거야!]

‘아니야, 오해야!’

최근 들어 유독 인간적인 면모를 봐 와서 잊고 있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걸. 결국 엘로니아는 눈물을 삼키며 답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제가 이프리트와의 자리를 어떻게든 만들어 볼게요.”

  *** 이프리트가 좋아하는 건 오래된 서고였다. 이프리트는 바짝 말린 나무를 좋아한다고 했다. 특유의 케케묵은 듯하면서도 버석거리는 마른 냄새가 있을 때 그를 부르면 제법 유하게 다가와 주었다. 그리고 헤일튼 저택 내에서도 그런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이프리트.”

카르벨의 서재에서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어디선가 검은 연기가 천천히 바닥에 깔렸다. 뭉치고 뭉쳐 그림자처럼 사람의 형상을 만들고, 일순간 퍼지듯 연기가 사라지면.

[부르셨습니까.]

그제야 이프리트가 모습을 드러낸다. 엘로니아는 아무도 없는 서재에서 그를 보고 물었다.

“있잖아. 오늘은 내가 부탁을 좀 하고 싶어서.”

[정령사의 부탁이라면 분부대로. 말씀만 하십시오.]

“내가 조만간 입궁을 할까 하는데.”

벌써 이프리트의 눈에 대놓고 꺼리는 기색이 올라왔다. 하지만 제 방에서 그녀가 납치라도 당한 것처럼 울고 있는 닉스와 정령들을 생각하면 물러설 수 없었다.

“카르벨도 참석……. 아니, 잠깐만! 멀어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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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부터 이프리트는 빠른 속도로 뒤로 스스슥 물러나기 시작했다. 닉스나 님프, 노움은 비교적 원하는 게 명확했다. 좋아하는 것을 드러내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고, 또 그런 것을 찾아다녔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프리트는 처음부터 깍듯한 예의, 반듯한 말투, 적당한 존중을 담은 일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들과 정반대의 행동이었다. 분명 엘로니아의 입장에서는 편해야 정상이었다. 떼를 쓰는 사람도 없고,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 비교적 말을 잘 들어주니 말이다.

‘어째서 닉스가 더 편한 기분이 들어.’

이프리트는 다른 정령에 비해 대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과 급이 다른 걸까. 이프리트는 멀찍이 서서 힘이 빠진 듯한 편안한 음성으로 답했다.

[최근 정령사를 황궁으로 부른다는 소문 때문이십니까.]

“아, 들었구나. 응. 가서 입증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염치가 없지만 이프리트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그분이 동행하지 않는다면 함께하겠습니다.]

이름도 아니고 ‘그분’이란다. 엘로니아는 조금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르벨을 그 정도로 거부하는 이유가 뭐야?”

[그 사람은 알 겁니다.]

이제 ‘그분’도 아니고 ‘그 사람’이다. 갈수록 격하되는 호칭에도 엘로니아는 그의 말뜻조차 알 수 없었다. 이유를 알고 있다면 카르벨은 해결을 위해 황궁에 불도 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프리트가 오면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서재 옆 작은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카르벨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야. 카르벨도 나보고 이프리트랑 만나서 대화하게 해 달라고 했어. 지금도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는걸.”

오해를 풀어주려고 했으나 더욱 창백해져 가는 그의 안색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실패인 듯했다. 이프리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런 사람이 정령사님을 부려 먹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응?”

한숨을 쉰 이프리트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자연이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것. 그런 자연이 가호하는 정령사를 결혼이라는 제약으로 묶으려 들다니.]

난데없는 그의 말에 엘로니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분명 그의 말을 들었는데도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런 엘로니아를 두고 이프리트는 잔잔하게 화를 냈다.

[그치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자연을 대변하는 자가 어째서 한낱 인간에게 귀속되어야 합니까.]

“자, 잠깐만. 이프리트,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가 아닙니다. 그자는 당신을 독점하고, 오롯이 정령사가 그만을 보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와 가까이하고 싶지도, 돕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럴 리가…….”

[대놓고 드러내는 자의 생각을 읽는 것보다 쉬운 건 없습니다.]

이프리트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찬찬히 그의 말을 곱씹던 엘로니아는 어째서인지 점점 두 뺨이 화끈해지는 기분이었다. 왠지 더운 기분에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부채질했다. 늘 차분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프리트였다. 비록 경멸 섞인 표정은 이따금 지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조용히 읊조리는 말은 큰 소리 없이도 명확한 거부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리고 동시에 늘 신사적으로 있으려고 했던 카르벨의 모습이 떠올라 조금 민망하기까지 했다. 그가 장난을 치고, 이따금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해도 어느 선을 넘지 않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도 그저 말뿐일지 모른다. 그저 혼자 두지 않고, 이따금 그녀에게 따뜻하게 대해 주는 정도는 호의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냥 농담으로 하는 말을, 이프리트가 진담으로 생각했나 보다.’

버릇처럼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엘로니아는 썩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쓸쓸했다. 이래서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티가 난다고 하나 보다. 차마 답을 고를 수 없어 침묵을 선택했다. 그게 역효과가 난 모양인지, 이프리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왜 그런 얼굴이십니까.]

그는 차분한 눈으로 엘로니아의 전부를 꿰뚫어 볼 듯 뚫어지게 직시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단발이 차분하게 찰랑였다.

[만나보겠습니다.]

“갑자기?”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카르벨을 불러야 하나? 시종을 다 물려두었는데, 누구라도 불러도 되나? 사람을 싫어하는 이프리트인지라, 선뜻 누군가를 부르자니 도망갈까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이프리트만 두고 자릴 비우자니, 그가 말을 바꿀까 걱정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녀를 두고 이프리트가 말했다.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뭐든 좋아. 일단 카르벨이 있는 곳으로 갈까? 어떻게, 지금 가는 방향이!”

다급해서 허둥대자 이프리트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뇨. 단둘이 면담하게 해주십시오.]

  *** 카르벨은 가만히 자그마한 방에서 숨을 죽였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그의 예민한 감각들이 반응했다.

‘엘로니아를 정령들이 따르는 걸 보면, 그런 사람을 좋아하는 건가.’

평생 쫓아갈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일단 외형적으로도 너무 달랐다. 가만히 있어도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엘로니아와 달리, 그는 웃지 않으면 많은 이들의 가십거리에 놀아날 사람이었으니까. 이전에 서재에서 만났을 때도 분명히 친절하게 굴었다. 인사까지 했건만. 카르벨은 까탈스러운 정령을 떠올리며 어떻게 비위를 맞춰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던 순간, 문이 열렸다. 엘로니아를 보고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미소를 지었으나,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아무도 없지만, 카르벨은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는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작게 인사를 건넸다.

“또 보네요, 이프리트. 헤일튼가의 가주, 카르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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