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소문 정리2021.08.05.
에스피디 황궁의 집무실은 고요했다. 나이는 있어도 아직 정정한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푹 파여 있었다. 그마저도 근심 탓인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 그 얘길 믿으라는 겐가.”
“그런 뜻이 아니오라…….”
상소를 가져왔던 보좌관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바빴다. 이렇게 말이 없다는 것은, 그가 퍽 화를 참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렌디먼 황제는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됐다. 이는 내 알아서 하마.”
“하지만 소문이 걷잡을 수 없습니다. 아랫것들부터 빈민촌까지 그 이야기가 도는데, 어찌 손을 놓고 있단 말입니까.”
“내 가라 하지 않았나.”
흉흉한 음성에 그들이 주춤, 잠시 입을 다물었을 때. 똑똑. 타이밍 좋게도 노크가 울렸다.
“아셀리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들라 해라.”
처리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는데도 그는 아셀리의 알현을 허락했다. 사실상 보좌관들을 향한 축객령이었다. 보좌관들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서로 어깨를 밀며 눈치를 보았다. 곧 문이 열리고, 칙칙한 집무실과 어울리지 않는 화사함을 지닌 아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을 보시는 중이었다면 후에 뵈었을 텐데. 방해가 되어 죄송하군요.”
“아, 아닙니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보좌관들은 허겁지겁 고개를 숙였다. 아름다운 데다 영민하기까지 한 아셀리라면 저 고집스러운 황제의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줄 거라 믿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렌디먼은 그리 분노가 오래가는 이가 아니었고, 사사로운 일로 트집을 잡을 만큼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문이 닫히자, 렌디먼 황제는 한층 부드러워진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기별도 없이 어쩐 일이더냐.”
“아버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하는 건가요?”
“안 그래도 네가 요즘 서고 재건일로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괜히 이 늙은이가 괴롭힐 이유는 없지.”
“제게 일을 맡기신 이유가 아버지의 자유 시간을 위해서였군요?”
“그럴 리가. 하나 남은 자식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면 두 팔을 벌려 환영한단다.”
아셀리는 입에 발린 렌디먼 황제의 말에 적당히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아쉽게도 오늘은 아버지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무엇이더냐.”
“정령사 말인데요. 제가 황실 서고 복원을 진행하면서 찾아보니 본래 다른 이들도 정령을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던데요.”
정확하게 어떤 식으로, 어떤 외형을 지녀서 드러났다고는 적혀 있지 않았다. 심지어 정령을 본 먼 선조들의 기록도 제각기 달랐다. 누구는 붉은색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푸른색이라고도 했다. 나이, 성별, 심지어 온전한 사람인지 반은 동물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지만, 하나같이 정령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요즘 도는 소문 들으셨나요?”
아셀리의 질문에 그는 질리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보좌관들이 매일같이 그 얘길 하더구나. 조금 전에도 그 이야길 하던 참이었다.”
“덕분에 소문이 흉흉해요. 안 그래도 최근 데브니 남작가에서 세금을 횡령한 문제 때문에 고운 시선도 아닌지라.”
“……그 아이는 관련 없다지 않더냐.”
“카르벨 공이 그러던가요?”
그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곧 긍정. 아셀리는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가 카르벨에게 약한 이유를 알고 있다. 죄책감이다. 헤일튼 공작가의 사람을 황후로 들여놓고, 제 어미와 바람이 나 황비로 들이기까지 했으니. 더군다나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벌어진 일이니 더욱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벌써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황후는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로엘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다. 아셀리는 제 속내를 숨긴 채 조용히 속삭였다.
“원래 제 사람이라면 팔이 안으로 굽는 법이지요. 엘로니아 양이 정령사라면 그냥 이참에 확실히 한 뒤, 깨끗하게 소문을 정리하는 편이 서로 좋지 않겠어요?”
“소문은 금방 가라앉아.”
“이번은 전과 달라요, 아버지. 그리고 카르벨 공도 속고 있을지 모르잖아요.”
데브니 남작도 그런 일을 벌였는데, 그런 이에게서 자란 딸이면……. 아셀리는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소리로 뒷말을 흘렸다. 사실상 들으라 한 소리였다. 렌디먼 황제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만간 두 사람을 불러들이마.”
“감사해요.”
아셀리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미련 없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방을 나서려는 그녀를 그가 잠시 붙잡았다.
“요즘 번화가로 많이 외출을 하는 모양이던데. 무슨 일이 있느냐.”
사람을 붙였구나.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유약한 척하면서, 은근하게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사람. 아셀리는 뒤를 돌며 환히 웃었다.
“그냥, 서고 재건하면서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느라요.”
*** 깜빡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함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어버린 모양이었다. 엘로니아가 눈을 떴을 때, 테이블 위에 조르륵 앉아 자신을 구경하는 정령들을 볼 수 있었다. 닉스는 불만인지 볼을 씰룩이며 말했다.
[노움. 님프의 눈을 가려야 하지 않을까?]
[왜? 닉스도 보고 있잖아.]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노움은 순순히 님프의 눈을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가려주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제 상황을 인식했다.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자신의 행색을 확인했다. 평소와 특별히 다른 점이라고는 없지만, 여전히 카르벨의 품에 아이처럼 안겨 있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엘로니아가 고개를 들자, 이미 산뜻한 얼굴로 깨어 있는 카르벨이 보였다. 심지어 푹 숙면을 취했는지 피부가 한결 반들반들해 보이는 듯한 착각도 일었다.
“피곤해 보이던데, 좀 더 쉬지 그래.”
“깨우지 그랬어요.”
“나도 방금 일어났어.”
그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도닥였다. 묘한 감각에 그녀가 움찔거리자, 카르벨의 잿빛 시선에 장난기가 서렸다. 아, 안 된다. 앞에 애들 셋이 있는데! 물론 실질적인 나이는 애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의 몸이 굳자, 카르벨은 가벼이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뭐가 문제야.”
“음. 보는 눈이 있다는 게 문제?”
“무슨 소리야. 우리 둘밖에 없는데.”
카르벨이 주변을 빙 훑었다. 엘로니아는 민망하게 눈짓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러자 카르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데. 그 침대에 있던 작은애? 아니면 서재에 있던 큰 놈?”
“작은 애……들이요.”
“하나가 아니군.”
그는 보란 듯 엘로니아를 향해 몸을 붙이며 그들을 향해 말했다.
“마침 잘됐네. 안 그래도 정령들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카르벨은 그들의 옆에 쌓여 있던 서류 하나를 들었다. 아무것도 안 보일 게 분명한 그는 그 서류를 들고 테이블에 보여주듯 들었다. 득달같이 정령들은 호기심을 보였다.
닉스는 대놓고 구경하며 노움과 대화를 나눴다.
[오, 황실 직인 공문. 얘네는 왜 직인에 발전이 없을까? 촌스럽고 별로야.]
[이거 뭐야? 우리보고 나오라는 건가? 그럼 감자 들고 가도 돼?]
[되겠냐. 대놓고 우리 의심하는 거잖아. 이놈의 황제 콧구멍에 물을 가득 채워버릴까.]
아니, 그건 일단 제가 황족 살인죄로 다시 메티카에 들어갈 것 같아서 안 됩니다, 닉스 님. 엘로니아는 하얗게 질려 고개만 저었다. 카르벨은 그들에게 내밀었던 서류를 도로 책상 위에 던지듯 툭, 올려두며 말했다.
“보다시피, 황실에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정령을 입증하라 해서. 그래서 몇 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우선은 그쪽 정령들이 가능한지부터 물어보지.”
누구에게 묻는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닉스는 팔짱을 끼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쟤는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저래라야? 네가 엘로니아야?]
[그래도 정령사랑 친한 거 아냐?]
[그게 뭐가 친해! 같이 기대어서 잠 좀 자서 다 친하면, 그 뭐야. 맨날 이상한 차 들고 오는 시녀랑도 친한 거겠네!]
노움의 말에 버럭 화를 내는 닉스를 보며 엘로니아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친한데……. 하지만 괜한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겠다 싶은 분위기였다. 옆에서 고민하던 님프가 손짓 발짓을 하며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방법이 어딨어. 되면 진작 했지.]
그들은 하급 정령이기 때문에 정령사 외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말하는 게 자존심이 매우 상했는지, 닉스의 두 눈은 부리부리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라? 하급 정령?’
순간 엘로니아의 머릿속에 이프리트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까, 처음 이프리트가 과거를 보여줬을 때도 전이랑 다르게 냄새가 느껴졌어.’
미세한 뜨거움, 탄내, 특유의 이글거리는 불로 인한 숨 막힘. 닉스나 다른 정령들에게서는 느껴볼 수 없던 특수성이 그에게는 느껴졌었다.
‘마차 사고 장소에 갔을 때도, 빈민가에 있던 사람들이 탄내가 느껴진다 그랬어!’
순간 머리가 맑아졌다.
“카르벨, 카르벨. 간다고 해요. 언제든 좋으니까, 날짜부터 잡으라 해요.”
“기다려 봐. 정령들이 안 된다고 하면, 비슷하게 마법사를 고용해서…….”
엘로니아는 단번에 그의 말을 잘라냈다.
“할 수 있어요.”
“확실해? 위험도가 높으면 그냥 못 하겠다고 해도 돼.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어.”
“그게, 위험도라기보다는……. 카르벨이 없어야 확률이 올라갈 것 같기는 한데.”
엘로니아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이프리트가 그를 싫어하는 것을 어쩌겠나. 황궁,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입증한다 치면, 사람도 많은 곳인지라 더욱 싫어할 게 뻔했다. 의외로 이프리트는 다른 이들에게 제법 관대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되도록 사람이 적은 곳을 선호하기는 하나 카르벨을 보았을 때처럼 피하지는 않았다.
‘빈민가에서도 어찌 되었든 잘 돌아다녔으니까.’
엘로니아의 떨떠름한 답에 카르벨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왜. 그 서재에서 만난 정령이 그러던가?”
“이프리트는 말은 잘 안 해요. 그냥 분위기가 좀 그렇다는…….”
카르벨은 제 턱을 문지르며 짧게 고심했다. 그런 그를 두고 엘로니아는 닉스와 정령들에게 절대 너희가 싫거나 모자라서 이프리트를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을 해야만 했다. 대부분은 얼추 이해하는 듯했다. 어린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된 기분이었다.
“알다시피 지금 하는 일이 서재 재건인데, 그게 또 불에 타서 이프리트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까 이번 한 번은 이프리트랑 단둘이 다녀올게. 알겠지?”
[으엑, 싫은데.]
“2만 피스 퍼즐.”
[받고 5만.]
윽, 젠장. 선택권이 없는 엘로니아가 고개를 끄덕일 때쯤.
“자리 마련해.”
카르벨의 비장한 음성이 들려왔다. 닉스와 손가락을 걸고 도장까지 찍으며 약속하고 있던 엘로니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무슨 자리요?”
“날 피한다며. 자리 좀 마련해줘. 마음에 들어보도록 하지.”
“……피한다기보다는 낯을 가리는 정도인데.”
“어느 쪽이든.”
그는 언제 무서운 표정을 지었냐는 듯 친절한 모습으로 돌아와 웃으며 말했다.
“마음에 들어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