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예쁘다2021.07.29.
엘로니아는 집무실 앞에서 차마 노크를 하지 못한 채 서성였다.
‘평소에 인사를 어떻게 했더라? 좋은 아침이에요, 잠은 잘 잤어요?’
아니다. 적어도 이 인사말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대뜸 들어가서 어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더 어색할 게 분명했다. 황실 서고 재건 탓에 얼굴을 평생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벽에 제 이마를 기대었다.
“어제 좀 자연스럽게 행동할걸…….”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뭐하나. 따지고 보면 애초에 계약을 어긴 사람은 카르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자신이 생겼다.
“그래. 오히려 내가 당당하게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싫으면 어쩔 거야. 나는 처음 합의했던 대로 했을 뿐이라고.”
왜 자신이 엉뚱하게 고민하고 있단 말인가. 짝, 자신의 볼을 가볍게 때린 엘로니아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안 그래도 오늘따라 에이미가 구두부터 드레스까지 그녀가 좋아하는 것으로 준비를 해주었다. 노크를 하기 위해 용감하게 주먹을 들었다. 거창했던 준비 과정과 달리, 정작 그녀는 아주 작고 소심하게 똑똑,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엘로니아.”
대뜸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문을 타고 넘어왔다.
‘나라고 알린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누군가 고한 것도 아니고, 이 시간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약속을 잡은 적도 없었다. 가볍게 의문을 넘긴 엘로니아는 꼿꼿하게 어깨를 편 채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친절하지만 애매한 듯이 웃고 있는 그레이터가 그녀를 반겼다. 카르벨은 여전히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는 그레이터에게 서류 하나를 넘기며 그녀에게 말했다.
“잠깐 앉아 있을 수 있겠나. 급한 일이 있어서.”
“아, 무, 물론이죠. 편하게 일 보세요!”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빠른 속도로 테이블 앞에 위치한 소파에 착석했다. 시계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집무실 안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 카르벨은 그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이 고요한 백색 소음이 어색하기만 했다. 그녀는 곁눈질로 카르벨을 확인했다.
‘뭐야. 어제 마차 안에 있던 사람이랑 완전히 딴판이잖아.’
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다른 분위기였다. 친절함 속 스며든 미세한 긴장감과 초조함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와 같이 여유가 넘치는 카르벨 헤일튼이 있을 뿐이었다. 어제는 그냥 해본 말일 수도 있다. 정령도 소개하니 그녀가 탐났다든가. 아니면 그냥 그날의 기분이 왠지 아무나 붙잡고 싶었다든가. 괜히 혼자 고민한 것 같아 민망함이 천천히 허리를 타고 올라올 때쯤. 엘로니아는 그의 잿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순간적으로 놀란 엘로니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눈이 접히도록 살며시 웃기만 했다.
엘로니아가 빠르게 옆에 있던 그레이터를 확인했으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빠져 있었다. 카르벨은 손을 들어 톡톡, 자신의 볼을 가벼이 건드렸다.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 모양이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다. 엘로니아는 가느다란 시선으로 살피며 그의 입 모양을 따라 했다.
‘미간……찌푸리……지마……?’
그의 말을 해석하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모르는 척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입을 움직였다.
‘예쁘네.’
‘……?’
그의 말을 본능적으로 따라 하던 엘로니아는 순간적으로 찻잔을 든 손을 삐끗하고 말았다. 찰그랑, 조금 거칠게 내려진 잔에 그레이터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쏟을 뻔해서인지, 아니면 카르벨 탓에 놀라서인지 심장이 조금 빠른 속도로 뛰었다. 엘로니아는 자신을 의문스럽게 바라보는 그레이터에게 문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물었다.
“바, 바쁘시면 나중에 다시 올까요?”
그러자 카르벨은 태연하게 마지막 서류까지 그레이터에게 넘기며 대신 답했다.
“아니야, 이제 끝났어. 그보다 더운 모양이지?”
“아뇨? 저 지금 아주 시원하고 차도 따뜻하고 좋은데요.”
“그런데 얼굴은 좀 붉은 듯해서.”
그의 장난스러운 말에 애써 다른 곳을 향했던 그레이터의 시선이 다시 그녀의 얼굴에 박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덤덤했다. 그러고는 아주 태연하게 카르벨을 향해 물었다.
“그럼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눈치가 많이 늘었군.”
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가자 엘로니아는 갸웃 고개를 기울였다. 그레이터는 꾸벅, 인사까지 마치고는 미련 없이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엘로니아는 닫힌 문을 보며 멋쩍게 물었다.
“저 때문에 일도 못 보시고 일찍 나가신 건 아니죠?”
“갈 때가 되어서 간 거야.”
카르벨은 태연하게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맞은편에 텅 비다 못해 널찍한 자리를 두고 굳이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의 옆에 앉았다. 슬그머니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엘로니아가 끄트머리로 도망치자,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두 번 말했다가는 얼굴도 보기 힘들겠군.”
“왜요? 저 지금 아주 자연스러운데요.”
“지금 그 말을 하는 것부터 자연스럽지 못해.”
정곡을 찌르는 말에 엘로니아는 입을 삐죽였다.
“그냥 말해도 될 걸, 왜 굳이 속삭여서 의식하게 만들어요.”
“의식하라고 한 건데.”
카르벨의 말을 듣기 무섭게 엘로니아의 입술이 고스란히 입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반대로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파혼이 싫은 쪽이 눌어붙어야지, 어쩌겠어.”
“……예? 뭘 눌어붙어요?”
“질척거려보게.”
여전히 냉랭한 얼굴에 느긋하게 걸린 미소. 소파 팔걸이에 기대어 턱을 괸 채 그녀를 비스듬하게 보던 그가 말을 이었다.
“정 원하면 그대가 바라던 목가적인 풍경의 저택을 한 채 사줄게. 그럼 그대 소원이 이뤄지니 되는 건가.”
“그건 파혼을 하고……!”
“파혼하면 그대가 바람나서 도망쳤다고 소문낼 거야.”
허, 이제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하지만 그의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그저 장난으로 내뱉는 말 같지 않았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처음부터 파혼해주기로 약속했잖아요!”
“알았어. 파혼은 해줄게. 그럼 바람은 별 같잖은 놈들이 붙을 수 있으니까, 사실 남자였다고 소문을 낼까.”
슬슬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엘로니아는 제 이마를 짚으며 작게 웅얼거렸다.
“애초에 그걸 믿겠냐고요…….”
“못 믿을 건 또 뭐야. 남들은 안 보이는 정령도 보인다는 정령사인데.”
그냥 어디 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정작 말을 한 당사자는 얼굴색 하나 안 바뀌어서 더 민망했다. 반대편에 미리 시녀가 놓고 간 다 식은 찻잔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온 그는 조용히 물었다.
“처음 보는 구두네.”
“에이미가 이전에 선물로 들어온 것들 중 하나라고 했어요. 편하기도 하고, 예뻐서 착용해 봤어요.”
“응. 그럼 됐어.”
그걸 왜 그가 됐다고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엘로니아는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떤 주제라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그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여주는 편보다는,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아무래도 서고 보안을 맡았던 분들은 여기까지 찾는 거로 하고…….”
“아, 그거 말인데. 더 이상 찾지 않을 생각이야.”
그의 말에 엘로니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와서 그 혈통집을 보기 싫은 것은 아닐 터. 평소 얼마나 그가 오랫동안 헤일튼 공작 부부에 대해 조사해 왔는지 아는 터라 애초부터 배제된 가정이었다. 아셀리가 무어라고 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였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슬며시 카르벨을 살폈다. 안 그래도 이상했다. 갑자기 질척거린다질 않나, 저택을 사준다질 않나.
‘역시, 나랑 파혼하기 싫어서 포기하는 건가…….’
엘로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울상을 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투로 그녀는 물었다.
“아니죠……?”
“어떻게, 눈치챈 모양이네. 역시 내 약혼녀가 정령사라 그런지 대단하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엘로니아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직전. 그는 팔을 뻗어 책상에 있던 서류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일전에 헤일튼 공작 부부가 죽기 직전 찾아갔다던 고아들의 명단이었다. 그는 턱짓으로 까닥,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방향을 바꾸게.”
아, 그쪽이었구나. 크흠.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처음부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전대 공작님 쪽으로 알아보기로 하셨구나!”
말을 뱉고 보니 이상했다. 황실 서고 재건과 하등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카르벨의 개인적인 일일 뿐, 아셀리와도 접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이들이었다.
‘로엘 황태자 전하와는 무언가 있는 듯했지만…….’
이상함을 느낀 엘로니아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황실 서고 재건은 어쩌시려고요? 황명이면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황실 서고 관련된 일이야. 거기 적혀 있는 사망 원인을 잘 봐.”
엘로니아는 그제야 밑줄이 그어진 아래에 적힌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베브렐 : 마차 사고 사망 오스티나 : 마차 사고 사망 렐라 : 마차 사고 사망 가이던 : 식중독 텔뷘 : 마차 사고 사망> 쭉 이어진 사망 사유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한 것.
“마차 사고……?”
엘로니아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홀린 듯 말을 이었다.
“전대 공작님께서도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잖아요.”
“그래. 그리고 어제 우리가 만났던 황실 서고 보안 마법사들의 대부분 역시…….”
마차 사고였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왜 카르벨이 마차 업체를 사들였는지 이해하고야 말았다. *** 쇳덩이가 거친 돌바닥을 끄는 소리가 났다. 철그럭, 소리와 함께 바닥에는 주황빛 머리칼이 흩어졌다.
“크흑, 저는 모릅니다!”
데브니 남작은 고작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모습으로 메티카 감옥, 그곳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독방에 가둬졌다. 그는 철창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금발의 여자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말씀드렸잖습니까. 그저 로엘 황태자 저하께서 마법사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본 게 전부라고! 그 전날 전하와 서고에서 만나자는 말씀을 들은 것 빼고는 없습니다!”
“그게 전부일 리가 없잖아요.”
아셀리는 어둠 속에서도 밝을 정도로 환히 웃었다. 이런 칙칙한 공간에서도 조명을 등진 그녀는 아름다웠고,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도톰한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살벌했다.
“난 당신을 죽일 수 있어요. 백성의 고혈을 빼돌린 죄를 만천하에 공개한다면 아버지께서도 이렇게 그대를 살려둘 수 없겠죠.”
“저, 전하.”
“뭐, 엘로니아 양은 정령사이니 이번 일에 무관하겠죠. 카르벨 공이 밝힌 일이기도 하고, 약혼까지 한 사이니까요.”
아셀리는 태연하게 놀란 척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가식적인 모습에 데브니 남작은 소름이 돋았다.
“그럼 남작과 남작이 그렇게도 끔찍이 아끼는 아들만 죽게 생겼네요.”
데브니 남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멀리 어디선가 이름 모를 남자의 신음이 복도를 타고 들려왔다. 그 소리가 꼭 제 아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