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대해 줘2021.07.25.
말을 꺼낸 뒤, 카르벨은 단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집요하게 응시했다. 엘로니아가 시선을 돌리고, 어색함에 머리카락을 넘기고, 아무것도 없는 드레스 자락을 가볍게 문질러도 잿빛 눈동자가 머무른 곳은 오롯이 그녀였다. 그의 말을 끝으로 마차 안에는 어떠한 대화도 이어지지 못했다. 넓은 마차가 좁은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그와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가까워서라고 생각했다. 엘로니아가 답을 낼 때까지 그는 이 고요함을 유지할 생각인 듯했다. 결국 견디지 못한 엘로니아가 힐끔, 그를 훔쳐보며 물었다.
“……파트너 역할을 제가 잘했나 봐요.”
“그런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알잖아.”
피할 수 있었으나 그는 다시금 주제를 붙잡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최근 카르벨의 기분이 유독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이전보다 조금 친절해졌다는 것도 체감하고 있었다. 가끔 그런 모습에 설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반듯한 이목구비에 너무 굴곡지지도, 너무 곱지도 않은 선. 검술 훈련으로 다져진 체격과 친절이 습관처럼 배어 있는 남자를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록 조금 짓궂기는 해도, 근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 마음이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엘로니아는 알고 있었다. 마차 안의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단순히 이어지지 않은 대화 탓은 아니었다. 엘로니아는 조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결혼이 싫어요.”
“당장 하자는 뜻은 아니었어. 그대가 원한다면 약혼 상태를 지속하는 것도 괜찮아. 단지, 파혼만 바라보지 말고, 옆을 좀 봐달라는 뜻이었어.”
“그래서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걸까. 카르벨이 장난을 치던 때가 좋았다. 적어도 가볍게 거절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진심이라면 엘로니아도 그에 합당한 무게로 대해야 하는 게 옳았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카르벨도 달래듯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나보고는 솔직하게 말하라더니. 오히려 그대가 더 숨기는군.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가.”
“카르벨은 누가 봐도 멋있는 사람이죠. 그건 처음 봤을 적부터 반박한 적 없어요.”
“누가 봐서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엘로니아 데브니의 눈에 그렇게 보여야지.”
카르벨은 빠르게 그녀의 말을 정정시켰다. 조심스럽게 그를 마주 본 엘로니아는 조용히 물었다.
“제가 왜 정령사로 인정받고 싶어 했는지 알아요?”
“정령사라서.”
맞는 말이기는 한데…….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나온 그의 답에 오히려 그녀가 당황하고 말았다. 제법 진지한 어투인 것을 보면, 이제 그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녀가 하도 진짜 정령사라고 하던 기간이 있어서인지, 진심으로는 안 믿는 눈치였지만 정말 노력은 하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작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기대하지 않고 지낼 수 있기 때문이에요.”
데브니가를 버려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치.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는 배경.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는, 오롯이 그녀 혼자 결정할 수 있는 환경에서 오는 안정감까지. 누군가에게 기대야만 한다면 무너지는 것은 쉽다.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에게 한평생 딸로, 자식으로, 하나의 인간으로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처럼 말이다. 잦은 기대와 무너짐의 반복으로 언제부터인가 모든 관계에서 엘로니아는 마음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대를 안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 장벽이 엘로니아에게는 한 발, 더 나아갈 수 없는 선을 만들고 있었다. 이해를 못 한 듯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리는 카르벨을 보며 엘로니아는 말을 이었다.
“카르벨을 믿어요. 그건 당신이 계약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죠.”
더군다나 그도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지녔으니까. 그가 상처받을 것 같아서 그녀는 뒷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가만히 듣고 있던 카르벨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나를 믿어. 기대에 부응할 테니. 정령은……. 안 보이지만 보도록 노력은 해 볼게.”
그의 말에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나긋나긋한 그의 말투도, 한 손을 붙잡고 느릿하게 그녀의 손등을 쓰다듬는 행동도. 최근 그가 보였던 노력 탓인지 몰라도 은근한 기대감이 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빠르게 제 마음을 눌러 냈다. 또 기대했다가는 같은 일이 반복될 거다.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는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게 좋았다.
“그럼 정령사 입장이 뭐가 돼요.”
엘로니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그녀의 풀린 표정에 카르벨은 적당히 따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깍지를 낀 카르벨의 손은 초조한 듯 느리게 까닥거렸다. 그녀는 기대한다고 말을 했으나, 그 속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안정감. 본인은 모르는 듯하나 미리부터 준비하는 습관부터, 예정에서 벗어나는 일에 초조해하는 것까지. 그녀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면 늘 안정적인 방향으로 걸었다. 헤일튼 공작가의 적자인지조차 몰라서, 방계 친인척들에게 늘 결과를 배팅하며 힘으로 눌러야 했던 카르벨과 달리 말이다. 그녀의 상냥함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도 알 것 같았다. 상대와의 관계에 끝을 가정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엘로니아는 카르벨에게 관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니까. 카르벨은 그 끝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조금 더 그에게 기대하고, 원하고, 궁금해하길 바랐다. * * * 소득은 없었다. 로엘 황태자가 만났던 이들은 대부분 사고나 죽을 때가 되어 숨을 거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희한하게도 명단의 대부분이 그러했다. 결국 엘로니아는 조금 찝찝함을 남긴 채 빈손으로 헤일튼 공작저에 돌아왔다. 카르벨과는 그 뒤로 조금 서먹해졌다. 정확하게는 그녀 혼자 어색해하는 듯했다.
‘그런 말을 해 놓고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태연해?’
역시 때린 사람은 두 발을 뻗고 잔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도대체 이전에는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평범한 에스코트에도 그의 손을 쳐낼 정도로 당황했다. 그뿐이던가, 저택에 돌아온 뒤로 자연스럽게 옆에 앉거나, 서류를 뒤에서 보는 등 자잘한 스킨십을 하는 탓에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닉스와 놀아 줘야 한다는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말이다. 엘로니아는 제 손에 쥐인 감자 조각을 카르벨이라도 되는 듯 가만히 노려보았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닉스가 쑥, 얼굴을 들이밀며 잔뜩 기대하는 투로 물었다.
[엘로니아, 이거 봐. 내가 조각한 거야.]
“이게 뭐야?”
[보면 몰라? 엘로니아잖아!]
감자를 조각해서 가져다 둔 닉스는 뿌듯한 얼굴로 가슴을 쭉 펴고 있었다. 감자인 것도 묘한데, 깎아 둔 모형이 울퉁불퉁한 데다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았다. 봐도 전혀 모르겠지만 엘로니아는 일단 칭찬했다.
“오, 와……! 닮았다! 내가 거울을 본 줄 알았네!”
[그치? 선물이니까 가져.]
“그래. 잘 전시해 둘게.”
이걸 대체 어디에 전시해야 하나 막막했지만, 그래도 저를 생각해서 노력했다니 마냥 싫지는 않았다. 닉스는 둘이 있는 이 시간을 퍽 좋아하는 듯했다. 침대 위에 그와 대충 엎어져 있던 엘로니아는 몸을 돌려 누웠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닉스를 향해 물었다.
“닉스는 내가 왜 좋아?”
[나 너 좋다고 한 적 없는데?]
“……그래. 그럼 왜 싫어?”
[싫다니! 난 그렇게 심한 말 한 적 없어!]
아니,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엘로니아의 표정이 점점 애매해지자, 닉스는 얼굴을 붉히며 큼, 목을 가다듬었다.
[난 그냥……. 정령사는 인간이잖아. 다 우리보다 일찍 생명이 끝난다고.]
“아…….”
[난 그러니까, 그냥……. 있는 동안 같이 오래 있고 싶은 것뿐이야.]
외형만 이럴 뿐, 닉스도 생각보다 긴 세월을 지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제법 어른스러운 말에 조금 감동을 받았다. 그런 마음인 줄도 모르고, 그간 계속 바빠서 더 미안했다. 엘로니아는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의 볼에 제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고마워, 닉스. 앞으로 같이 오래오래 지내자.”
[바보! 엘로니아, 바보! 그런 것도 모르고!]
이제 그의 투정도 좀 귀엽게 느껴졌다. 닉스는 낑낑거리며 그녀의 품에서 벗어났다. 못마땅한 듯 이불을 들고는 그녀의 얼굴 위에 휙, 던져 버린 그는 불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 살란 말이야. 늦었으니까 자. 일찍 죽으면 안 돼. 나랑 10만 피스 퍼즐 맞춰야지.]
10만 피스라는 말에 잠깐 현기증이 돌았으나, 그게 닉스의 애정표현이라는 생각에 엘로니아는 얌전히 잠에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무를 끝낸 카르벨을 두고 그레이터가 다가왔다.
“어제 말씀하신 서류는 집무실에 두었습니다.”
“그래. 지금 가지.”
뒤에서 고개를 숙이는 기사들을 뒤로한 채, 카르벨은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뒤따르던 그레이터는 당황한 듯 되물었다.
“이쪽은 집무실 방향이 아닌데요, 각하.”
“아니, 이쪽으로 가는 게 맞아.”
“……예?”
평생을 살아온 집의 구조를 갑자기 까먹었을 리도 없고. 그레이터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꿋꿋하게 걸음을 옮기는 카르벨을 말릴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도달한 곳은 엘로니아의 방이 있는 복도였다. 엘로니아가 있는 곳을 전담하는 시녀들이 보이고 나서야 그레이터는 알 수 있었다.
‘엘로니아 양을 뵈러 오신 거구나.’
그런 줄 알았거늘. 카르벨은 그저 복도를 지나갈 뿐이었다. 그녀의 방 앞에 잠깐 멈춰선 그를 에이미가 반갑게 맞이했다.
“오셨어요?”
“말해 둔 건.”
“아, 전에 말씀 주셨던 구두요. 예비 마님께서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럼 비슷한 것으로 더 준비하면 되겠군.”
이미 시녀들은 익숙한 듯 카르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참을 이유 모를 대화를 나누던 카르벨은 미련 없이 집무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레이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냥 얼굴이라도 뵙고 가시지 그러세요.”
“엘로니아가 아침잠이 많아.”
“……예?”
“비몽사몽해서 나를 잘 못 알아보더라고. 왔던 것도 모르던데.”
이미 몇 번을 시도했던 모양이었다. 카르벨은 한참을 돌아 집무실로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가벼웠던 옷에서 빈틈없이 꽉 맞춰 입은 슈트로 환복한 그는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입었던 옷처럼 편해 보였다. 꼿꼿하고 바른 자세로 한참 동안 서류를 보던 그가 딱딱하게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불쾌한 듯 이맛살이 잠시 우그러졌으나, 다시 서류로 고개를 숙였다. 그것도 잠시.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카르벨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렸다.
“엘로니아는.”
“예?”
“올 시간이 지났는데.”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망설이는 듯 밖을 왔다 갔다 하던 걸음은 큰 심호흡 소리와 함께 멈췄다. 이내 똑똑, 노크가 들리자 카르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답했다.
“들어와, 엘로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