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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로망 (67/234)

67. 로망2021.07.22.

“마드릭을 찾아오셨다고?”

로브를 쓴 남자는 불편한 기색으로 카르벨이 내민 종이를 보며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힐끔, 엘로니아까지 훑은 그는 대충 서류를 돌려주며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갑자기 마드릭은 왜요? 죽은 지가 언젠데.”

“죽었다고?”

카르벨이 재차 되묻자, 남자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공작께서는 그것도 모르고 오신 겁니까? 세상 뜬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유는 혹시 알 수 있나.”

“뭐, 사고였나. 저야 사돈의 팔촌 형님 사정까지 알 리가 있나요. 그냥 장례식 오라니 간 거지.”

남자는 멋쩍은 듯 입맛을 다셨다.

“일 년에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는 형님이에요.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

“아니. 흔쾌히 답해주어 고맙군.”

카르벨은 가볍게 답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로니아도 그런 그를 따라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헤일튼가의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마드릭은 서고 화재가 있던 전날, 로엘 황태자가 경비를 물리기 위해 만났던 이들 중 하나였다. 대부분은 그 사건 이후 화재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엘로니아는 이프리트가 보여준 과거 속 이들에게 찾아가 로엘 황태자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대부분은 이미 생을 달리 한 뒤였다. 이번 방문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르벨과 엘로니아가 마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엘로니아는 마차에 마주 앉은 카르벨을 응시했다. 그는 이전에 서고 경비를 담당했던 명단에서 마드릭의 이름에 줄을 긋고 있었다. 벌써 4명이나 같은 결과였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어떻게 다 죽었지?”

“원래 마법사들은 안 움직이고 골방에 갇혀서 연구만 하다 보니 건강이 안 좋아.”

“리프리 저하는 건강하신 편이었잖아요.”

엘로니아는 허약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서류를 옆의 빈자리에 놓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랬나.”

“당시 경비를 맡던 분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일찍이 돌아가시다니…….”

“속단하긴 일러.”

“마드릭이란 분은 나이가 많은 축도 아니었잖아요.”

“젊은 축도 아니었지.”

급작스럽게 짧아진 답에 엘로니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전과 다르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속에 다른 생각이 있다는 것 정도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묘하게 황궁에서 나온 이후, 그의 기분이 눈에 띄게 좋아 보였다. 아셀리에게 향수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해서인가? 그는 협박을 당하던 입장이니, 섣부르게 말을 못 했을 터. 대신 말을 해주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개선이 될지는 알 수 없기에 축배를 들기에는 너무 이르다. 한데 또 지금은 기분이 급작스럽게 가라앉아 보였다.

‘딱 봐도 마법사께서 돌아가신 일 때문은 아닐 테고.’

애초에 그는 생면부지 얼굴도 모르는 이의 안녕을 빌 만큼 자애로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원인은 하나였다.

“확실히 검을 잡는 사람이랑 마법사가 다르기는 하네요. 카르벨만 보아서 너무 익숙해졌나 봐요.”

엘로니아의 애매한 답에 그제야 카르벨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 정도로 익숙하다고 하면 곤란한데. 그대가 본 것은 아주 일부야.”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럼 더 익숙해져 봐.”

그는 창문 밖으로 그레이터에게 간단하게 손짓했다. 그 간단한 동작에서도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카르벨이 편히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을 꺼냈다.

“입궁했을 때.”

“……네?”

“아셀리 전하는 안 된다고 그랬잖아.”

“오……. 제가 그랬나요?”

“그대가 분명 그랬어.”

“제가 잠을 늦게 잤더니 요즘 기억이 잘…….”

지나고 보니 퍽 민망했던 말이다 싶었다. 그때야 이프리트가 보여준 과거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셀리 전하가 혈통집을 보았다는 건 거짓말은 아니었어.’

적어도 사실에 기반한 말이기는 했다. 엘로니아에게는 이 자체도 조금 어려운 문제였다. 솔직하게 카르벨에게 본 것을 말하자니 말을 꺼낼 타이밍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길게 끌고 가자니 숨기는 모양새라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안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프리트에게 다시 부탁해보고 싶은데…….’

기왕이면 조금 확실한 정보를 모아서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잔혹한 사건을 다시 보는 일 또한 엘로니아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이프리트가 다시 보여줄지도 미지수고 말이다. 엘로니아가 고민을 이어가며 그를 보고 있을 때. 눈이 마주치자 빙긋, 눈매가 접히도록 미소를 지은 카르벨이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단둘이 보는 일은 없게 할 테니까.”

“아, 알았어요.”

“원한다면 내 일정을 알려주지. 의심된다면 따라다녀도 상관없어.”

“아니, 그렇게까지 할 건…….”

카르벨이 얼마나 빼곡한 일정을 소화하는지 아는 입장에서 그를 따라다닌다는 건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입궁이야 어쩌다 한 번씩 하는 일이니 감당하는 것이지, 꼭두새벽부터 연무장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엘로니아가 떨떠름하게 답을 건넸는데도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묘한 그의 반응에 피할 곳도 없어 등받이에 딱 달라붙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카르벨은 대놓고 상체를 기울여 두 팔꿈치를 허벅지에 기댄 채 보란 듯 그녀를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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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파혼을 하더라도 안 된다고 했잖아.”

“그건 좀 월권이었네요. 그래도 카르벨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어요.”

“그럼 파혼을 안 하면 되잖아.”

엘로니아는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뜻인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는 사이, 카르벨은 여전히 빙글거리는 미소로 대놓고 물었다.

“아셀리 전하에게 향수에 대해서도 제법 매섭게 조언하던데. 내 약혼녀가 이렇게 무서운 면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

“어머, 어떡해. 저 너무 몰아붙였나요?”

어쩐지 아셀리의 표정이 좋지 않더라니. 조금 더 좋은 말로 해야 했나 싶어 그녀가 다급히 되물었다. 하지만 정작 화제를 꺼냈던 카르벨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다음부터는 아니다 싶으면 옆에서 찔러줘요. 전하가 향수를 쓰시는 게 불쾌해서 저도 모르게 말이 심하게 나갔나 봐요.”

폭군도 황제라고, 일단은 그녀가 황녀인 이상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게 맞다. 괜히 확실한 이유도 없이 사이가 틀어졌다가는, 서로 불편해지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정령사로 꾸준히 연금을 타 먹어야 하니까.’

엘로니아가 자신을 반성하고 있을 때,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카르벨이 툭 말을 던졌다.

“방금 한 말, 못 들었어.”

“……뭐가요?”

“방금 그대가 한 말. 무슨 말인지 못 들었다고. 다시 해 줘.”

엘로니아는 방금까지 한 대화를 곱씹었다. 마차 안은 조용했고, 움직이는 미세한 소음을 제외하고는 대화를 못 들을 정도의 방해는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헤일튼가의 마차는 누가 보아도 고풍스럽고 돈을 들인 티가 나, 일반 마차보다 훨씬 편안하고 움직임도 적었다. 엘로니아는 애매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헛소리하면 찔러 달라는 거요?”

“그 뒤에.”

“향수가 불쾌……. 아니, 다 들은 거 맞잖아요!”

뒤에 무슨 말이 나왔는지까지 명확하게 짚을 정도면 다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 뒤는 그리 중요한 말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엘로니아의 지적에 그는 태연한 투로 넘기며 말을 이었다.

“더 건방져도 돼. 그 정도 막을 능력은 있으니까.”

얼마나 능구렁이처럼 자연스럽게 넘어가는지.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카르벨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할 말은 다 끝난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그는 입을 다문 상태로 살짝 미소를 띤 채 좀 전의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 없이 보고 있는 것도 상당히 어색했다. 결국 눈싸움에서 진 엘로니아가 괜히 부끄러운 듯한 기분에 적당히 근육이 잡힌 그의 팔에 달린 슬리브 가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다시 본 그의 얼굴에는 웃음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진지한 질문인 듯했다. 잿빛 눈동자가 가만히,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멋쩍은 듯 제 목덜미를 한 번 쓸어내리며 물었다.

“우리 결혼이요? 딱히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절차는 아닌 듯한데…….”

“말고, 그냥 그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난 당신의 생각이 듣고 싶은 거야.”

파혼해도 아셀리 전하와 만나지 말라고 해서 그러나. 엘로니아는 답을 하기 조금 망설여졌다. 여태 보아온 ‘결혼으로 이뤄진 가족’의 형태는 그녀에게 결혼에 대한 환상을 전부 빼앗기 충분했다. 부모는 자식에게 돈을 갈구하고, 자식이 부모에게 헌신하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하고는 했다. 대체 가족이 무엇인지 그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제가 멋대로 끊고 싶다고 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벽하게 무시할 수도 없는. 그런 관계에 로망이란 말이 어울리는 걸까. 혼인조차 배경과 돈을 재고 따지고. 만에 하나 운이 좋게 사랑만 가지고 결혼한다 하더라도 그 끝을 장담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

‘펠런 백작도 그런 끝을 바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녀조차도 작위를 받은 뒤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가족은 연대책임이었다. 데브니 남작의 빚은 곧 남작 부인의 빚이었고, 엘로니아와 에릭스의 빚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게 된다면 제 남편의 빚이 될 것이 분명했다. 카르벨과 한 약혼에도 벌써 데브니 남작이 몇 번이나 껄떡거렸는지 생각해보면 그녀의 가정이 절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했다. 엘로니아가 답을 망설이자, 카르벨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파혼한 뒤에 혼자 저택에서 살고 싶다고 했던가.”

“네. 결혼에 로망은 없어서요.”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그냥 적당히 데이트하고, 각자 헤어지는 삶도 나쁘지 않아요. 요즘 그러는 사람들도 꽤 된대요.”

엘로니아의 답에 그의 커다란 손이 고심하는 듯 자신의 턱을 가볍게 문질렀다. 그는 작게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헤어지기 싫을 때가 있잖아.”

“그럼 며칠 같이 지내든가요.”

“계속 있고 싶으면?”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차피 있지도 않은 일을 가정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그녀는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이런 건 왜 묻는 거예요?”

“궁금해서.”

카르벨 역시 로망이라는 단어와 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애초에 의심을 벗어날 수단으로 결혼을 이용한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가벼운 호기심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행동과 말투가 너무 진지했다.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카르벨이 먼저 답했다.

“나는 그대랑 헤어지기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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