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2021.07.15.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르벨의 주먹에 들어간 힘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도 효과가 있는 걸까? 곁눈질로 그의 안색을 살피고 있을 때쯤, 느슨해진 그의 손가락이 곧 엘로니아의 손에 얽혀들었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행동이라 느릿한 그 일련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제 손을 전부 그에게 내어주고 나서야 엘로니아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 수 있었다.
“카, 카르…….”
그녀는 반사적으로 열었던 입을 빠르게 닫았다. 여전히 앞에서는 아셀리가 소개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화재는 들어서 이미 아시겠지만, 이 부근까지…….”
그녀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성심성의껏 설명하고 있었다. 리아티코 향의 원인이 아셀리 때문이라고는 하나, 황실 서고가 있던 공간을 보고 싶다고 요청한 사람은 엘로니아였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설명이지만 듣는 척이라도 해야 마땅했다. 아셀리의 음성에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주춤,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간단하게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카르벨이 단단히 붙잡은 탓이었다. 주먹을 쥐었을 때도 버겁게 느껴졌던 그의 손은 펼치고 나니 훨씬 컸다. 오히려 빠져나가려 꼼지락거릴수록 늪처럼 옭아매지는 듯했다. 붙잡은 손을 가볍게 당긴 그가 슬그머니 상체를 숙였다. 고개를 돌린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엘로니아.”
한결 편안해진 음성이 간지럽게 울렸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엘로니아는 불편해졌다. 낮게 울리는 음성과 그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느껴지는 가벼운 움직임이 그녀의 어깨 부근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대단한 말도 아닌데, 처음 듣는 것처럼 옅게 심장이 뛰었다. 미미하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미쳤나 봐. 여기 황궁이야, 엘로니아!’
애써 숨을 크게 들이쉬었으나 그리 큰 효과는 없었다. 굳이 이렇게 가까이서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 아니던가. 아니, 애초에 저런 간지러운 말에 면역력이 없는 탓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주변은 대부분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는 이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대수롭지 않은 일에 감사 인사를 받으려니 오히려 민망했다. 슬쩍 옆을 바라보자, 카르벨의 짙은 잿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고개를 기울인 그가 무슨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왜 그렇게 보지.”
“아, 아니……. 너무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그렇다고 멀찍이 설 수는 없잖아.”
엘로니아가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내자, 카르벨은 되레 마주 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엘로니아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가 말을 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좋아하는 줄 알았더라면 진작 말해줄 걸 그랬어.”
“아니에요. 특별히 좋아하지 아, 않았어요.”
“흐음…….”
가볍게 흘린 그의 침음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 뜻을 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카르벨이 눈매가 미세하게 휘었다. 얕게 실린 웃음을 알아챈 엘로니아가 눈동자를 굴리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카르벨은 집요하게 시선을 맞춰왔다.
“고마워, 엘로니아.”
“하지 마요. 분명 마, 말했어요.”
“제대로 배운 귀족이라면, 도움을 준 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내가 괜찮다니까요. 그러니까 그만 해요!”
“진심이야.”
얕게 깔려 있던 장난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온전히 그녀만 보인다는 듯 응시하는 카르벨을 보고 있자니 점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어디를 가도 눈에 띄는 외모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가식을 벗은 그는 한층 더 근사했다. 사람의 진심이란 이 정도로 인상을 단번에 바꿀 만한 것이었던가. 엘로니아는 선뜻 답을 내뱉을 수 없었다. 이럴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그녀는 배운 적도, 경험한 적도 없었다. 그 낯섦을 눈치챘는지 카르벨이 먼저 물러서 주었다. 언제 두통을 느꼈냐는 듯 그의 행동에 여유가 느껴졌다. 카르벨은 얽힌 그녀의 손가락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말했다.
“지금은 그걸로 됐어. 앞으로 익숙해지면 될 일이니까.”
숙였던 상체를 편 그는 처음 입궁했을 때처럼 허리를 곧게 폈다. 다른 점이라면 여전히 맞잡은 손 정도였다. 엘로니아가 크게 숨을 내쉬었을 때. 비로소 주변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용……하다고……?’
조금 뜨겁게 느껴졌던 주변의 공기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끼기긱, 엘로니아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앞을 향했다. 정면으로 분홍빛 눈동자가 보였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알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지는 아셀리의 굳은 얼굴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기껏 안내를 맡겨놓고, 저들끼리 시시덕거린 꼴이 되었으니 제아무리 정령사라 하더라도 실례였다. 엘로니아가 다급하게 입을 열려고 하던 찰나. 그보다 먼저 아셀리가 말을 건넸다.
“사이가 좋아 보이시네요.”
“아, 그. 하하……. 부끄럽네요.”
아셀리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분명 친절하고 상냥한, 에스피디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인데 서늘하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카르벨과 맞잡은 손을 빠르게 등 뒤로 숨겼다. 탈탈탈, 맞잡은 손을 떨어트리기 위해 엘로니아 나름대로 팔을 흔들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더욱 꽉 붙잡을 뿐이었다. 오히려 카르벨은 평소처럼 웃으며 대신 답을 건네기까지 했다.
“엘로니아가 과거를 읽다 보니, 화재 현장은 조금 무서워하는 듯하여서요. 실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전하.”
“……그럴 수 있지요. 저 역시 꽤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으니까요.”
아셀리는 뻔뻔하게 잘도 답하는 카르벨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화를 눌렀다. 그는 여전히 냉담했고, 또 공격적이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그녀를 우대해주는 듯 굴지만 말투와 눈초리가 곱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아셀리도 느낄 수 있었다. 아셀리는 입매를 늘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리아티코 향수의 효과가 있기는 한 거야?’
이성을 유혹한다고 알려진 리아티코 향을 몇십 배 진하게 개량한 향수였다. 그녀가 원하는 이에게만 통용된다는 연금술사의 말을 믿고 비싼 값을 치르면서까지 구매했거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르벨은 제법 향을 신경 쓰는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그는 쉽게 넘어오질 않았다.
‘거기다 귀찮은 정령사인지 뭔지까지 내세워서는…….’
자연스럽게 그 옆에서 마치 큰일이라도 난 듯이 큰 눈을 바삐 굴리는 엘로니아에게 시선이 갔다. 퍽 다정한 듯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여태껏 카르벨의 주변에 여자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다가가려던 이들이 제법 많았다. 카르벨은 그럴 때마다 친절하지만 적당히 거리를 둬 거절했다. 하지만 오늘 본 모습은 그간 카르벨의 인상을 완벽하게 뒤집어놓았다.
‘진심이라도 되는 양…….’
그럴 리 없다. 그와 같은 족속들은 절대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수 없다. 제 비밀을 털어놓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가짜 정령사에게 진심을 내비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셀리는 보란 듯 걱정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겁을 먹으실 정도였다니, 괜찮으신지 염려스럽네요. 제가 그래서 되도록 보지 않으시는 걸 추천해 드렸는데…….”
“걱정 끼쳐 죄송합니다.”
“어떻게, 질문이 있으실까요?”
예의상 건넨 말이었다. 어차피 카르벨이 뒤에서 그녀에게 해야 할 질문을 미리 숙지시켰을 터였다.
‘완벽하게 재건하는 건 어렵겠다느니, 구할 수 없는 책도 있다느니 같은 소리를 하겠지.’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건넸다.
“로엘 황태자 전하께서 왜 아셀리 전하를 부르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오라버니라면…….”
엘로니아의 말에 아셀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잠시 텅 빈 서재를 응시한 그녀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좋은 분이셨습니다. 막 황실로 들어와 예의를 모르는 저에게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던 모양이에요. 이것저것 책을 추천해주시기도 했고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말투에 엘로니아는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둘이 그리 돈독한 사이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물론 로엘 황태자의 성품은 인자하고 남의 잘못도 품을 만큼 온화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검보다는 책을 더 가까이했다는 사실도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다. 만일 다른 상황이었다면, 엘로니아도 그녀의 말을 믿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굳이 주변 호위와 감시를 물리실 필요는 없으시지 않나요.”
“제가 미숙하던 시절이라 흠을 가려주시려던 배려가 아니셨을까요.”
밤늦은 시간, 안 그래도 한적한 서고였다. 엘로니아는 무어라 더 묻고 싶었지만 아셀리가 크게 숨을 내쉬며 답하는 바람에 입을 다물었다.
“저도 불에 휩싸여 죽을 뻔했습니다. 그 일로 한동안 불 근처만 가도 겁을 먹었고요. 시간이 흘러 괜찮아졌다고는 하나, 역시……, 쉽지는 않네요.”
평온한 음색과 달리 아셀리의 손바닥은 긴장에서 비롯된 땀으로 눅진하게 눌어붙었다. 화재 당시 로엘 황태자가 보안을 담당하는 이들을 전부 물린 것은 조사로도 확인된 일이었다. 이는 카르벨도 알고 있을 터이니 예상했던 질문의 범위였다.
‘하지만 로엘 황태자가 불러서 나갔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설마, 진짜 정령사인가? 섬뜩한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아셀리는 그 생각을 지워냈다.
‘아니야. 데브니 남작이 비슷한 소리를 했으니, 그에게 들었나 보군.’
사이가 퍽 좋지 않다더니, 다 거짓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사이가 나빠도 혈육의 정은 정이라고, 제게 했던 것처럼 꺼내주는 조건으로 거래를 했다든가. 카르벨이라면 직접 빼낼 능력이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초조함으로 아셀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하지만 엘로니아의 자색 눈동자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인상을 쓰더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감사합니다. 힘겨우실 텐데 답해주셔서 감사해요.”
묻고 싶은 게 더 많았으나, 엘로니아는 입을 다물었다. 대놓고 더 답하기는 힘들다는 티를 내는데, 캐묻기도 곤란했다. 아직 가진 패를 다 보여주기에는 아셀리의 의도를 알 수 없으니 여기서 멈추는 게 맞다. 서고를 다 보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셀리는 출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여전히 독한 향은 지나간 길에 그대로 잔향을 남겼다. 아무래도 저 향이 신경 쓰였다. 카르벨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냥…… 기분 나빠.’
가끔 그냥 이유 없이 기분이 나쁠 때가 있다. 엘로니아는 스쳐 지나가는 아셀리를 향해 말했다.
“전하, 죄송하지만 향수는 바꾸시는 게 좋으실 것 같아요.”
“예?”
우뚝, 멈춰선 아셀리는 처음으로 굳은 얼굴을 하고 그녀를 마주했다.
엘로니아는 그런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약혼까지 한 이를 상대로 리아티코 향을 쓰시는 게, 저희는 이해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좀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에 어째서인지 아셀리의 안색이 창백해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