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내가 있잖아요2021.07.11.
카르벨은 정령이 속상해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지, 엘로니아를 지긋이 응시했다.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녀는 눈짓으로 침대 위를 가리켰다. 닉스가 삐졌다.
[내가 꼭 이프리트가 불의 정령이라서 하는 말은 아니야!]
불의 정령이랑 놀아서 그런가 보다. 안 그래도 닉스는 엘로니아가 은근히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유독 불만이 많았다. 그런데 대놓고 본인이 피하는 이프리트와 어울렸다는 소식에 마음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이럴 때 보면 애란 말이지…….’
혼자 어른인 척은 다 하더니. 엘로니아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카르벨에게도 닉스를 소개해줄 생각이었다. 전에 슬쩍 보아하니 닉스는 리아티코 향에 큰 두통을 겪는 듯했다. 연회 때 리아티코 향을 묻히고 왔다며 투덜거리던 그의 말을 떠올려보면, 향수도 액체라고 나름 잘 아는 모양이었다.
‘……삐지면 곤란하기도 하고.’
그래도 제일 먼저 본 정령인지라 나름 정이 들었다. 더군다나 자그마한 아이가 널따란 침대에 엎어져 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슬쩍 그에게로 상체를 기울인 엘로니아는 속삭이듯 은밀하게 말을 전했다.
“같이 좀 달래줘요. 나중에 입궁할 때도 이러면 카르벨도 곤란하잖아요.”
엘로니아는 눈을 부릅뜨고 엄포를 놓았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카르벨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어느새 친절한 미소를 띤 그가 더 상냥하게 답했다.
“그러지.”
음, 안 믿기는 눈치군. 숙였던 몸을 반듯하게 세운 그녀는 카르벨의 팔을 침대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널따란 침대 위에 엎어진 닉스는 그들이 다가온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오로지 닉스의 옆에 있는 님프만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슬그머니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리고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워낙 닉스가 작은 탓에 올라가지 않고서는 직접 만질 수도, 가까이서 대화를 나누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팔을 카르벨은 다급하게 붙잡았다. 묘하게 웃는 채로 굳은 듯한 그가 아주 자연스럽게 답했다.
“정령이라 하더라도, 공작 부인의 침대에 멋대로 올라가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아.”
“어차피 아무도 안 보이잖아요?”
“하지만 그대는 잘 보이지.”
그 말과 함께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더불어 그의 눈매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졌다. 보통 그가 못마땅한 상대가 나타났을 때 취하는 행동이었다. 연회에서 내키지 않은 상대와 인사를 할 때 꼭 저런 얼굴이었다. 정말로 순순히 올려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보이지도 않을 침대 위 닉스를 향해 까닥, 턱짓하며 말을 이었다.
“정식으로 예를 갖춰서 자리를 마련하지.”
“사람은 없고 잔만 있는 게 더 기괴해 보일걸요.”
“아무리 그래도 침대에 누워 우는 남자를 달래는 모양새는 좋지 못해.”
닉스가 침대에 누워있는 것도 맞고, 울고 있는 것도 맞다. 겉으로 보면 남자아이처럼 생겼으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뜻이 영 불순하게 들렸다. 엘로니아는 그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훑어본 뒤, 그녀를 붙잡고 있던 팔을 휙 떨쳐내었다. 아무리 그래도 울고 있는 닉스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무릎으로 침대에 오르자, 등 뒤에서 그의 단호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럼, 나도 그대의 침대에 누워 울고 있으면 이렇게 와서 달래줄 건가.”
누가 운다고? 카르벨이? 카르벨 헤일튼 공작이?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입을 벌린 채 그를 응시했다.
“그럴게요. 울면 연락해 주세요.”
그는 대단한 헛소리를 내뱉은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되물었다.
“나는 정령이랑 달리 보이기까지 하는데.”
“카르벨은 안 울잖아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엘로니아. 그대의 침대에 다른 이가 누웠다는 사실이야.”
“아니, 중요한 건 닉스는 자그마한 다섯 살 난 아이이고 안 보인다는 거예요. 카르벨은 좀 많이 크고, 잘 보이고.”
“……다섯 살?”
순간 움찔한 카르벨이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중얼거림에 엘로니아는 그제야 자신이 카르벨에게 닉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을 안 해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 눈에야 늘 어린아이로 곁에 있었으니 너무 당연하게 여긴 탓이었다. 그리고 그가 왜 반대했는지도 순식간에 이해되고 말았다. 닉스를 다 큰 남자로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사람과 거의 흡사한 크기로 말이다.
‘그래서 본인도 울면…….’
엘로니아는 어버버, 입을 뻐끔거리며 그를 향해 외쳤다.
“무슨 생각을 한 거예요?”
“…….”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침대에 걸쳐 앉으며 활짝 웃었다.
“글쎄. 궁금하면 상세하게 말할 수 있는데.”
“아뇨. 괜찮아요.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둬요.”
엘로니아는 활짝 마주 웃으며 답하고는 휙, 고개를 돌려 닉스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다니. 닉스가 정말 성인 모습이었다면 자신도 똑같이 할 생각이라는 건가. 놀라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도닥인 그녀는 엎어져 있는 닉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닉스. 나야.”
잠잠했다. 얼굴을 들 생각도 없는지, 닉스는 그저 침대에 엎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최대한 상냥하고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미안해. 닉스가 이프리트를 그 정도로 싫어하는지 몰랐어.”
[싫어하는 거 아니야.]
그의 뾰로통한 답에 옆에서 님프가 열심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이프리트는 중급 정령. 하급 정령인 그보다 능력도, 모습도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거기다 성질도 정반대인 불과 물. 그런 와중에 엘로니아에게 도움이 될 법한 능력을 가진 그가 나타나니 그를 더 좋아할까 봐 닉스는 저 혼자 끙끙 앓은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일부러 큰 목소리로 과장해서 반응했다.
“말도 안 돼! 닉스도 분명 엄청나게 대단한 일을 했는걸!”
그 소리에 훌쩍이던 닉스의 울음이 멈췄다. 여전히 고개는 이불에 폭 파묻혀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눈치였다. 이때다 싶어 그녀는 더욱 큰 목소리로 외쳤다.
“닉스가 리아티코 향에 고통받는 공작님도 도와주고, 펠런 백작의 독차도 알아냈는데. 내가 닉스를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정말?]
빼꼼, 고개를 든 그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심통 맞게 그녀를 흘겼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진 칭찬을 다 늘어놓았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첫 번째 정령이잖아. 당분간 이프리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해서, 닉스가 싫어지거나 하지 않을 거야.”
[이프리트가 더 잘해도?]
“닉스는 닉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엘로니아는 두 손을 펼쳐 카르벨을 가리켰다. 눈치가 빠른 카르벨은 분위기를 보고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래. 엘로니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다.”
닉스의 말이 들리지 않을 텐데도 그는 마치 정말 보이는 듯이 태연하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닉스는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좀 부어 있었다. 제 눈을 한 번 쓱 문지른 그는 볼을 우물거리다 힐끔, 그녀를 훔쳐보며 물었다.
[인간한테 내 얘기 했어?]
“으, 응! 닉스도 기억하지? 예전에 리아티코 향수가 잔뜩 묻었다고 했잖아.”
[내가 도움이 됐어?]
“당연하지. 직접 들어봐.”
엘로니아는 빠르게 카르벨의 옆으로 다가가 친근한 척 붙어 앉았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에게 활짝 웃으며 물었다.
“닉스가 많이 도움이 됐죠, 카르벨?”
그는 이 상황이 신기한 듯 빙글거리는 모습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빨리 답을 내지 않는 그에게 엘로니아는 복화술로 협박했다.
“그냥 그렇다고만 답해줘요. 빨리요.”
“음.”
잠시 침음을 내뱉은 그는 이내 팔을 뻗어 엘로니아를 다정하게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보이지도 않을 닉스를 향해 정중히 답했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 엘로니아와 잘 어울려주면 좋겠군.”
[……인간이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어쩔 수 없네.]
우느라 열이 오른 양 뺨을 닉스는 자그마한 손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뻐근했는지 코를 한 번 찡긋한 닉스는 포르르 날아와 카르벨과 엘로니아의 사이에 뻔뻔하게 앉았다.
[앞으로도 향수 때문에 힘들면 언제든지 찾아와도 돼. 특별히 엘로니아가 소개한 인간이니까 허락할게.]
“고마워, 닉스.”
이제야 마음이 풀렸는지, 그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엘로니아가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닉스는 가볍게 둥실 떠오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어딘가 이상했어. 리아티코는 원래 이성을 유혹하는 향이란 말이야.]
그러고 보면 엘로니아는 그 향을 맡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좋은 향은 아니었던지라 지독하다는 생각은 했어도, 카르벨처럼 두통과 같은 증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만나러 올 때는 아셀리 전하에게서 향이 나지 않았어…….’
그 향을 맡았을 때는 대부분 카르벨과 함께 있을 때였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닉스가 말을 이었다.
[그거, 좀 이상해서 님프랑 알아보고 있었는데……. 개량하면서 단 한 명을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한 명……? 그럼 다른 사람들은?”
[너는 우리가 가호하는 인간이니 예외인 거고,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아무 향도 안 날걸.]
***
“제가 안내를 맡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황궁 도서관이 불타 사라진 자리를 보기 위해 입궁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여전히 그 독한 향이 함께였다. 아셀리의 상냥한 시선이 카르벨에게 닿자,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답을 건넸다.
“……물론이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옆에 선 카르벨의 얼굴을 확인했다. 턱에 뻣뻣하게 들어간 힘이 그가 이 태연한 모습을 만들어내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를 대변하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은 여전했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선 경비대라던가, 주변에서 상시 대기를 하고 있는 시녀들 중 그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제야 엘로니아는 의문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연회 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거였어.’
리프리조차도 전혀 모르는 눈치지 않았던가. 그는 능숙하게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코를 찌르는 향이라면, 일찍이 어떠한 표현이라도 비췄으리라. 불에 타 사라진 황실 서고는 별관에서도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텅 빈 장소이다 보니 주변은 사람이 사용한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관리 잘 된 한적한 공간일 뿐이었다. 일부 벽은 다시 시공해서 올렸는지, 다른 곳보다 훨씬 새것으로 보였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아셀리가 한발 먼저 설명을 건넸다.
“꽤 큰 화재였죠. 이전에는 이것보다 보기 더 흉흉했답니다.”
살며시 뒤를 도는 그녀의 행동에 풍성한 드레스 자락이 원형으로 퍼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럴 때마다 리아티코의 향은 짙어졌다.
“당시 이쪽에는 도서관 서기 분께서 계시는 테이블이 있었고…….”
머리카락을 넘길 때도, 한 걸음을 움직일 때도. 모든 행동이 전부 향을 짙게 만드는 행동처럼 느껴졌다. 그럴수록 카르벨의 얼굴은 미세하게 굳어갔다. 엘로니아는 안 되겠다 싶어, 꽉 쥔 카르벨의 주먹을 제 손으로 가벼이 감쌌다. 놀란 그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엘로니아는 그에게 눈치를 주며 작게 속삭였다.
“너무 힘들면 말해요. 내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