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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파혼은 아직입니다 (63/234)

63. 파혼은 아직입니다2021.07.08.

  말투, 행동, 시선까지 카르벨의 모든 것이 여유로웠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엘로니아를 향하는 순간 느낌이 달라졌다. 분명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꼭 그가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묘한 괴리감에 그녀는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진짜 정령사라는 사실보다, 카르벨이 헤일튼 공작가 태생이라는 것만 입증하면 된다는 건가?’

그런 뜻으로 해석하자니 왜 마음 한구석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아쉬움? 미묘함?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본래의 색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미쳤나 봐. 정령사가 되더니 자의식이 천장을 뚫고 올라가네.’

실상 엘로니아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카르벨에게는 도움이 될 터. 그래서 한 소리일 것이다. 구태여 진실이 무엇인지 들춰내지만 않으면 본래 그가 목적하던 바를 이룰 수 있다. 그대로 얌전히 있다가, 시기가 되면 계약을 끝내면 된다. 오히려 대놓고 정령사인 척 나서는 것보다 쉽고 편안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괜히 그의 시선이 닿는 옆얼굴이 신경 쓰였다. 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지, 카르벨은 눈을 맞추며 느리게 웃었다.

“놀라지 않게 해 줘. 내 주변에서 더는 다치는 이를 보고 싶지 않거든.”

그의 말에 숨겨진 ‘더’가 누구인지는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전대 공작 부부. 그가 이렇게 다치는 것에 예민해진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내가 있으면 굳이 본인이 진짜 헤일튼 태생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 아닌가?’

하지만 여태 본 카르벨은 그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제법 노력하고 있었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을 텐데. 왜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걸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아셀리도 증거가 있었다면 그를 더욱더 압박했을 것이고, 리프리도 심증만 있을 뿐 확신하진 못했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묻어도 될 텐데. 가만히 그의 반듯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맞춰 카르벨이 가벼이 고개를 기울였다. 엘로니아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물었다.

“……전대 공작 내외분들을 많이 사랑하셨나 봐요.”

“……그렇게 보였나.”

“그래서 열심히 조사하시는 거잖아요.”

그는 궁금한 것이다. 자신에게 나눠준 사랑이 가족을 위한 신뢰에서 비롯된 것인지, 단순히 필요에 의해 입양된 자식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는지. 처음 공작저로 들어왔을 때, 시종조차 믿지 못해 거짓말을 하라 시키던 그였다. 그가 아무도 믿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본 정보를 신뢰하는 것도 무엇 때문인지 알 것 같았다. 조금 씁쓸한 듯 웃어 보인 그는 느리게 엘로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가벼이 문지른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런 쪽으로는 예리하지 않아도 돼.”

매번 커다랗게 보였던 남자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도 그들이 귀족의 전부라고 일컬어지는 가문을 내어주었을 때는 그만큼 신뢰한 게 아닐까. 정령에게서 짤막하게 보았던 전대 공작 부부는 적어도 앞과 뒤가 판이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이 카르벨을 어떤 이유에서든 사랑했다는 것을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전 재산이 제록나무뿐이라 이 가설에 배팅할 수 있는 돈은 없지만.

‘그래. 기왕 하는 김에, 잘 알아보고 알려주자.’

이혼을 하기 전까지, 적어도 그에게 제대로 된 진실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가족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고, 지금도 그 감정을 모르지만 그는 엄연히 사랑받지 않았던가.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그가 부러웠다. 그래서 조금 더 간절하게 알려주고 싶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 데브니 남작 부부가 잡힌 뒤, 상단들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간 불법으로 자금을 세탁했던 거대 상단 몇 곳이 무너지고, 반대로 성실하게 해온 곳들이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최근 귀족 가문들도 새로운 거래처를 트느라 활발히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 와중에, 상단주들 사이에서 기묘한 소문이 돌아다녔다. 그 소문이 귀족들 귀에 들어가는 일은 아주 쉬웠다.

“그거 들었어요? 최근 남편이 거래를 트며 들은 이야기가 좀 놀랍던데…….”

“아, 헤일튼 공작이 곧 파혼한다는 소문이요?”

“최근에 가짜 정령사가 아니냐는 말도 나왔고…….”

“그렇지만 이번에 황실 서고 재건에 참여하신다는 거 보면…….”

“거기서 밑천이 드러났을 수도 있죠.”

누구보다 소문에 빠른 이들이 상단주였다. 정세와 트렌드에 밝아야 무엇이 인기이고 시장의 흐름인지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의 입을 통해 들리는 이야기이니, 전혀 근거가 없는 뜬소문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다 믿을 건 못 되지만. 쑥덕거리는 이들 틈으로 누군가 엄하게 꾸짖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헛소문이에요.”

“페, 펠런 백작…….”

펠런 백작은 분노를 차분히 삼킨 채 굳은 얼굴로 부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상단 가문 출신인데다 소문의 주인공인 헤일튼 공작가와 제법 연이 깊은 그녀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펠런 백작은 다시금 그들에게 단호히 일렀다.

“최근 정령사님과 거래하는 상단도 그러하고,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두 분의 사이도 매우 화목하시고요.”

“아니, 저희는 그냥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설사 파혼이라 한들, 그게 흠이라면 저는 죄인이겠군요. 메티카에 자진해서 수감 해야 하는 걸까요?”

우아하게 앉아, 그들이 걸친 것보다 배는 더 비싼 고급 공작의 깃털로 만든 부채를 팔락이는 펠런 백작은 기세등등했다. 그녀가 눈으로 훑자 신나게 떠들던 이들은 모른 척 고개를 피했다. 하지만 이미 퍼진 말이 헤일튼 공작저까지 흘러 들어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뭐? 파혼?”

엘로니아는 갑작스럽게 들은 파혼이라는 두 글자에 저도 모르게 격하게 놀라고 말았다.

‘대체 누가 이렇게 감이 좋아?!’

카르벨을 제외하고는 누군가에게 언급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직 그럴 시기도 아니거니와, 일단은 사이좋은 약혼 관계로 보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엘로니아의 반응에 에이미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놀라셨죠? 저도 그랬다니까요! 그 말을 한 친구한테 단단히 일렀어요! 우리 마님이랑 주인님이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

“대, 대체 누가 그런 소문을 냈대?”

“모르겠어요. 상단 측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라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사그라들 거예요.”

에이미는 그녀가 상심했다고 생각했는지, 평소보다 힘을 실어 자신을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제록 나무에 관해 상단주와 이야기를 나눌 때도 묘하게 눈치를 보는 듯했다. 이런 소문 때문이었나. 제록 나무가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이 되고 있었다. 벌써 그녀가 한평생 벌은 금액의 배를 벌었다. 나중에 분위기를 보아서 괜찮은 저택도 하나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파혼 소문이 도는 걸 보니, 저택은 나중에 알아봐야겠네.’

괜히 의심의 씨앗을 뿌려서 좋을 것은 없으니 말이다. 엘로니아는 카르벨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건성으로 넘기며 말했다.

“나중에 카르벨에게 따로 얘기할게. 알려줘서 고마워, 에이미.”

안도하는 에이미를 본 뒤, 엘로니아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가 책을 보고 있자, 님프가 옆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같이 읽었다. 평범한 내용이었다. 초판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시중에 널린 것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끝이 조금 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 이런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책이 왜 그의 서재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카르벨이 황실에서 빌려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책의 그을린 자국이 화재 이후에 옮겨진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이프리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그는 그 이후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걱정스럽게도 닉스 역시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엘로니아는 슬쩍 님프에게 물었다.

“닉스가 요즘 안 보이네.”

닉스라는 말에 화들짝 놀란 님프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우물쭈물하는 것이 뭘 아는 눈치였다.

“혹시 님프는 닉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을까……?”

엘로니아의 시선을 피해 님프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님프는 진득한 엘로니아의 시선에 마지못해 소심하게 손짓을 했다. 온몸으로 엑스자를 그리는 것을 보아하니, 말하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엘로니아는 냉큼 답했다.

“걱정하지 마. 닉스에게 네가 알려줬다고 하지 않을게.”

은밀하게 속삭이자, 그제야 안심이 된 듯 님프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갑작스럽게 날아오르더니, 창문으로 슝 하고 사라졌다. 여태 본 그녀의 행동 중 가장 빠르고 기민했다.

‘뭐, 뭐야. 갑자기 어디 간 거야?’

님프가 사라진 방향을 얼떨떨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엘로니아, 잠시 시간 되나.”

카르벨의 목소리가 이어 들렸다. 곧이어 그가 황실의 직인이 찍힌 서신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황실 서고 출입을 허가한다는 연락이 왔어. 오늘 시간이 되면 갈까 하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열린 창문에서 무언가 빠른 속도로 휙 하고 날아왔다. 우당탕, 뭔가가 그녀의 침대로 엎어지는 소리에 엘로니아의 어깨가 짧게 튀어 올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카르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 그게 아니라…….”

침대를 바라보니 님프와 닉스가 한데 엉켜 있었다. 닉스는 얼굴을 침대에 박은 채 마구잡이로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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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다 그랬잖아! 정령사 따위, 이프리트랑 놀든지 말든지!]

강제로 끌고 온 것인지 님프는 그의 주변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님프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자, 닉스는 휙 고개를 들어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님프 미워! 왜 데려온 거야!]

아, 아아……. 곤혹스러움에 휩싸인 그녀가 에이미를 향해 눈짓을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카르벨은 단번에 그들을 물러나게 했다.

“잠시 엘로니아와 단둘이 있겠다.”

“예,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시녀가 물러가자, 카르벨이 미심쩍은 듯 한쪽 눈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 정령인지 뭔지 때문인가.”

“마, 맞아요.”

“그때 서재에서 본?”

“아뇨. 원래 처음부터 저랑 함께했던 정령인데…….”

엘로니아는 힐끔, 침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믿기지 않으실 거 아는데요.”

“이제 그대가 뭘 해도 이제 덤덤해지는 듯해. 괜찮다.”

“정령이……. 제가 음, 그 서재에서 본 정령과 놀아서 속이 상한 것 같아요.”

엘로니아의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닉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거든! 내가 걔랑 놀지 말라고 했는데 엘로니아가 같이 어울린 거잖아! 그 책도 갖고 있고!]

세간에서는 이런 반응을 삐졌다고 표현하지 않던가. 엘로니아의 말에 카르벨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지 눈꺼풀이 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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