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보이지 않았던 것들2021.06.27.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라는 내용은 그가 낸 소문이 아니었다. 단지 소문이 도는 것을 이용해 카르벨에게 돈과 에릭스의 취직자리를 뜯어냈을 뿐이었다. 이용은 했다지만, 멍청이가 아닌 이상 누군가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냐고 묻는다면 그는 그럴 리 없다고 펄펄 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곧 그의 돈줄인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지 않겠는가. 조사를 해 보니 아셀리와 유독 친한 가문의 영애들 입에서부터 시작된 소문인 듯했다. 데브니 남작의 말에도 아셀리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우아한 자태로 꼿꼿하게 선 그녀는 에릭스와 데브니 남작을 내려다보며 나긋나긋하게 답했다.
“재밌네요. 소문이란 게 잘못 흐르기도 하는 법이죠.”
“과연 이번에도 잘못된 소문일까 모르겠습니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데브니 남작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얼마나 즐겁게 보였는지, 옆에 앉아 있던 에릭스가 놀라 슬쩍 그를 말리기까지 했다.
“아, 아버지.”
“걱정하지 마라, 에릭스. 전하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게다.”
그의 말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마치 아셀리가 도와줄 것이라 당연하게 믿고 있었다. 싱긋,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 아셀리가 그에게 물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스승께 차리는 예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런. 처음 입궁했을 적에 인사 예법 하나 몰라 천한 티가 나던 꼬마를 도와준 보람이 없군요. 스승을 이리 버리는 겁니까?”
날카로운 말과 달리 능글맞은 음성이 꼭 장난을 치는 듯했다. 휘유, 휘파람까지 불며 여유를 부리던 데브니 남작은 씨익, 입매를 늘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로엘 황태자 전하와 사이가 좋지 않으셨더랬죠?”
“……예. 그게 문제라도 있나요.”
“그런 전하께서 황실 서고가 불타던 날. 새벽에 뭐 그리 좋은 관계라고 단둘이 은밀하게 만나셨을까요.”
“은밀하게 만났다라……. 황실 모독죄를 추가하고 싶은 모양이군요.”
부드러운 질책이자 경고에도 데브니 남작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폈다. 로엘 황태자를 비롯해 아셀리까지. 데브니 남작이 어린 시절 도맡아 역사를 가르쳤다. 특히나 머리가 커서 늦게 황실 인원이 되었던 아셀리는 데뷔탕트가 지나고 나서도 얼마간 데브니 남작에게 교육을 받았었다. 덕분에 화재가 나기 전까지 그는 퍽 황실 입궁이 잦았다. 그러던 그가 아셀리와 로엘 황태자의 대화를 엿들은 것은 아주 우연이었다. 다소 일방적인 황태자의 전언이었다. 물론, 그날 아셀리는 나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다음 날 화재가 난 것을 보면, 약속 날짜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데브니 남작은 제게 불리한 정보는 숨긴 채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아닙니까? 전날 황태자 전하께서 은밀하게 부르시는 걸 제가 다 봤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죠, 데브니 남작.”
“제가 생각을 해 보니, 황태자 전하만 안 계시면 아셀리 전하께서 황위를 이으시겠더군요.”
로엘 황태자의 성격은 물론, 그녀의 성격까지 그는 훤히 꿰고 있었다. 특히나 어릴 때에는 저가 다 큰 줄 알지만, 어른의 눈에는 손바닥 들여다보듯 쉽게 보이는 법이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아셀리는 배운 것은 없어도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천한 것의 교육을 맡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무리하게 낸 역사 문제도 일주일 만에 외운 것을 보면 여간 독한 게 아니었지.’
유독 온순했던 로엘 황태자와 비교하면, 아셀리는 어릴 때부터 그 성격이 남달랐다. 처음 그녀가 황궁으로 들어왔을 때, 전담 시녀들조차도 꺼려했다.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가문에서는 아셀리의 전담 시녀가 된다고 하면 거품을 물고 반대할 정도였다. 갑자기 들어온 무희 출신의 황비와 그 딸을 귀족 사회는 반기지 않았다. 비록 렌디먼 황제의 피가 반은 섞였다고 하나, 로엘 황태자가 있는 한 아셀리는 그저 언젠가 외교 목적으로 혼인하게 될 황녀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로엘 황태자가 없어진 지금. 아셀리의 평가가 어떠한가. 유일한 황위 계승자. 완벽하고 아름다운 제국의 미래. 울면서 그녀의 전담 시녀로 들어갔던 이들이 지금은 목에 힘을 주고 다니게 되지 않았던가.
‘이 모든 것이 황태자 전하가 돌아가신 뒤이다.’
로엘 황태자는 누구를 질책하고 해칠 인성이 못 되었다. 그런 그가 아셀리를 따로 부른 뒤, 화재로 죽었다라. 미심쩍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데브니 남작의 시선에 아셀리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되물었다.
“제가 황권을 탐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뭐, 그렇다기보다는……. 정령사도 있겠다, 재조사에 들어갈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얘깁니다. 크흠.”
그렇지 않고서야 가짜 정령사라는 소문을 내고, 카르벨과 무리하게 혼인을 추진했을 리 없다. 꺼내 주지 않는다면, 로엘 황태자와 했던 얘기를 흘리겠다는 협박이었다. 데브니 남작은 자신 있었다. 그가 엿들은 내용은 별 볼 일 없었으나, 둘 사이에 그런 대화만이 오고 가지는 않았을 터. 힌트는 주지 않은 채 빙빙 돌려서 협박하기 좋은 소재였다. 평소라면 충분히 생각해 본 뒤, 거절할 수도 있을 만큼 미미한 내용이었으나 지금은 조사관이 가까이 있지 않은가. 특히나 서고 재건까지 추진 중인 지금이 적기였다. 데브니 남작은 기대감 서린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곧 아셀리의 두 눈이 아름답게 휘어졌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우아하게 답을 내었다.
“조사관에게 말해 보시든가요.”
“……예?”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도와줄 거라 믿었다니. 모욕을 줄 생각이었다면 성공이에요, 데브니 남작.”
또각, 아셀리가 걸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책상을 돌아 천천히, 데브니 남작이 묶여 있는 책상으로 다가왔다. 상체를 기울이자, 그녀의 흐트러진 금발이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아셀리의 얼굴이 감춰지는 것과 동시에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냉정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녀는 데브니 남작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증거도 없는 데다, 장부까지 조작하면서 계속 말의 앞뒤가 안 맞는 그대를 누가 믿겠어?”
“저, 전하?”
“협박할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남작.”
그림자 진 얼굴 위로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언제 그리 온화했냐는 듯 맹렬한 기세를 띠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이 있다면 그를 찌를 정도로 격렬했다. 하지만 다시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그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뒤였다. 여전히 모든 이들이 칭송하는 침착하고 너그러운 황녀의 얼굴을 뒤집어쓴 아셀리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래도 가짜 정령사 소식은 고마워요.”
“그게 무슨…….”
데브니 남작은 처음 듣는 소식에 어리둥절하게 눈을 떴다. 분명 그의 입으로 엘로니아가 가짜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언젠가 아셀리와 티타임을 가졌던 때가 떠올랐다. 그 짧은 말실수로 거기까지 알아냈단 말인가? 그가 혼란에 휩싸일 무렵, 아셀리는 조사실 문을 열며 말했다.
“가짜 정령사에 장부 조작에. 데브니 가문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네요.”
그녀의 환한 미소에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는 혼이 나간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탕, 문이 닫힌 뒤에서야 데브니 남작은 팔이 묶인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해 격렬하게 움직이며 외쳤다.
“엘로니아, 엘로니아를 불러 줘! 카르벨 공작이라도! 당장!”
하지만 그의 외침은 텅 빈 조사실 안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 * *
“으음, 아닌 것 같아요.”
소파에 카르벨과 나란히 어깨를 맞댄 채 앉은 엘로니아는 서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카르벨은 그녀의 고갯짓에 서류를 넘겼다. 그 안에는 낯선 보초병과 황궁 마법사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그려져 있었다.
“여기에서는?”
“이 사람이 좀 비슷한 것 같아요!”
엘로니아는 사진 속 남자를 검지로 가리켰다. 그러자 카르벨은 조용히 그 그림에 만년필로 체크를 해 두었다.
포크를 입에 문 엘로니아는 심각한 그의 옆모습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황실에서 로엘 황태자가 직접 찾아갔던 이들을 색출해 내고 있었다. 어차피 서고 재건을 위해서라는 명목도 있기에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화재 이후,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이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시일도 퍽 오래된지라 관련된 사람을 아는 이도 적었다. 엘로니아는 퍽 심각한 얼굴로 명단을 재차 확인하는 카르벨을 보며 물었다.
“그만둔 지 오래된 이들인데, 찾을 수 있어요?”
“내가 제국 내에서 못 찾는 사람은 없어.”
“오…….”
그럼 혹시 문제가 생기면 외국으로 도망쳐야 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굴리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그레이터입니다.”
보좌관의 목소리에 엘로니아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을 하는 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벨은 되레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있어도 돼. 굳이 비킬 필요 없어.”
“에이, 그래도 일인데요. 제가 괜히 들었다가 나중에 덤터기 쓰면 어떻게 해요.”
“그대가 알아도 문제 될 일 없어. 있어도 그대에게 청구할 생각도 없고.”
묘한 신뢰감에 엘로니아는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고양이를 길들이면 이런 기분인가. 이전보다 친근하게 대해 주는 그가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 엘로니아는 애써 괜찮다는 미소를 지은 뒤, 그의 집무실에서 종종걸음으로 빠져나왔다. 그레이터에게 눈인사까지 전한 뒤, 엘로니아는 방으로 돌아왔다.
‘닉스랑 같이 카르벨의 서재에 가 봐야지.’
서재 책에 정령이 있다고 하니, 함께 찾아볼 심산이었다. 문제는 방에 돌아온 뒤. 그의 모습을 보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닉스!”
엘로니아의 목소리는 방 안에서 힘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싫어하더니, 기어코 거절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정작 나오라는 닉스를 대신해, 에이미가 들어왔다.
“저 부르셨어요?”
“아, 아니.”
“아, 제가 잘못 들었나 보네요!”
눈을 끔뻑이던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문 앞에 섰다. 평소보다 기합이 들어가 있는 그녀의 모습에 엘로니아는 넌지시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빠릿빠릿해? 무슨 일 있어?”
“주인님께서 마님을 잘 보필하라 하셨어요. 어제 시녀장님도 저보고 단단히 이르시던걸요.”
“왜? 주치의도 건강하다고 했잖아.”
아무래도 그녀가 쓰러졌던 일 때문인지 시녀들 사이에 말이 돈 모양이었다. 민망함에 엘로니아가 제 머리카락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리자, 에이미는 굳은 결의에 찬 듯 힘차게 말했다.
“두 번 쓰러지셨다가는 주인님도 같이 쓰러지시겠던데요.”
“카르벨이?”
엘로니아는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에이미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엘로니아가 들은 뒤였다. 그녀는 재촉하듯 에이미에게 되물었다.
“카르벨이 왜? 무슨 일인데?”
“으음……. 주인님이 말씀하지 말라 하셨는데…….”
“말 안 할게.”
엘로니아는 비밀스럽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믿으라는 듯 반대 손으로 약지를 들어 보인 것은 덤이었다. 그러자 에이미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 쓰러지셨을 때. 주인님께서 밤새 곁을 지키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