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딱 그 정도의 사랑2021.06.17.
‘그래. 연금도 거저 주는 게 아니니까.’
안 그래도 오늘 꼴사나운 모습까지 보였으니, 배로 열심히 해야지. 엘로니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그러나 정작 카르벨은 조금 가벼운 답을 꺼냈다.
“그리 급한 일이십니까, 폐하.”
“재건할 때가 되었으니 말일세.”
황제의 답변에 카르벨의 몸이 움찔했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으나, 가까이 있던 엘로니아는 느낄 수 있었다. 슬쩍 그의 안색을 살폈으나,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는 없었다.
‘착각인가?’
애초에 무슨 일 때문에 불렀는지도 엘로니아는 들은 바가 없었다. 그래서 더 긴장되었다.
‘제발 정령들이 말을 잘 들어줄 수 있는 내용이어라. 제발……!’
정령사가 무엇을 하는지 살아서 알려줄 선임이 없으니 막막하기만 했다. 잠시 뜸을 들인 렌디먼 황제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10년 전에 불탄 황실 서고를 재건할까 하네.”
황실 서고. 10년 전, 갑작스러운 화재로 불타 사라진 곳이었다. 당시 어렸던 엘로니아도 어렴풋이 멀리서 올라오는 불길과 연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스피디 제국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렌디먼 황제의 뒤편에서 서 있던 아셀리가 우려스럽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아버지.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니다. 정령사를 자연이 보낸 것을 보면 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겠느냐.”
렌디먼 황제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로엘을 이제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됐지.”
로엘 에스피디. 10년 전, 생을 마감한 유일한 황태자의 이름이 그의 입을 통해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제국에서 황실 서고 화재를 모르는 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 사건 이후 황후까지 서거하여, 한동안 제국민들은 화환이나 축하를 뜻하는 물건을 길거리에 내놓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엘로니아는 조금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일전에 황궁의 정원을 지날 적, 님프는 과거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 속에서 헤일튼 전대 공작 부부는 로엘 황태자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헤일튼 공작이, 그것도 제 조카에게 고개를 숙일 정도면…….’
헤일튼가는 대대로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기사들의 우상으로 손꼽히며, 언제나 황제의 신뢰를 받아온 헤일튼 공작이 사과를 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심한 잘못이란 말인가. 짚이는 것이 없으니, 선뜻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이 상념을 잘라낸 이는 다름이 아닌 아셀리였다.
“서고 재건의 총 관리는 제가 맡기로 하였습니다.”
한 걸음, 렌디먼 황제의 뒤에서 나온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렌디먼 황제는 몸을 일으키며 조금 힘겹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 몸은 이제 노쇠하여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 마침 아셀리가 흔쾌히 이 건을 맡아 주겠다 하여 일임했다.”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게 해 보겠습니다.”
그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아셀리가 그러더군. 정령사와 제법 친분이 있다고.”
“아, 네? 예……. 그냥 차를 몇 번…….”
“안 그래도 마음 두고 지낼 이가 없는 듯해, 마음이 쓰였는데. 그렇다면 이 늙은이보다 젊은이들끼리 하는 것이 더 좋겠어.”
아니, 아니에요! 그렇게 마음 둘 정도로 대단한 대화를 한 적이 없다고! 하지만 엘로니아의 외침은 연회장을 나서는 렌디먼 황제에게 닿지 못했다. 부탁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사라지자, 아셀리는 상단에서 걸어 내려왔다. 마치 제가 맡는 게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면서도 황족 특유의 오만한 기운이 느껴졌다. 확실히 차기 황제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들의 앞에 선 아셀리는 상냥하게 말했다.
“앞으로 함께 서고를 잘 재건해 보도록 해요, 엘로니아 양, 카르벨 공.”
이에 카르벨은 우려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무엇이 문제죠.”
“화재의 피해자이시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미쳤나? 엘로니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다행스럽게도 이 큰 연회장에는 셋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사람은 없었다. 멀찍이 대기 중인 시녀와 시종들이 영 거슬렸으나, 이 자그마한 대화가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엘로니아와 달리, 당사자들은 개의치 않아 했다.
“서고는 황실의 재산이에요. 제 상처가 크다고는 하나, 앞으로의 제국을 위해서라도 부딪혀야죠.”
아셀리는 태연하게 손을 뻗어 멀찍이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시종은 냉큼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아셀리는 한 뭉텅이를 엘로니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기존의 자료를 토대로 만든 황실 서고에 있던 책 리스트입니다. 정령사님께서 확인해 보시고 빠진 것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대충 훑어보니 수많은 책의 제목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굳이 정령사가 필요한가 싶을 정도였다.
‘이 리스트대로 구비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직접 불렀을 때는 이유가 있을 터. 황실 서고를 가본 적 없기에 그녀는 일부러 질문을 삼켰다. 그런 그녀를 대신해 카르벨이 답을 내주었다.
“양이 상당하니 정리되는 대로 입궁하겠습니다.”
“물론이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부탁해요.”
그녀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과 구두가 맞닿아 울리는 소리가 또렷했다. 그런 그녀의 걸음마다 검은 그을린 자국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놀란 엘로니아는 제 두 눈을 한 번 세게 감았다 떴다.
‘뭐야, 연기?’
일전에 카르벨의 방에서도 본 적이 있었다. 닉스가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던 것과 형태나 느낌이 비슷했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무언가 말을 거는 것도 같은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걸 다른 데서도 느껴본 것 같은데…….’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카르벨의 서재가 떠올랐다. 그 책이 그녀를 부르는 기분이 들었을 때도 딱 이런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다. 엘로니아는 다소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그녀의 부름에 아셀리가 걸음을 멈추었다.
“말씀하세요, 엘로니아 양.”
그녀가 뒤를 돌자 검은 연기는 사라졌다. 막상 불러 놓고 나니 괜한 짓을 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부른 이상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터. 엘로니아는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나중에 화재가 난 황실 서고가 있던 장소를 볼 수 있을까요?”
“어쩌죠. 현재 그곳은 잔해를 다 치워서 남은 게 없는데.”
“괜찮아요. 위치라든가 분위기만 보면 돼요.”
너무 무리한 요구일까. 어쨌거나 아셀리는 화재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보통 이런 일을 당하면 후유증을 앓고는 하니, 조금 무례했던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로니아는 빠르게 사과를 건넸다.
“어려우시면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정령사님이 재건을 위해 힘써 주시는데 필요하다면 보여드려야죠. 언제든 연락 주세요.”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해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헤일튼가로 돌아가기 위해 황궁 복도를 가로지르던 엘로니아는 팔락, 서류를 넘겼다. 그 안에는 진귀한 책부터 이제는 구하기 힘들 초판본까지 다양한 책들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 슬쩍 붙잡았다.
“위험.”
고개를 들자, 기둥이 바로 코앞이었다. 카르벨이 잡아주지 않았다면 곧장 얼굴을 박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엘로니아는 머쓱하게 감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열심히네. 정령사로 처음 맡은 일이라 그런 건가.”
“오늘 연회도 망쳤겠다, 열심히 해야 면이 서죠.”
엘로니아는 다짐하듯 입매를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를 본 그는 건성으로 답했다.
“그렇게 열심히 안 해도 돼.”
“예? 왜요?”
“어차피 완벽하게 복구는 못 할 테니까.”
“아, 그래요. 제가 봐도 희귀한 책이 너무 많아요.”
적당한 동의를 건네자, 카르벨은 다시금 말을 정정했다.
“거기에 적힌 책이 다가 아닐 거야.”
“어째서요? 황실에 들어가는 책들은 다 검수를 받는다고 들었는데…….”
“검수를 받을 수 없는 책도 있기 마련이거든.”
카르벨의 덤덤한 답에 엘로니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무래도 황궁에서 물을 질문이 아닌 듯했다. 그녀의 눈매가 조금 사나워지자, 카르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적당히 해. 조금 놀면서, 시간도 끌고.”
“세금을 축내라는 방법을 참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네요.”
“기왕이면 조금 더 오래 끌면 좋고.”
카르벨의 눈매가 슬며시 접혔다. 서고 복원이 불가능하다는데, 그가 기뻐한다. 대체 이게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내가 서고 복원을 제대로 못 하면……. 어떻게 돼요?”
“글쎄. 나와 평생 복원에 힘을 쓰겠지.”
“나중에 폐하께서 독촉하면 어떡해요?”
“그럼 결혼을 한다고 하고 한 이삼 년 정도 신혼여행을 갈까.”
이게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계획이란 말인가.
“무슨 미래 설계가 이렇게 대충이에요?”
“그대는 다른가.”
“다르죠. 저는 돈을 모아서 작은 집을 사서 정원도 가꾸고 돈 펑펑 쓰면서 살 거라고요.”
그녀의 말에 카르벨이 잠시 인상을 썼다. 그는 심각하게 되물었다.
“기왕이면 집은 큰 게 좋아.”
아니, 누가 그걸 몰라? 혼자 사는데 큰 집이 왜 필요하며, 그 관리는 어떻게 할 거란 말인가. 잠시 할 말을 잃은 엘로니아가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흘겼다. 그러나 카르벨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왜. 이삼 년은 싫은가.”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엘로니아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묘하게 뭔가 다른데, 뭐가 다른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다. 고개를 기울이며 책의 목록을 다시 살피자, 그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독촉은 하지 않으실 거다. 그 정도 확신은 있어.”
하기야. 로엘 황태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슬퍼 보이던 사람이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감히 재단할 수 없어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을 주고받는 가족을 보면 부럽다. 동시에 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렌디먼 황제도 그리 로엘 황태자를 사랑했다면서, 결국 재혼까지 해서 아셀리를 낳지 않았던가. 그의 애정을 없는 일이라 치부하는 건 아니다. 황제가 첩을 두는 것이 역사상 없던 일은 아니지만, 기묘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심지어 아셀리는 로엘 황태자가 태어나고 몇 년 뒤에 태어나지 않았던가. 결국 가족 간의 사랑이란, 딱 그 정도인가 싶다. 엘로니아는 제 씁쓸한 기분을 숨기기 위해 애써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복도 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아까 그거 아냐?’
엘로니아가 걸음을 멈추자, 카르벨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지?”
“잠깐만요. 우리 좀 천천히 가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검은 연기는 한 방에서만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르벨의 눈치를 보아하니, 그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정령인가?’
엘로니아의 경험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전부 정령들이었으니 말이다. 사람의 형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연기일 수도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무렵. 그녀의 발밑으로 퍼지던 검은 연기가 훅, 엘로니아에게 덤벼들었다. 훅,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곧이어 익숙한 감각이 그녀를 과거 속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