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이혼이란2021.06.06.
“펠런 백작의 아버님 상단은 어떠세요?”
이제는 홀로 가꿔나가고 있는 펠런가의 테라스는 이전과 달리 화사한 꽃들이 가득했다. 이전과 달리 조금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였다. 단지 시녀보다는 하녀가 많았고, 기사보다는 용병이 많다는 것이 일반 귀족가와 다른 점이겠지만 말이다. 백작 부인에서 작위를 넘겨받아 펠런 백작이 된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 그래도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시더라고요. 주변의 친한 상단은 벌써 감사에 들어간 경우도 셀 수 없다면서…….”
“그, 그 정도래요?”
“네. 어찌나 말이 많은지. 과한 추징금 때문에 소규모 상단은 문을 닫기도 했어요.”
“아니, 이 미친……!”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으려던 엘로니아는 빠르게 입을 닫았다. 격한 반응에 펠런 백작의 놀란 시선이 엘로니아의 불끈 쥔 두 주먹으로 향했다. 그녀는 슬그머니 손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펠런 백작은 눈을 끔뻑이며 새삼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실 줄이야…….”
“하하, 하……. 너무한 처사에 저도 모르게 흥분하고 말았네요.”
엘로니아는 다급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잔을 들었다. 적당한 온도의 차로 애써 분노로 치솟았던 마음을 달랬다. 아직 그 누구도 내무부에서 만행을 벌이고 있는 이가 엘로니아의 동생, 에릭스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엘로니아가 이러했으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어차피 그녀는 모르는 일이다. 평생 얼굴을 본 시간보다 못 보고 산 시간이 더 길었으니, 솔직하게 남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그러한데…….
‘왜 잘못은 에릭스가 하고 죄지은 기분은 내 몫이냐는 말이야!’
엘로니아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렇게 어려울 때, 굳이 선물은 안 보내셔도 됐는데…….”
“저 이제 가진 건 돈뿐이에요, 엘로니아 님.”
가볍게 건넨 말에 펠런 백작은 뿌듯하게 답했다. 최근 펠런 백작이 선물이랍시고 고가의 사치품을 보내는 바람에 인사와 답례 차 마련한 자리였다. 그녀가 작위를 넘겨받은 뒤, 오랜만에 만났지만 표정은 한층 밝아 보였다. 펠런 백작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저희 집안에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아요. 이번 연회에 사용해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랍니다.”
“펠런 백작…….”
거의 마차 한가득 보내놓고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듯한 반응이라니. 딱 그녀가 꿈꾸던 삶이 아니던가! 엘로니아는 감동과 부러움을 가득 담아 입을 열었다.
“저는 백작과 이렇게 종종…….”
“어쩐지. 요즘 난리라면서 마석 장신구를 단체로 구매하는 게 신기하다 했지.”
순간 그녀의 옆으로 불쑥, 누군가 손을 뻗어 쿠키를 집었다. 놀란 엘로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키레일이 앉아 있었다. 그는 로브를 대충 걸친 채 태연하게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반사적으로 펠런 백작을 확인했으나, 그녀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듯 놀라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경악하듯 되물었다.
“어, 어떻게 들어왔어요?”
“이래 보여도 연금술사인데, 이 정도도 못 뚫어서 되겠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녀의 외침에 키레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펠런 백작에게 말했다.
“VIP 고객님, 저택 경비가 영 허술한데. 나중에 괜찮은 마석 하나 소개해 드릴까요?”
이 와중에 장사를 하고 있다.
“아, 전남편을 따르던 기사들이 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얼떨결에 펠런 백작도 답을 하고 있었다.
“그래. 용병들이 어째 저택을 그리 잘 아는 느낌은 아니더라니.”
키레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옆에 앉아 있던 엘로니아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 걱정하지 마요. 공작가는 기사부터 공작까지 어찌나 팍팍한지, 이렇게 들어오는 건 엄두도 못 내니까.”
“아, 예…….”
이걸 기뻐하며 들어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엘로니아의 떨떠름한 반응에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요즘 상단들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까? 내가 오죽하면 이렇게 직접 영업까지 나서겠어.”
“키레일 씨의 상단도 내무부에서 조사를 들어가나요?”
제대로 된 가게라고 보기 힘든 곳이라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엘로니아의 질문에 키레일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니?”
“예?”
“우리는 신고도 안 되어 있거든. 그럼 은밀하게 거래하는 의미가 없잖아요.”
아니, 그럼 대체 가게가 왜 힘들다고 한 거야? 어이가 없으니 오히려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키레일은 꿋꿋하게 쿠키를 마저 먹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고객 중 하나가 발길이 뚝 끊겼거든요. 알아보니 이번 일에 타격을 좀 받은 모양인데.”
“아, 안 됐네요.”
엘로니아는 건성으로 반응을 건넸다. 그러자 다소 가벼운 듯 편안하게 말을 잇던 키레일이 씨익 입매를 늘였다. 그는 명확하게 엘로니아를 보며 말했다.
“그래서 좀 알아봤는데, 엘로니아 양. 에릭스라고 알죠?”
왜 왔나 했더니. 경비가 삼엄한 공작저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직접 온 모양이었다. 이렇게 찾아왔을 때는 이미 다 알고 왔을 터.
“네. 연 끊은 지는 좀 됐지만, 제 생물학적 동생이에요.”
엘로니아는 덤덤히 답했다. 동생의 잘못이라 해서 그녀가 책임져야 할 일은 아니니까. 키레일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내무부에 들어간 건 알고 있었어요?”
“네. 소문과 이름을 얼핏 듣고 알았어요.”
“오, 그럼 그 자리, 헤일튼 공작이 꽂아준 것도 알고 있겠네?”
카르벨이? 순간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애써 침착한 척 가다듬던 표정을 관리하기 쉽지 않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카르벨이 에릭스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잘못 알았겠지. 대체 무슨 연으로 그런 대단한 자리에 앉혀준단 말인가. 하지만 키레일은 고양이 같은 눈매를 동그랗게 뜨며 다시 한번 단호히 말해주었다.
“카르벨 공작이 직접 내무부에 소개서를 써 주었다던데. 몰랐어요?”
*** 황실에서 연회가 열리는 저녁. 마차에서부터 엘로니아는 유달리 조용했다. 침묵보다는 어색해도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던 그녀였기에 이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특히나 펠런 백작을 만나고 오면 한층 더 생기가 넘치던 엘로니아였다. 카르벨은 연회에서 많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힐끔, 그녀를 살폈다. 미소를 짓고 있으나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혼이라도 생각하고 있나.’
정식으로 황실에 임명도 받았겠다, 그녀의 말대로 이따금 이상한 구석이 없지는 않았다.
‘진짜 정령사……인가.’
그래서, 이제는 그가 필요 없다는 뜻인가. 최근 그녀가 운영하는 상단이 돈을 번 것은 아니었다. 제록 나무로 만들어진 목검이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목덜미가 서늘했다. 요즘 상단들 상황이 안 좋다고 들었는데, 제록 나무라면 이 불황 속에서도 거래를 해볼 만한 재료였다. 하지만 조사 결과 따로 판매를 하거나 자금을 융통한 정황은 없었다. 확실하게 엘로니아는 아직 독립할 재력은 없었다.
‘펠런 백작을 만났으니까. 그쪽에서 도와줄 수도 있는 거고.’
최근 이혼을 한 사람이니 충분히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겠나. 카르벨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왜? 어차피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나?’
분명 그랬다. 가짜 정령사라 생각해서 편히 답한 것도 있겠으나, 애초에 그의 목적이 달성되면 엘로니아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그저, 자신의 출신만 황실에 확고히 해주면 될 일이다. 아셀리의 입만 막을 수 있으면. 그거면 된다. 분명 그런데.
“무슨 일 있나.”
카르벨은 결국 참지 못하고 엘로니아에게 물었다. 다소 충동적이었다. 무슨 답이든 그녀의 입에서 나와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앞을 보며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자줏빛 눈동자는 적당한 친절을 익숙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솔직한 편이었다. 그에게 슬프거나 서운한 일이 있으면 가감 없이 얼굴에 드러났다. 본인은 퍽 잘 숨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하지만 지금 이 얼굴은 이전까지 보였던 모습과 달랐다. 초조함으로 심장이 낮게 뛰었다. 엘로니아의 입이 열리는 순간까지 그리 긴 시간도 아닌데 유달리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카르벨,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질문이…… 모호한데.”
“그냥, 전부 다요.”
그녀가 지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출생? 제가 부모를 죽였는지에 대해? 아니면, 아셀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령사를 찾은 이유? 무수한 물음표가 그를 잡아먹는 기분이었다. 이 중에 무엇 하나 그녀에게 말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떠날 것이다. 그렇게 친했던 리프리가 그랬던 것처럼. 방계 사촌들이 단번에 그를 내치고 가문을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아셀리가 그의 약점이랍시고 숨통을 죄어 오려고 들었던 것처럼.
“아니. 없어.”
카르벨의 답에도 엘로니아는 조용했다. 그러고는 한참 만에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요. 믿을게요.”
믿는다니. 뒷말이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거슬렸다. 여전히 제 팔을 감싼 엘로니아의 손이 조금은 차갑게 느껴졌다. 뒷말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 그가 입을 열려던 찰나.
“아아, 정령사님. 정식으로 임명받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통에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했다. 엘로니아는 지난 연회 때 본 이들과 친한 척 담소를 나누었다. 여자들의 대화에는 빠져주는 것이 예의이거늘.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엘로니아가 슬그머니 붙잡았던 그의 팔을 손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카르벨, 주벨 후작께서 찾고 계신 것 같아요.”
눈치껏 자리를 비키라는 뜻이었다. 카르벨은 어쩔 수 없이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건네고는 그를 찾아 헤매던 후작의 인사를 받았다.
“아, 공작. 내 안 그래도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네.”
그의 말에 따라 고개는 습관적으로 끄덕였으나, 온 신경이 엘로니아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끄러운 연회장 속, 그들의 음성이 그리 또렷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엘로니아가 몇 번 진심으로 웃기도 했다.
‘저렇게 웃기도 하는구나.’
제게 웃어준 적이 있던가. 그녀는 제 의무를 다하겠다고 했다. 그게 비록 제록 나무 묘목을 준 그에 대한 보답이겠지만, 어쨌거나 카르벨의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은 성실히 지키는 사람이니 믿으면 된다. 그리고 그 끝이 오면, 이혼하면 된다. 순간, 입장을 알리는 음성이 그의 상념을 흐트러뜨렸다.
“데브니 남작과 에릭스 데브니 입장하십니다!”
우렁찬 음성과 함께 이전과 달리 온갖 장신구는 다 달은 듯한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르벨은 곧장 엘로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잔뜩 굳은 얼굴로 그들을 본 뒤, 빠르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들의 입장에 환호보다는 수군거림이 더 컸다.
“최근 내무대신의 보조로 들어갔다던 분, 맞죠?”
“어느 집안 자제인가 했더니, 데브니 남작가였군.”
“데브니 남작은 좋겠네. 자식 둘을 다 성공시켰으니.”
“못 들으셨어요? 요즘 소문에 아들을 내무부에 앉힌 게 사실 카르벨 공작이라는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