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자리 하나2021.05.30.
내무대신의 보조라니. 돈이 흐르는 곳의 중심. 어디로 자본이 흐르고, 누가 얼마큼의 재력을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내무대신이 아니던가. 더군다나 세금을 관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맥도 늘어나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만 앉으면 에릭스의 앞길은 탄탄대로구나!’
그냥 적당히 황실에 자리 하나만 마련해줘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데브니 남작은 애써 당연하다는 척 고개를 들었다.
“대화가 잘 통해서 좋군.”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그쪽으로 서신을 보내라 일러두겠습니다. 생활비도 저택으로 매달 보내드리죠.”
착착, 말하지 않아도 카르벨은 알아서 답했다. 금액을 조금 더 세게 부를 걸 그랬나. 아쉬움이 남았지만 지금도 충분히 거액이었다. 정 모자라다 싶으면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라는 사실이 변할 리 없으니, 언제든지 그 문제로 다시 돈을 뜯어내면 될 일이니 말이다. 금액을 조정하던 카르벨은 빙긋 웃는 얼굴로 그를 지켜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면. 엘로니아의 비밀은 지켜주시는 겁니까?”
“이거, 공작께서 나를 너무하게 보고 있었구먼.”
데브니 남작은 정말 안타깝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내 아무리 출가한 딸이더라도 자식인데. 설마하니 가짜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키길 바랄 리가 있겠는가.”
“엘로니아가 듣는다면 감동 받을 이야기군요.”
“그 애가 이리도 제 부모의 마음을 모르니 원. 하여튼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나.”
데브니 남작은 단언할 수 있었다. 엘로니아의 약점은 앞으로 그에게 주기적으로 돈줄이 되어 줄 정보이다. 어떤 멍청이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쉽게 버리겠는가. 데브니 남작의 호언장담에 카르벨은 싱긋 기쁜 듯 웃으며 답했다.
“그럼 믿겠습니다, 남작.”
데브니 남작은 만족스러운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가벼운 걸음으로 카르벨의 집무실을 떠났다. *** 엘로니아는 초조하게 카르벨의 집무실을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앉아 지켜보던 카르벨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앉아서 차라도 한잔하지 그래.”
“공작님, 정말 걱정되지 않으세요?”
“어떤 점에서?”
“아버지가 제가 가짜 정령사라는 소문을 낸다잖아요.”
그가 설마하니 이렇게까지 일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만약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라고 판명 나면 데브니 남작가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입을 다물고 있을 줄 알았다. 데브니 남작은 누구보다 끔찍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니 말이다. 하녀들까지 알고 있을 소문이라면 암암리에 제법 크게 퍼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짜 정령사를 누구보다 필요로 하며, 들키지 않기 위해 계획까지 짜 놓던 카르벨은 태연한 모양새였다.
“소문일 뿐이야.”
찻잔을 내려놓은 그는 평온했다. 애초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조차 없는 눈치였다. 그는 눈짓으로 슬쩍 케이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보다, 아셀리 전하가 방문하셨다고.”
“아, 맞아요.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어요.”
엘로니아는 부리나케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잔뜩 몸을 앞으로 기울인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황녀님 질문에 답을 좀……. 그렇게 했거든요.”
“그렇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카르벨의 황금빛 눈동자에 의문이 실렸다. 괜히 그 시선이 민망해 엘로니아는 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공작님이 어떤 것 같냐고 물으셔서……, 거기에 대한 답을, 그게……. 좀…….”
“험담이라도 했나.”
곤란해하는 그녀를 보는 카르벨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어차피 황실에 들락날락하는 카르벨이라면, 언제고 아셀리를 만날 테니 미리 말을 꺼내두는 게 맞다. 엘로니아는 한 입도 대지 않은 그녀의 찻잔을 노려보다시피 하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낮에 상냥하고 밤에 거칠다고 했어요.”
“……뭐라고?”
“나, 낮에……!”
굳이 한 번 더 묻는 그의 질문에 반쯤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엘로니아의 시야에 잔뜩 장난기가 서린 카르벨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씨익, 입매를 기울이며 답했다.
“그런 취향이었군.”
“오해하지 마세요. 제 취향은 거친 쪽보다 다정한 쪽이라고요.”
“그래서. 효과는 있었나.”
“무, 물론이죠! 그 뒤로 다시는 공작님에 대해 안 물었거든요.”
엘로니아는 뿌듯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처음 티타임을 가진 사이에 남의 연애사를 깊고 자세하게 알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아셀리도 그 후로 표정이 굳었으니, 엘로니아는 제법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답안지 중에서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뻘쭘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 자연스럽게 소동물이 몸을 부풀리듯 어깨를 펴며 말을 이었다. 막상 말을 꺼내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카르벨은 친절히 답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마음에 든다는데, 제아무리 황녀라도 남의 가문 사정에 개입할 수는 없지.”
마음에 들어? 엘로니아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작 그는 큰 의미를 부여해서 말을 꺼낸 것은 아닌 듯했다. 원체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니까. 카르벨은 그런 그녀의 손에 포크를 직접 쥐여줄 뿐이었다. 못마땅하게 케이크에 포크를 찔러넣은 엘로니아는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그래서. 제가 알려드린 건 조사해 보셨죠?”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네.”
“그레이터 씨도 그렇고, 공작님도 한동안 저택을 비우는 일이 잦았으니까요.”
카르벨은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그대 말대로 전대 공작께서 베른에 들르셨던 건 맞아.”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씰룩거리는 입매를 애써 잠재우며 도도한 척 케이크를 한 조각 먹으며 답했다.
“거봐요. 그러니까 이제 좀 숨기지 말고, 편히 좀 말해주세요. 사람이 왜 이렇게 비밀이 많아요.”
“그럼 그대도 내게 편히 말하는 건가?”
“저는 이보다 더 투명할 수 없답니다.”
애초에 숨길 게 무엇이 있던가. 정령의 존재를 제외하면 실상 카르벨이 모르는 정보는 없다시피 한 실정이었다. 그런 엘로니아의 답에도 카르벨은 여전히,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는 그녀도 경험이 쌓여서인지 그 가운데에서도 미미한 차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왜요……? 뭐 하실 말이라도 있으세요?”
무슨 거짓말이라도 했던가? 불안하게 눈을 흘기던 엘로니아의 시선은 곧 테이블 아래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그란 눈이 깜빡거리며 그녀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노움은 얼굴부터 손, 발까지 흙투성이인 모습이었으나, 잔뜩 신이 난 모양인지 힘차게 손을 들었다.
[좋은 오후야!]
‘노움!’
어디서 구르기라도 한 건가? 놀란 엘로니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씨익 웃으며 자그마한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파스스, 흙이 바닥으로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말 그대로 대충 모습을 정돈한 그는 씩씩하게 외쳤다.
[전에 정령사가 부탁했던 나무 있잖아.]
그리고 동시에 카르벨과 노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제록 나무는 어디에 쓸 생각이었지.”
[제록 나무, 다 자랐어!]
순간 노움의 말에 놀라야 하는지, 노움이랑 얼마 차이 나지 않는 속도로 정보를 입수한 카르벨에게 감탄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엘로니아는 고맙다는 의미에서 노움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카르벨을 마주 보며 답했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모든 모종이 전부 제록 나무로 자랐던데. 알고 있었던가.”
“제가 그랬잖아요. 저 정령사라고.”
엘로니아는 어느 때보다 활짝, 밝게 웃으며 답했다.
“정령들에게 부탁했어요. 나중에 이혼하면 저도 먹고살 자금은 있어야 하잖아요.”
“…….”
카르벨의 얼굴이 살짝 굳은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하긴. 그의 영지에 있던 묘목이었다. 제록 나무의 묘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가 흔쾌히 내어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속았다고 생각한 걸까. 엘로니아는 헤실거리며 최대한 유한 음성으로 그에게 제안했다.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다 자라서 제록 나무가 되기 전까지는 저도 확신하기 어려워서요.”
“…….”
“화, 화났어요?”
그의 동공이 짧게 흔들렸다. 엘로니아는 최대한 불쌍하게 눈매를 아래로 축 내렸다. 그래도 완전히 먹고 튀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그녀는 최대한 그를 달래며 말했다.
“제록 나무의 성목은 헤일튼가의 기사들이 쓸 수 있는 목검으로 만들게요. 그리고 따로 가공비는 받지 않을게요.”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 생각했다. 이 금액만 해도 얼마란 말인가. 당당하게 그에게는 솔직하게 다 말하라 해 놓고, 정작 숨긴 모양새가 되어버리니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변명이랍시고 주절주절 말을 얹었다.
“그게, 바로 돈이 준비되면 튀려고 한 건 아니고요. 공작님의 재산을 공짜로 주신 것도 맞으니까, 가짜 정령사 역할은 끝까지 완수하겠습니다!”
굳건한 믿음을 주기 위해 두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였으나, 카르벨의 굳은 표정은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될 것 같다. 나중에라도 그의 기분이 조금 풀리면, 더 괜찮은 변명과 보상을 생각해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엘로니아는 슬쩍 하하, 어색한 웃음을 터트리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어……. 에이미랑 잠깐 꽃꽂이를 하기로 해서.”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그녀는 후다닥,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탕. 빠른 속도로 사라진 엘로니아의 빈자리를 카르벨은 빤히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그래.”
정령사라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 정령사. 그녀가 상단을 찾아 나무를 기르고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소소한 사업은 그의 평판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연과 함께한다는 정령사의 이미지와도 부합하게 묘목을 기르고 있으니 말릴 이유는 더욱 없었다. 카르벨은 복잡한 듯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진득하게 눌렀다. 진짜 정령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까지 겹쳐지니 그의 머릿속이 더욱 어지럽게 뒤엉켰다. 그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 알고 있었나.”
작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위로 차원에서 하는 그저 입바른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카르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편지지 하나를 꺼내었다. 그러고는 빠른 속도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세트론. 최근 내무대신의 보좌를 맡아 줄 이를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괜찮은 사람을 하나 소개해 주지.> 그 아래로는 에릭스 데브니의 아카데미 정보와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헤일튼가의 추천을 입증하는 가문의 인장까지 찍어 누른 카르벨의 서신은 빠르게 황궁에 있는 세트론 로트에게 전해졌다. 은발을 가볍게 묶은 남자는 피곤한 눈으로 그 서신을 읽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는 서신을 돌려도 보고, 뒤집어도 보고, 햇빛에 비춰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얘한테 보조를 구한다고 말한 적이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