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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떠도는 소문의 진원지 (51/234)

51. 떠도는 소문의 진원지2021.05.27.

“더는 빌려줄 수 없네, 데브니 남작.”

데브니 남작은 오늘 오전, 갑작스럽게 통보받았다. 그를 찾아온 이는 상단을 운영하며 최근 친분을 쌓은 로빅 자작이었다. 그는 아침부터 대뜸 차용증을 내밀며 말했다.

“정령사 딸이 있다는 핑계로 돈을 빌려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대체 언제 갚을 건가?”

“아니, 내가 갚겠다지 않아. 대륙의 하나뿐인 정령사가 내 딸인데, 뭐가 문제야!”

“그래, 말 나온 김에 묻자. 딸이랑 연락은 해?”

그의 날카로운 질문에 데브니 남작은 찔끔했다. 연락은커녕 얼굴도 보지 못했다. 어떻게 연이라도 닿을까 싶어 기웃거렸으나, 공작저의 담은 그에게 너무 높았다. 더군다나 엘로니아는 공작저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티타임은 물론, 연회나 자잘한 가정 초대회에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니, 데브니 남작이 접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는 딱 잡아떼며 소리쳤다.

“에릭스가 곧 아카데미에서 나올 텐데, 그때라도 갚으면 되지 않나!”

“어디 취업이 된 것도 아니고. 아무튼 더 이상 안 되네.”

“자네, 이럴 줄 몰랐는데. 나중에 내 두고 보세. 황실까지 연이 닿아 있는 내 딸을 보고 나중에 아쉬워하지 말라고!”

“알았으니까 이 돈이나 갚아!”

촤라락, 로빅 자작은 차용증을 그의 얼굴에 던지고는 데브니 남작저를 떠나버렸다. 엘로니아가 공작저로 들어간 뒤, 그녀의 이름을 내세워 빌린 돈은 거침없이 불어나 있었다. 대부분의 소비는 남작의 도박과 남작 부인의 사치에 치중되어 있었다. 저택도 최근 유행이라는 고급 자재로 싹 바꾼 지 오래였다. 데브니 남작은 쯧, 혀를 찼다.

“어차피 내 딸이 다 갚을 거라니까, 거참.”

그는 주머니를 뒤졌다. 어제 포커를 치면서 마신 술값으로 전부 탕진해서인지 남은 게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렇게 굶을 수는 없으니, 자신이 가진 키를 사용해야지. 그는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곧장 입궁했다. 공작저에서는 그를 만나주지 않을 테지만, 정령사로 임명받은 엘로니아든 카르벨이든 황궁에서 일하는 이들은 언제든 한 번은 마주칠 터.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만날 것이다. 그럴 때, 그가 지닌 키를 보여주면 될 것이다.

“가짜 정령사라 했지, 요 이쁜 것.”

정령사로 임명도 받았겠다, 카르벨도 제법 그녀를 아끼는 눈치겠다. 이걸 쥐고 돈을 받아내면 제법 크게 뜯어낼 수 있을 터였다. 그래서 조용히 엘로니아가 정령사가 되어 인정받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이름값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의 약점이 비수가 될 테니 말이다. 입궁한 데브니 남작은 본궁의 입구에서 주변을 알짱거렸다. 커다란 본궁의 복도는 아치형으로 길고 넓었다. 대부분의 입궁한 이가 마차를 타고 와서 내리면 반드시 이 복도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복도 끝은 커다란 로비로 이어지는데, 업무를 보려면 이 중앙 로비를 지나쳐야 하기 때문에 만날 사람을 놓칠 리 없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던 그의 눈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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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냉큼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오, 에스피디 제국의 희망이자 유일한 하나. 아셀리 전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데브니 남작.”

시녀들과 복도를 걸어가던 그녀가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어릴 적에는 제법 친분이랄 게 있었는데, 크고 나니 영 얼굴을 볼 기회가 없었다. 로엘 황태자가 사망한 이후로는 후계자 수업까지 겸하고 있으니 데브니 남작은 그저 어릴 때 잠깐의 스승 정도의 인상인 듯했다. 하지만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가며 물었다.

“이거, 아주 바쁘신가 봅니다.”

“실무에는 아직 약한지라, 여러 대신들께 도움을 받는 처지지요.”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요. 현명하신 분이라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벌써 아셀리 전하께서 다스릴 에스피디가 기대되고 있지 뭡니까.”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앞에서도 아셀리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고아한 자태로 까닥,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엘로니아 양과 티타임을 가졌더랬죠.”

“아, 그렇습니까?”

순간 데브니 남작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혹여 제 딸이 아셀리의 심기라도 건드려 크게 화라도 난 걸까 싶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그녀는 즐거워 보였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또 만나면 좋겠는데, 정령사님의 시간을 너무 빼앗는 것은 아닌가 해요.”

“아유, 아닙니다. 너무 바쁘면, 큼. 제가 대신해서 말동무가 되어드릴 수도 있고요.”

데브니 남작은 슬쩍, 자신을 어필했다. 때마침 에릭스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올 때다. 연만 잘 트여두면 현재 약혼자가 없는 아셀리와의 혼담을 슬쩍 밀어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경제적 여건이야 좀 기울겠지만, 어차피 승계는 아셀리가 할 터. 귀족가의 자식들은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라 비위라고는 맞출 줄 모른다. 그런 그녀가 혹시 아나. 제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할지. 아니더라도 좋게만 보이면 된다. 설사 아셀리가 거절한다 해도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좋아요. 안 그래도 잠시 시간이 뜨는 참이었는데. 정원에서 간단하게 다과나 할까요?”

“오, 세상에. 영광입니다, 전하.”

“오랜만에 어릴 적 스승님과 대화를 하는 것도 좋지요.”

이게 웬 빵인가. 그는 희망으로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정원으로 향했다. 테이블이 준비되고, 시종들이 다과를 내오고 나서야 아셀리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최근 황궁에는 잘 보이지 않으시던데.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 아니세요?”

“아닙니다. 그저 사위나 한 번 볼까 해서 말이죠.”

“사위라면, 헤일튼 공을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예예. 엘로니아와 함께 담소나 나눌 겸 말입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본 두 분이 다정하시더라고요.”

누구보다 카르벨과 가깝게 지내고, 몇 번의 황궁 스캔들까지 일으켰던 아셀리가 이렇게 말한다면 사실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카르벨이 푹 빠진 게 분명하다.

‘메티카에서 나와서도 그렇게 좋아 죽더니. 역시.’

데브니 남작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 혼인 허락을 받으러 왔을 때도 가짜 정령사라도 좋다고 얼마나…….”

헙. 그는 빠르게 자신의 입을 부여잡았다. 들키는 순간 가문은 물론이요, 전부 다 죽는 목숨이었다. 어쩌다 이런 말실수를 해서.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지 가늠하다 너무 들뜬 게 분명하다. 데브니 남작은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마주 앉은 아셀리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차의 향을 눈을 감은 채 음미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반짝, 눈을 뜨며 되물었다.

“아, 죄송해요. 차향이 너무 좋아서. 방금 무어라 말씀하셨죠?”

“아, 아니……. 하하. 엘로니아가 아주 예쁜 아이다, 뭐 그런 뜻이었습니다. 아비가 팔불출 같아 쑥스럽군요!”

천만다행이었다. 데브니 남작은 모른 척 쿠키를 들어 오도독 씹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그거 들었어? 마님이 사실 정령사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던데.”

“무슨 소리래. 내가 펠런 백작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직접 봤대.”

“아, 역시 소문인가. 나는 또.”

누가 들을세라 저들끼리 머리를 맞댄 채 수군거리는 소리가 엘로니아의 귀에 고스란히 들렸다. 이미 뒤를 따르던 에이미의 얼굴은 분노로 잔뜩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것들이, 진짜. 마님. 제가 크게 혼내겠습니다!”

“아니야, 에이미.”

엘로니아는 간단하게 그녀를 말렸다. 최근 도는 소문에 대해서는 그녀도 여러 번 들었다. 안 그래도 그녀가 방에서 나와 간만에 복도를 거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엘로니아는 뭉쳐 있는 하녀들을 향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거기, 세 명. 여기로 잠깐 오겠니.”

엘로니아의 부름에 놀란 하녀 셋의 어깨가 귀신이라도 본 듯 크게 튀어 올랐다. 곧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덜 떨면서 온 그녀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더듬었다.

“무, 무, 무슨 일로 부르셨습니까, 마님.”

“소문을 들었다고?”

엘로니아의 질문에 먼저 입을 열었던 아이가 냉큼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마님. 저는 그냥 떠도는 소문이라……. 믿지는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믿지 않았으면 더욱 문제네. 증명도 되지 않은 말을 함부로 옮기는 이가 헤일튼가에 있다니.”

“죄송합니다, 마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 소문을 어디에서 들었지?”

최대한 냉정하게 되물었다. 엘로니아도 제 생김새를 알고 있다. 둥글둥글한 눈매에 그리 냉정해 보이지 않는 인상 탓에 화를 내도 썩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숙인 하녀는 이런 그녀의 모습에도 겁을 먹었다.

“그게, 이것도 소문이기는 한데요. 그…….”

혹여 그녀가 더 크게 화를 낼까 우려스러웠는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엘로니아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물었으니 물은 대답에 대해서는 따로 죄를 묻지 않겠어. 그러니 바른대로 말해.”

“데, 데브니 남작께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신다고…….”

아버지가?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카르벨의 집무실에는 간만에 손님이 와 있었다. 기름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낸 데브니 남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카르벨을 앞에 두고 다리를 달달 떨었다. 분명 자신이 더 유리한 상황인데, 어째서인지 그는 여전히 우위에 있다는 듯 뻣뻣하게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던 카르벨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엘로니아가 가짜 정령사다……. 이 말씀이십니까.”

“고, 공작도 다 알고 있지 않던가. 크흠!”

한참 그보다 작은 체구를 지닌 데브니 남작은 어깨를 펴며 자신의 몸집을 크게 보이도록 했다. 이에 카르벨은 다리를 꼬고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며 편하게 물었다.

“최근 엘로니아의 이름을 내세워서 돈을 빌리고 계신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건…….”

“포커로 하루에 20만 골드를 탕진하셨다는 얘기는 더욱 유명하고요. 남작 부인께서는 부티크에서 60만 골드짜리 다이아 목걸이를 엘로니아의 이름으로 외상을 끊으셨고…….”

줄줄이 그의 입에서 그간 데브니 남작 부부의 일상이 흘러나왔다. 너무 사소해서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까지 카르벨은 전부 알고 있었다.

‘아니, 전혀 신경을 안 쓰는 줄 알았더니! 어떻게 아는 거지?’

하지만 그는 떳떳했다. 적어도 황실을 기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의 이런 뻔뻔함에도 카르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날렵한 눈매가 미소로 살짝 휘어질 뿐이었다.

“빚 탕감. 그리고 생활비 정도면 되겠습니까.”

“생활비라는 건 들어 봐야 알겠는데.”

“원하시는 대로 드리죠.”

역시 돈이 있는 사람은 다르다. 엘로니아가 그를 퍽 단단히 꼬셨구나 싶은 생각과 동시에 평생 편히 살아도 되겠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보다 더 원했다.

“그리고 하나 더. 곧 에릭스가 아카데미에서 나올 걸세.”

“아, 자리를 마련해달라?”

“공작이라면 그 이름에 준하는 괜찮은 자리를 제공해 줄 거라 믿고 있네.”

카르벨은 고민하는 듯 자신의 턱을 문질렀다. 그러고는 이내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습니다. 안 그래도 내무대신이 최근 보조할 이를 구한다던데. 그곳에 추천서를 넣어드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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