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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주인 없는 공작저 (49/234)

49. 주인 없는 공작저2021.05.20.

  제국 내에서도 가장 바닥인 곳이라 불리는 베른은 일반적인 빈민가와 다른 분위기를 지녔다. 엘로니아에 대해 조사한 바로는 그녀조차도 그 위험한 지역을 가본 적이 없는 듯했다. 보통 귀족들이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빈민가를 찾을 때, 베른은 당연히 예외가 되었다. 그곳에 사는 이들은 늘 분노에 차 있었고, 내일이 없어 두려움이 없었다. 정확하게 그들과 정반대의 지점에 있는 귀족들이 갔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특히나 전대 공작 부인의 경우 라티에 왕국에서 곱게 자랐다. 베른과 같은 곳을 가봤을 리도 없고, 타국의 위험한 지역을 선뜻 갈 리 없었다. 카르벨은 애써 다른 종이들로 덮어둔 오래된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끝이 그을린 서류에는 처음 보는 낯선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 간단한 성격 등이 적힌 프로필이 있었다. 카르벨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글자를 습관처럼 읽어내리며 생각했다.

‘엘로니아가 이 명단을 봤던가.’

콕 내용을 집어내는 말투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서류 역시 그레이터가 옮겼으니, 그때 보기라도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정령사…….’

확실히 마차를 비롯해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고작 그레이터가 흘린 서류 몇 장으로 거기까지 유추해내기는 어렵다고 판단되었다. 그녀가 영리하기는 해도, 일부러 그가 숨겨둔 정보까지 예측하기에는 경험이 부족했다. 카르벨의 시야에 잘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그제야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선순위가 명확해졌다.

‘가서 확인이 먼저겠군.’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안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어른이 되었을 터. 빈민가에서 자란 탓에 현재 무얼 하며 지내는지 추적조차 되지 않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어지간한 곳은 다 추적했으나, 명단에 실린 아이들이 있는 곳은 영 찾기 어려웠다. 이따금 한둘씩 아는 이들이 나오기는 했으나, 아주 오래전에 본 터라 현재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그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전대 공작 부부가 빈민가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이었다. 그곳에서 입양할 아이를 찾은 것인지는 그들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단지 마차 사고가 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처 지우지 못한 그들의 흔적이 지금 카르벨의 손 안에 있는 것뿐이었다. 서류에는 아주 어린,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아이들부터 제법 머리가 굵어 일찍이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이들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누군가는 엘로니아처럼 열심히 일을 하며 지내고 있으리라. 자줏빛 눈동자가 낡고 빛바랜 명단 위로 겹쳐지는 듯했다. 제법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을 믿어달라고 위협적이지 못한 눈에 힘을 주던 그녀의 말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솔직하게라…….’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마치 귀족들이 빈민가에 가서 적선하듯 하는 말이 늘 그렇다. 사촌인 리프리조차 고작 의심을 한 것 가지고 제게서 바로 돌아서지 않았던가. 현실은 그렇다. 진실을 알기 전에는 감당할 수 있을 것처럼 굴다, 막상 날것이 쥐어지면 부담스러워한다. 지금은 그녀가 카르벨에게 도움을 받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령사로 임명도 받은 상황. 불현듯 정말 정령사처럼 구는 그녀를 볼 때면 마음 한편이 섬뜩하기도 했다.

‘정령사라면, 진즉 모든 과거를 봤겠지.’

그녀가 하는 말에 아주 잠깐 망설였던 자신이 떠올라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레이터.”

“예, 각하.”

달칵, 기다렸다는 듯이 들어온 그레이터에게 그는 말했다.

“베른으로 헤일튼 공작 부부가 방문한 전적이 있는지 확인해.”

“예.”

“그리고…….”

카르벨은 제 손에 들린 명단에 시선을 두었다. 가볍게 종이를 쥔 손에 힘을 준 그는 그에게 명단을 건네며 말했다.

“베른 출신이 이 명단에 있는지도 확인해 보고.”

“알겠습니다.”

틀릴 것이다. 그녀는 진짜 정령사가 아니니까. *** 끼익, 엘로니아의 방문이 은밀하게 열렸다. 바깥을 확인한 에이미가 슬그머니 들어와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았다. 덩달아 긴장한 엘로니아가 소파에 앉아 있다 허리를 폈다. 에이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레이터 님께서 공작저에 현재 안 계신 게 맞대요.”

“어디 가셨다는 말은 없고?”

“돌아다니면서 물어봤는데, 공작님께서 시키신 일 때문에 당분간 뵙기 힘들 거라고만 하던데요?”

베른까지 거리가 제법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엘로니아는 그제야 몸에서 힘을 빼내어 소파에 기대었다. 혹여 카르벨이 자신의 말을 그저 헛소리로 치부할까 걱정했거늘. 다행스럽게도 들어주기는 한 모양이다. 이를 전혀 모르는 에이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냥 공작님께 여쭤보시지. 두 분이 싸우셨어요?”

“아니? 우리 사이 완전히 좋은데?”

엘로니아는 빠르게 반박했다. 일방적으로 그녀가 쏘아붙이고 나왔는데, 이게 싸웠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더군다나 그들은 죽고 못 사는 약혼 관계로 보여야 했기에 답은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에이미는 태연하게 답했다.

“공작님도 싸우시기는 하시는구나.”

“안 싸웠다니까?”

“근데 왜 이틀 동안 얼굴도 안 마주치세요?”

순간 뜨끔한 엘로니아는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틀간 피한 건 아니었으나, 굳이 그가 지나갈 만한 시간에는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혹여 그가 정령사라는 증거라도 갖고 오라고 다그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카르벨은 무척 바빠 보였다.

“카르벨도 일이 있는데, 내가 철없이 놀아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나름대로 온화하게 웃으며 답을 하자, 에이미는 애매하게 납득한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녀가 가져다준 찻잔을 들려던 찰나.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님, 마님. 큰일 났어요.”

문이 열리자 사색이 된 시녀 하나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얼마나 뛰어온 것인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마님, 글쎄, 그, 헉…….”

“천천히 말해. 괜찮으니까.”

“지금, 마차가. 마차가!”

“마, 마차가 뭐. 마차가 뒤집혔대?”

“그게 아니라요. 황궁에서 마차가 오고 있대요!”

어우, 놀라라. 마차라는 말에 혹여 전대 공작 부부의 마차를 뜻하는 줄 알고 지레 찔렸던 그녀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보다, 황실이라니? 카르벨이 오전 일찍부터 나갔는데, 설마하니 그대로 황제 폐하께 가서 그녀가 사실 정령사 사칭범이라는 걸 불기라도 했나?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은 엘로니아는 뒤늦게 방금 들은 말을 곱씹으며 되물었다.

“화, 황실에서 왜? 어떻게 서신도 없이 갑자기…….”

“아셀리 전하께서 일전에 서신을 보내셨다는데요?”

엘로니아는 빠르게 자신의 기억을 되짚었다. 분명 임명을 받고 돌아오자, 아셀리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내용은 적당히 좋은 날을 잡아 만나자는 내용이었는데, 아셀 리와 카르벨의 생각을 하느라 뒤까지 마저 읽지 못했다. 그 뒤에는 카르벨에게 쏘아붙이고 온 터라 온 신경이 전대 공작 부부의 마차에 가 있었다. 엘로니아가 생전 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앉아 있자, 에이미가 부리나케 달려가 서신을 다시 가져왔다. 그 안에는 정갈한 필체로 우아하게 되묻고 있었다. <……하여 언젠가 공작저에 들러 차라도 한 잔 나누고 싶네요. 혹시 이틀 뒤 방문해도 괜찮겠습니까? 황실의 정원은 아름답기는 하나…….> 마지막도 아니고 중간에 끼워져 있다 보니 급하게 읽을 때 놓친 모양이었다. 이 서신 속 이틀 뒤가 바로 오늘이었다. 엘로니아는 곧장 이름을 외쳤다.

“에이미!”

“드레스 준비했습니다! 차는 뭐로 준비할까요?”

“가장 상큼하고 우리는 데 오래 걸리는 거!”

엘로니아도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기왕이면 차를 우리며 시녀들이 시간을 끌 수 있으니 오래 걸리는 쪽이 좋다. 말을 전한 시녀는 그 지시를 알아들었는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 채 준비하러 사라졌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며 물었다.

“공작님은? 지금 저택에 안 계시지?”

“네. 일찍부터 일이 있으셔서 잠시 나가셨어요.”

아직 카르벨이 돌아오지 않은 게 맞았다. 여자끼리 할 말이 많다더니, 어째 타이밍도 딱 그가 없을 때를 골라 방문한 기분이었다. 한 번도 손님을 혼자 맞이해 본 적이 없는 엘로니아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접객실에 도착하니, 화려한 분홍빛 드레스를 입은 아셀리가 고개를 돌렸다. 엘로니아는 적당한 예를 갖춰 인사했다.

“이렇게 정말 찾아주실 줄은 몰랐어요. 답신을 미처 못 보냈던 터라 잊고 계신 줄 알았거든요.”

“무언의 허락이라 생각하고 방문했는데. 설마 제가 폐를 끼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겉치레와도 같은 대화에 아셀리의 시선이 아래로 씁쓸하게 떨어졌다. 말을 아끼며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미소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반박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혹시 전하께서 잊고 안 오시는 줄 알고 드린 말씀이랍니다.”

“이렇게 환대해주니 고맙네요. 공작저에 먼저 들르겠다고 한 건 처음이라.”

그제야 아셀리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답을 들은 엘로니아는 혼란스러움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처음이라는 부분에서 놀라야 하는 걸까, 아니면 늘 초대를 받아 왔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부분에서 슬퍼해야 하는 걸까. 그보다 마음에 더 걸리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분명 내가 공작저에 처음 왔을 때, 시종장들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는 아셀리의 방문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저 말 그대로 손님이라 생각하고 지나쳤으니까.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 독한 리아티코 향수를 쓰는 이도 아셀리 뿐이었다. 키레일이 있기는 하다만, 그 사람은 공작저까지 오는 일이 없었다.

‘그냥 내가 기분 나쁠까 봐 배려하는 건가.’

정작 말을 꺼낸 아셀리는 그저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아름다운 미소를 걸친 채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찻잔을 들던 엘로니아는 과거 살롱에서 일하며 다진 미소로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약혼도 마치셨겠다, 혼인은 언제 올릴 생각이신가 해서요.”

“호, 혼인이요.”

“조만간 황실에서 일이 생기고 하면, 정령사님도 바빠지실 테니까요. 카르벨이야 평소에도 얼굴 보기 힘든 이라지만요.”

“그 부분은 카르벨과 대화를 나눠봐야겠어요.”

시누이나 시어머니와도 같은 대화 내용에 엘로니아는 잠시 당황했다. 덕분에 아주 짧게 입매를 늘려 웃던 엘로니아의 입꼬리가 살짝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셀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카르벨이 워낙 착하고 반듯해서 엘로니아 양께 따로 독촉은 안 드린 모양이네요.”

아셀리는 싱긋, 웃으며 잔을 들어 한 모금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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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하게 대화의 주체가 애매했다.

‘카르벨을 말하는 게 맞나……?’

그가 연회에서 반듯하게 굴기는 했어도, 딱히 누군가에게 착하다 소리를 들을 만큼 행동하지도 않았다. 의외로 칼같은 구석이 있어, 아닐 때는 부드럽게 돌려 거절하는 강단도 있었다. 그런데 꼭 아셀리가 하는 말이 무언가를 떠보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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