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망설임의 원인2021.05.16.
갑작스럽게 보인 과거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어지러움이 느껴질 무렵, 전대 공작 부인의 나긋나긋한 음성이 흔들리는 마차 안에 조용히 울렸다.
“좀 어지럽지 않아요?”
“오늘따라 유독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데. 그 탓인가 보군. 조금만 참을 수 있겠나.”
그제야 엘로니아는 그녀의 시야가 아닌 과거 속 마차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민가를 지나갈 때쯤, 덜컹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더럽고 괜찮은 가게 하나 없는 곳까지 마차가 올 일이 없다시피 하다 보니, 땅을 고르지 못한 모양이었다. 전대 공작은 부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무리 빌린 마차라지만…….”
한소리라도 하려는지 몸을 일으키는 전대 공작을 그녀가 막아섰다.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만 찾아보면 되잖아요. 아이들은 이게 마지막이래요?”
“일단은. 빈민가 출신 애들이라 그런지, 거짓말에 능숙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마치 무언가를 찾기 위해 빈민가를 뒤진다는 듯한 대화였다. 이전까지 엘로니아는 그들이 빈민가를 돌아다녔다는 이야기에는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빈곤층을 돕는 일이야 의외로 흔한 일이었다. 특히나 귀족들은 본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서 가는 것보다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가는 경우가 잦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과거 속 대화에서는 다른 이유가 있는 듯했다. 단순한 선행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찾아본다니. 뭘?’
순간 리프리가 해주었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설마……. 입양할 아이를 알아본다거나…….’
보육원을 통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으면 입양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카르벨의 호적은 엘로니아가 알기로는 깨끗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입양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먼 방계에서 태어난 아이를 곧장 헤일튼가로 입적하거나, 빈민가에서 지내는 부모 없는 아이들 중 하나를 데려다 키우거나. 후자의 경우는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에 실상 많이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다. 전대 공작은 미리 챙겨 온 서류를 공작 부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당신도 보고 의견을 주면 좋겠어. 아이들은 나보다 그대가 더 잘 다루기도 하니까.”
“실제로 봐야 오는 감이란 것도 있답니다.”
“그래도 대충 봐 두면 도움이 될 거야.”
공작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런 그의 어깨를 공작 부인은 다정히 감싸 안았다. 그런 그녀에게 공작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일단, 당신까지 확인하고 나면 서류는 태우지. 애들인데, 이런 문서를 보았다가 상처받으면 평생 가슴에 남을 테니까.”
“당신답지 않게 웬일로 섬세하게 처리하네요?”
“유출 걱정도 있고. 우리는 베른까지 가본 적이 없으니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베른은 에스피디 제국에서도 유독 험악하기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강도와 도둑이 들끓고, 밤이 되면 술에 취한 이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어깨를 부딪힌 정도로 칼부림이 난다고 한다. 엘로니아도 가본 적 없을뿐더러 무서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들어가면 죽어서 나온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런 곳에도 아이가 사는구나.’
이런 위험한 곳까지 손수 가는 공작 부부의 모습이 좀 의아하기도 했다. 아무리 전대 공작이 검술을 제법 한다고 하더라도, 호위도 없이 가다니. 특히 전대 공작 부인의 표정은 베른에 가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밝게 대화를 이어갔다.
“당신, 누이가 몸이 약하다고 나를 너무 애지중지 다루는 거 아니에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전대 공작 부인의 웃음소리가 맑게 울렸다. 천천히 엘로니아의 머릿속에서 음성이 멀어졌다. 엘로니아가 정신을 차리자, 슬며시 상체를 기울이며 일어서려던 카르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은가. 좀 힘들어 보이는데.”
카르벨은 조금 놀란 얼굴로 엘로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는 책상에 한 팔을 딛으며 엘로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슨 일이길래 갑자기 잘 안 오는 집무실까지 찾아온 거지.”
“그, 어…….”
언뜻 본 과거가 엘로니아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때문에 원래 그를 찾아온 목적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시 뒤로 물러서니, 카르벨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곧 자신의 손을 거둬들이며 물었다.
“……급한 일인가.”
왠지 그녀가 카르벨을 거절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색한 공기가 잠시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엘로니아도 대놓고 피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정신을 차리니 그가 앞에 있어서 놀란 것뿐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해명하기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다 닉스 탓이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짜고짜 과거를 보여주다니. 그것도 카르벨의 앞에서.
‘닉스, 적어도 설명은 해주고 갔어야지!’
정작 엘로니아와 이마를 박은 닉스는 자취를 감춘 채였다. 애초에 닉스가 좋아하는 대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치를 떠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뭘 그렇게 싫어한 거지?’
어째 닉스가 자발적으로 과거를 보여줬다기보다는, 피하다 보니 얼떨결에 보여준 것 같았다. 엘로니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류로 향했다. 카르벨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인 서류 중, 유달리 오래되어 보이는 종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끄트머리가 작게 그을린 것이 꼭 과거 속 공작이 태우겠다고 했던 서류를 떠올리게 했다. 엘로니아는 넌지시 운을 떼었다.
“아까 연무장에서요. 그레이터 씨께서 서류를 흘리신 걸 봤거든요.”
“그래.”
덤덤한 답이었다. 관심 없다는 듯한 평이한 음성.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거기서 마차 관련된 서류를 우연히 봤는데요…….”
“아, 그걸 봤군.”
그 뒤로 그의 입이 닫혔다. 저게 끝이야? 다른 설명이 더 붙을 줄 알고 기다렸지만, 그는 정말 딱 저 반응이 전부였다. 오히려 태연하게 서류를 팔락 넘기기까지 했다. 되레 그녀가 당황하고 말았다. 사실 엘로니아는 카르벨이 전대 공작 부부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가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카르벨은 상식적인 기준을 넘어서까지 원하는 걸 얻는 이는 아니었다.
‘그런 사람이었다면 나는 진즉에 갇혀 지냈을걸.’
하지만 카르벨은 전대 공작 부부의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아꼈다. 비단 공작 부부의 이야기뿐 아니라, 본인에 대한 일에는 대부분 슬쩍 대화를 넘겨버리는 식이었다. 엘로니아는 그가 피하지 못하게 대놓고 화제를 끄집어내었다.
“전대 공작님의 마차 사고에 대해 알아보고 계신가요?”
“……그 서류가 그런 내용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차 대여업을 하던 곳을 매수한 서류였지. 이제는 망해서 거의 쓰지 않아 헐값에 구매했고.”
“그게 전대 공작님께서 사고 나셨을 때 대여하신 곳이잖아요.”
그제야 카르벨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과거에서 본 마차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 인장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아주 어릴 적에는 길가에서 꽤 자주 보였던 인장이었던 거 같은데, 현재는 못 본 지 꽤 되었다. 언제 사라졌는지도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으니까.
‘마차가 차고 넘쳐나는 헤일튼가에서 굳이 망한 곳을 인수할 이유가 뭐 있겠어.’
엘로니아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마차 업체를 매수한 이유가 전대 공작 부부의 사고와 관련되어 있을 거라고. 엘로니아는 다시 물었다.
“대체 뭘 찾는 거예요?”
“찾은 적 없어. 갑자기 왜 마차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알아야 제가 카르벨을 돕든 말든 하죠.”
의외라는 듯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가 뚫어지게 그녀를 응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의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누가 그대에게 언질이라도 했나 보군.”
“하기는 누가 해요. 제가 봤어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저 혼자서!”
“무엇을 봤단 말이지?”
유독 날이 선 그의 음성이 빠르게 되물었다. 엘로니아는 입을 한 번 삐죽이고는 그를 향해 외쳤다.
“뭐, 전대 공작님께서 선한 의도로 빈민가를 찾은 것 같지는 않으시던데. 정말 마음에 우러나서 하는 사람이 대단한 거고.”
“잠깐, 엘로니아.”
카르벨이 말을 끊으려 했으나, 그녀는 꿋꿋하게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명단 들고 베른까지 가신 거 봤어요. 마차가 흔들려서 조금 어지럽다고 하시던데요?”
제 할 말을 다 뱉은 엘로니아는 후련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그녀를 굳은 얼굴로 응시하는 카르벨을 흘겨보았다. 바짝 그가 앉은 책상까지 다가간 엘로니아는 탕. 소리 나게 그의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었다. 상체를 기울인 그녀는 카르벨과 눈을 맞추며 당당하게 말했다.
“대체 뭘 걱정하는 거예요? 카르벨이 솔직하게 말을 해줘야 나도 아셀리 전하와 리프리 저하에게 말을 맞추죠.”
엘로니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어차피 가짜 정령사를 데려온 순간부터 전대 공작 부부의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들키면 최소 황실 기만죄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녀는 가짜가 아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두 일의 무게가 그리 다르지는 않을 터.
‘믿어주겠다는데!’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안타깝게도 먼저 미소를 지은 사람은 카르벨이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엘로니아.”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이전처럼 화제를 넘기는 것이었다. 또 피하는 것이다. 이렇게 밀어붙여서는 부족하다는 걸까. 책상을 향해 기울었던 몸을 곧추세운 엘로니아는 삐딱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카르벨은 싱긋, 눈을 접어 웃으며 물었다.
“리프리 저하께서 그런 말을 하시던가?”
그녀조차도 그레이터가 흘린 서류로 알아차렸는데, 에스피디 제국에 없는 리프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엘로니아는 입을 삐죽이며 큰 소리로 답했다.
“내가 진짜 정령사라고 했잖아요.”
당당하게 입을 열었으나, 그의 반응은 탐탁지 않았다.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다. 웃는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그를 보며 엘로니아는 서류를 검지로 똑바르게 가리키며 말했다.
“잘 봐요. 내가 한 말이 틀린 지, 맞는지.”
닉스가 거짓으로 보여준 게 아니라면, 그도 서류를 보면 깨닫는 게 있겠지. 엘로니아는 거친 걸음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는,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그녀의 심기를 고스란히 대변한 행동이었다. 예의도 없고, 누군가는 꾸짖을 법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카르벨의 집무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탓에, 그녀의 거친 행동을 본 이도 없었다.
‘처음부터 집무실 주변에 사람을 다 물린 거구나?’
이런 점까지 철저하다니. 엘로니아는 고개를 가볍게 저어가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닫힌 집무실 문 탓에 벽이 잘게 진동했다. 한참 동안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확인한 카르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리프리가 머무를 때부터 염려하던 일이 결국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이 엘로니아의 입을 통해 나왔다. 카르벨은 그녀가 했던 말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베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