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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기대할게요 (47/234)

47. 기대할게요2021.05.13.

카르벨의 손이 엘로니아의 뒤에서 슬쩍, 허리 부근을 감싸며 눈치를 주었다.

‘아, 맞아!’

엘로니아는 속으로 자신의 실수를 질책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나온 예절이었다.

‘이래서 주입식 교육이란…….’

엘로니아는 눈동자로 아셀리와 카르벨을 살핀 뒤, 마치 언제 고개를 숙였냐는 양 상체를 곧추세웠다. 어색한 동작에도 아셀리는 다정히 답해주었다.

“안 그래도 정령사님께 인사를 받으려니 어색했어요.”

정면으로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자, 자연스럽게 뻘쭘한 기분이 들었다. 엘로니아는 속으로 세상에서 가장 얼굴이 두꺼운 사람을 떠올렸다.

‘나는 뻔뻔하다. 나는 카르벨이다…….’

정작 그는 왜 그러냐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뇌를 마친 엘로니아는 애써 태연한 척 질문을 건넸다.

“폐하를 뵈러 가시던 길이신가 봐요.”

“네. 오늘 임명식을 하신다고 들었거든요.”

엘로니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미 임명식을 끝내고 나오던 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건가. 그 답은 카르벨이 대신했다.

“이미 끝났습니다.”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가 아니었으나, 아셀리의 시선은 여전히 엘로니아를 향하고 있었다.

‘뭐, 뭐지. 가운데 낀 새우가 된 기분이…….’

그녀는 제 목숨줄처럼 쥐고 있던 케이스를 고쳐 잡았다. 그러자 그제야 눈에 들어왔는지 아셀리의 시선이 잠시 그녀의 손에 들린 케이스로 향했다. 아셀리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일이 있어 늦었더니, 벌써 끝난 거였군요. 생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한 정령사의 임명식이라 기대를 했는데.”

그녀의 입술 틈으로 한숨과도 같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로니아는 실망한 아셀리의 모습이 의외라고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명식보다는 그 이후 열릴, 황제가 주관하는 연회에 관심을 가졌다. 축하를 전하기도 편하고, 연을 자연스레 쌓을 수 있어 대부분이 연회를 선호했다. 하지만 아셀리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는지, 복도의 벽에 걸린 에스피디 황제의 초상화를 밉지 않게 노려보기까지 했다. 적당히 애정 섞인 시선이 왜 자신도 없이 임명식을 치렀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폐하랑 사이가 좋으신가 보네.’

친근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 누가 감히 에스피디 제국의 태양이자 중심, 황제를 향해 눈을 흘길 수 있단 말인가. 원래 황제가 정해주었던 날짜에서 몇 번의 변동사항이 있었는데도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을 보니 평소 자잘한 대화도 자주 나누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셀리는 살갑게 말을 이어갔다.

“아버지께서 꽤 기대를 많이 하셨거든요. 펠런 백작의 일을 들으시고 정령사님께서 고생하셨다면서 많이 안타까워하셨어요.”

“부끄럽네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걸요.”

“대단한 일이에요. 아버지도 그 일로 의심을 완전히 거둬들이셨는걸요.”

어라. 그 이전까지는 의심했다는 소리인가? 연회를 열고 나서도 임명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단순히 절차를 밟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이 더욱 생경하게 뇌리에 박혔다. 바로 믿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막상 대놓고 들으니 당혹스러웠다. 다른 의미라도 있는 건가 싶어 답을 망설이는 엘로니아와 달리, 아셀리는 연회에서 보았던 때보다 더욱 밝게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려요. 정식으로 정령사가 되셨네요.”

“감사합니다. 앞으로 제국을 위해 성심성의껏 일하겠습니다.”

“말이라도 너무 영광스럽네요.”

평범한 축하 인사였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흠잡을 것 하나 없었다. 혹여 저를 의심하나 했던 생각했던 자신이 민망할 만큼 진심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엘로니아는 문득 번화가에 나갔을 적 들었던 키레일의 말이 떠올랐다. 펠런 백작 부인이 제게 선물할 목걸이의 마법을 고른 사람.

‘꼭 아셀리 전하인 것처럼 말했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정령사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워서? 연금을 횡령한다고 생각해서? 그것도 아니면 카르벨과 혼담이 오고 갔던 사이라서? 설마하니, 카르벨이 저와 약혼하는 바람에 앙심을 품었다든가…….

‘말도 안 되는 소리.’

엘로니아는 떠올렸던 가정을 곧장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아셀리는 복도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카르벨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희한하게도 그녀의 관심은 오롯이 엘로니아에게만 향해 있는 듯했다. 아셀리는 엘로니아 옆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있는 카르벨은 마치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아셀리가 뚫어질 듯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티타임은 어떠세요?”

“어, 음. 제가 전하와 관심사가 많이 다른 터라 말동무가 되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꼭 취미가 같아야 친해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의 눈매가 슬며시 접혔다. 묘하게 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전과 사뭇 다른 인상처럼 느껴졌다.

‘예전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이유가 뭐더라.’

그녀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단순히 장소 때문은 아닐 터. 그러고 보니 연회 때 지독하게 주변 공기를 물들였던 리아티코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셀리가 제법 꾸준하게 사용하는 향수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회를 비롯해, 헤일튼 공작저를 방문할 때도 그 향수를 쓴 것 같아서였다. 언제나 그 향수를 쓸 정도면 퍽 아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그 비싼 리아티코 향수인데.

‘임명식을 보고 싶어 왔다면서, 이럴 때는 사용하지 않는 건가?’

아셀리의 기준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하필 키레일에게서 향수를 주문한 이에 대해 넌지시 들은 후라서일까. 그녀의 행동이 썩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야. 폐하께서 향수를 싫어하실 수도 있고. 다 떨어졌을 수도 있고!’

자꾸만 기울어진 시선으로 보게 되는 자신을 타박한 엘로니아는 슬쩍 옆에 선 카르벨에게 눈치를 주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띤 채였다. 엘로니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슬쩍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편한 대로 해도 돼, 엘로니아.”

누가 봐도 반대로 말하고 계신 듯합니다만. 하지만 엘로니아도 썩 그녀와의 티타임이 내키지 않았기에 조용히 거절을 내뱉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카르벨이랑 오붓하게 축하를 하고 싶어서요. 다음을 기약해도 될까요?”

“어머, 제가 눈치 없이 끼어들었나요?”

“아니에요! 전하께서 오실 줄 모르고 주방장에게 축하 케이크를 부탁해 두었거든요.”

엘로니아는 뻔뻔하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가며 답했다.

“삼단 케이크라 제법 공을 들였을 거라서요.”

이 정도면 약속을 갑작스럽게 취소하지 못할 핑계는 되겠지. 어디선가 잔뜩 기대하느라 숨을 들이켜는 님프의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아……. 거짓말인데 정말로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이 기분……. 거절이 아쉬웠는지 아셀리는 몹시 씁쓸하게 답했다.

“늦은 게 원망스럽네요. 그럼 다음에 공작저에 방문해도 될까요?”

“아, 그럼 카르벨과 일정을 정해보고…….”

엘로니아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그녀의 상체가 슬그머니 기울었다. 엘로니아의 귓가에 아셀리 특유의 냉랭하면서도 단단하며 자신감 있는 음성이 울렸다.

“원래 여자들끼리의 수다가 더 재미있는 법이잖아요?”

“……그래요?”

“나도 카르벨을 모르지 않고, 엘로니아 양도 그렇고.”

아셀리가 숙였던 상체를 일으켰다. 엘로니아보다 조금 키가 더 큰 탓에 자연스레 시선이 위로 향했다. 아셀리는 입매를 기울이며 상냥하게 말을 이었다.

“할 말이 많을 것 같으니까요. 정령사니까, 다 알고 있을 거잖아요? 기대할게요, 엘로니아 양.”

친절하고 다정한 웃음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거절할 수 없는 오만함이 느껴졌다. ***

[보통 그렇기는 하지.]

닉스는 제 키보다 커다란 포크를 들고는 푹, 케이크에 찍으며 말을 이었다.

[귀부인들의 티타임에 남자가 끼는 거 봤어? 거기다 혼담까지 오고 갔던 사이라면 나 같아도 부담스럽지.]

“근데 나와 할 얘기가 뭐가 있어? 난 없는데.”

[그건 네가 공작이랑 가짜 연애를 해서 그렇지. 진짜면 뭐든 할 말이 있지 않았겠어?]

그럴싸한 닉스의 답에 엘로니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했다. 엘로니아는 헤일튼 공작저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셀리에게서 서신을 받았다. 둘이서 보자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서신에는 날짜를 잡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실의 인장이 떡하니 박혀 있는 것을 보니 거절하기 애매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엘로니아는 그녀와 나눌 말이 없다는 것이다.

‘할 말이 많다니. 무슨 말? 카르벨에 대해서?’

대체 어느 누가 자신의 약혼자와 먼저 혼담이 오갔던 사람과 편히 이야기한단 말인가. 더군다나 정령사라서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라니.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리프리 저하와 친분이 있으셨지.’

문득 리프리가 아셀리에 대해 말했던 단편적인 말이 떠올랐다.

‘단지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입니다.’

  그리 사교적인 사람도 아닌데다 쉬는 일조차도 어색해하던 리프리가 이해관계 때문에 아셀리를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고민할수록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얘기를 아무하고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카르벨에게 넌지시 운을 떼어보았지만, 그는 그저 아셀리가 하는 말은 전부 지나가는 말일 테니 신경 쓰지 말라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엘로니아는 어쩔 수 없이 케이크와 퍼즐을 깔아두고 다소곳하게 닉스를 간절히 불렀다. 그녀가 퍼즐을 맞춰주지 않은 것이 대단히 한이라도 되었는지, 닉스는 몇백 개에 달하는 조각을 맞춘 뒤에야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나마 정령들은 누구에게 말을 옮길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살아온 시간이 길어서인지 몰라도 이따금 괜찮은 답을 주기도 했다. 닉스가 포크를 들자 앞에 앉아 있던 님프가 입을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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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대로 한 입을 님프에게 먹이며 말을 이었다.

[얘 봐. 노움이랑 둘이 있으면 내 욕한다니까?]

“노움이랑 님프랑 사귀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친하면 그렇다는 거야.]

그는 탕탕, 포크로 접시를 두드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엘로니아는 오랜만에 본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속으로 말을 삼켰다.

‘나도 속으로 카르벨 욕 많이 했는데…….’

차마 겉으로 내뱉을 수 없을 뿐. 친하면 욕을 들어도 화가 나지 않는 걸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편하게 말을 하는 아셀리는 그와 친하다는 말이 되기도 했다. 그게 또 애매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도 최근 카르벨과 퍽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이전만큼 그의 말이 협박처럼 들리지 않았으며, 가끔씩 상냥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어느 때는 조금 안쓰럽기도 했다. 엘로니아는 닉스를 보며 물었다.

“그냥 가서 물어볼까?”

하지만 욕을 하지 않았다며 펄쩍 뛰는 님프와 포크를 사수하며 싸우는 닉스는 엘로니아의 말을 전혀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 물어보자. 이렇게 앉아 있는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엘로니아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로 놀란 닉스가 쫓아왔다.

[어디 가? 또 나 두고 가지?]

엘로니아는 카르벨이 있는 집무실에 냅다 들이닥쳤다. 물론, 노크는 했다.

“들어와.”

카르벨의 답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대한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는 그가 엘로니아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 일이 조금 있어서. 잠시 앉아서 기다리겠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이상하게도 그 서류의 주변에서 그을린 듯한 검은 연기가 보이는 듯했다. 이를 보자마자 닉스는 펄쩍 뛰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으악! 쟤가 왜 저기 있어!]

‘뭐, 뭐야. 뭔데? 누구야?’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검은 연기를 맡는 순간, 시야가 어지러워지며 과거의 기억들이 휩쓸려 들어왔다. 흔들리는 마차 안. 전대 공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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