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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임명 (46/234)

46. 임명2021.05.09.

로엘 황태자는 피곤한 듯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사과로 끝날 일입니까.”

“죄송합니다. 이기적인 저희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전대 헤일튼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 사과의 말만 앵무새처럼 내뱉을 뿐이었다. 그 옆에 선 공작 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금 앳된 황태자의 앞에서 노숙한 공작 부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인이었다. 로엘 황태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그들의 고개 숙인 모습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뜻 보면 꼭 우는 것도 같고,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로엘 황태자는 침묵을 지키다 한참 뒤, 쥐어짜듯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머니는 알고 계셨습니까?”

로엘 황태자가 말한 어머니는 어릴 적, 일찍이 병으로 서거한 황후를 뜻하는 것일까. 그의 질문에 공작 부인이 망설임 끝에 답을 건넸다.

“……예.”

그 대답을 끝으로 과거의 기억들은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엘로니아가 정신을 차렸을 때, 마차에서 내려 걸어온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체감은 훨씬 길게 느껴졌다. 아마도 로엘 황태자의 고통스러운 표정에 엘로니아도 덩달아 숨을 죽여서 그런 모양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과거 속에서 보였던 정원과 거의 흡사했다. 다만 장미가 활짝 피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풀만 가득할 뿐, 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알현실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엘로니아는 제 키보다 세 배는 더 큰 듯한 문을 질린 듯 올려다보았다.

“원래 황실은 뭐든 다 커요?”

“아무리 그래도 제국인데, 위엄이 없으면 되겠나.”

헤일튼 공작저도 그녀에게는 충분히 넓은 곳이었는데, 황실은 그보다 훨씬 인간미가 없었다. 엘로니아는 황제를 직접 대면한다는 생각에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복화술로 웃으며 물었다.

“카르벨, 나 어때요. 어디 어색하거나 이상한 거 없죠?”

카르벨의 잿빛 눈동자가 힐끔, 그녀를 훑었다. 그는 다시 굳게 닫혀 있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을 텐데.”

“태어나서 처음이라고요!”

툭, 엘로니아가 팔꿈치로 그를 작게 타박했다. 카르벨이야 황궁에서 일을 한다지만, 엘로니아에게는 모든 것이 대단하고 낯설었다. 괜한 걸 물었나 싶어 그녀가 입을 삐죽였다. 카르벨은 손을 뻗어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겨주었다. 놀란 님프가 또 어딘가로 바스락거리며 도망가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카르벨은 자신만만하게 답해주었다.

“얼굴 가리지 말고. 평소처럼만 해.”

칭찬보다 어째 저 말이 그녀의 어깨를 더 당당하게 만들었다.

“후, 하. 연금이다, 연금.”

“그래.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지.”

끼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며 눈이 부신 내부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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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육중해 보이는 샹들리에와 그 아래 층층이 쌓인 계단. 조금 고개를 올리면 권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붉은 왕좌가 있었다. 그 뒤에 에스피디 제국을 상징하는 인장을 조각한 벽면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엘로니아는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머리 위로 묵직한 음성이 그녀를 불렀다.

“정령사께서 오셨나.”

“예, 폐하.”

엘로니아를 대신해 카르벨이 답을 건넸다. 넓은 알현실에 그의 음성이 둥둥 울리는 기분이었다. 님프도 제법 놀랐는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에스피디 황제의 호기심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제국에 이리 귀한 분이 탄생했다니. 정령사의 업적은 내 익히 들었소.”

“감사합니다, 폐하.”

“고개를 들게나.”

엘로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매서운 눈매와 달리 적당히 온화한 미소. 희끗희끗한 은발과 청회색 눈동자는 심리적으로 거리감이 느껴졌지만, 생각처럼 엄청나게 두려운 느낌은 아니었다. 덕분에 떨렸던 마음도 천천히 차분해졌다. 에스피디 황제는 편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임명이 늦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소. 그래놓고 갑자기 서둘러 당황하지 않았나 모르겠군.”

“오히려 이렇게 일찍이 불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에스피디 황제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퍽 능글맞은 음성이 카르벨을 향해 말했다.

“헤일튼 공작이 푹 빠졌다 하여 궁금했는데. 의외로 얌전한 영애라 놀랐어.”

“대체 어떤 기대를 하셨습니까. 제 누누이 평범한 반려자라 말씀드렸습니다.”

“글쎄. 그대가 어지간한 성격으로 휘둘릴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내게도 꼬박꼬박 말대꾸를 놓던 이가 아니었는가.”

“다른 이들이 들으면 불충한 신하인 줄 알겠습니다.”

“맞는 소리지.”

카르벨은 제법 편안하게 황제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적당한 농담에서 친근감과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에스피디 황제는 갑작스럽게 생을 달리한 황후에 대한 죄책감인지 몰라도 헤일튼 공작가에 제법 관대한 편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일찍이 생을 마감한 로엘 황태자와 엇비슷한 나이다 보니 더욱 공작에게 정을 준 것이 아니겠냐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의외로 근거 있는 소문이었나 보네.’

무희와 사랑에 빠져 본처도 버린, 천하의 쓰레기일 거라는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람이야 겉모습만 보고 알 수는 없으니까…….’

이미 펠런 백작에게 한 번 속지 않았던가. 엘로니아는 신기한 듯 두 사람의 대화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지켜보았다. 에스피디 황제는 장난처럼 혀를 차며 입맛을 다셨다.

“저거, 저 건방진 꼴을 보기 싫었던 건데. 언젠가 크게 사고 칠 줄은 알았다만.”

“저는 폐하와 달리 사고를 친 전적이 없습니다만.”

대범한 그의 말에 엘로니아의 심장이 툭, 데구루루 굴러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좀처럼 벌렁거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미, 미, 미, 미친 거 아니야? 목이 두 개야?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죽는 방법이라도 찾는 거야?’

엘로니아는 눈동자로 에스피디 황제와 카르벨 사이를 재빠르게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성군이라는 소리는 못 들어도, 에스피디 황제는 적당히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정치적으로도 온화한 편에 속했다. 그런 그가 딱 하나 절차를 무시한 게 있다면, 바로 무희와 사랑에 빠진 일이었다. 카르벨이 한 말은 대놓고 벨 에스피디 황비를 뜻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셀리를 낳아 입궁한 그 점을 꼬집는 것이었다. 죽을 거라면 혼자 죽지, 연금을 받기도 전에 세상을 뜨게 생겼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에스피디 황제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웃으면서 욕하는 유형인가……?’

밉지 않게 카르벨을 노려보던 황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엘로니아에게 상냥히 되물었다.

“데브니가의 영애라고 했던가. 대대로 정령사 가문이라 역시 다르구만.”

오히려 그가 잘해주니 의심이 배로 솟아나는 탓에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갔다. 에스피디 황제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옆에 있던 보좌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깐깐한 인상의 남자가 들고 있던 케이스를 그에게 열어 보여주었다. 에스피디 황제는 그녀를 향해 까닥, 고갯짓을 했다.

“정령사. 이리 가까이 오게나.”

한 걸음, 앞으로 나가니 보좌관이 내려와 그녀에게 케이스를 건넸다. 안에는 황금으로 된 에스피디 제국의 인장이 달린 브로치가 들어 있었다.

‘이게 바로! 연금의 증표나 다름없는!’

엘로니아는 감격에 휩싸여 냉큼 케이스를 받았다. 이게 곧 그녀가 황실에서 인정을 받은 정령사라는 것을 뜻하는 증표나 다름없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예를 갖춘 인사에 그가 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보내며 축하를 건넸다.

“에스피디 제국에서 정령사를 품게 되어 기쁘네. 조만간 다시 보지.”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엘로니아와 카르벨은 위압감이 느껴지는 알현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케이스를 품에 끌어안았다.

‘이날을 위해 살았다, 엘로니아!’

마음 같아서는 황실 복도를 뛰어다니며 제 연금 증표를 좀 보라며 떠벌리고 싶었으나, 카르벨이 옆에 있어 참았다. 그러나 엘로니아에 비해 그는 의외로 차분했다.

‘본인이 제일 바라던 바 아니던가?’

그보다 그가 대체 왜 정령사를 필요로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에스피디 황제와 사이도 나쁘지 않거니와, 리프리와는 좀 애매하다지만 그의 안위가 문제 될 만큼은 아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시선에 카르벨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만간 다시 입궁하겠어.”

“그냥 인사치레로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빈말은 거의 하지 않으시니 앞으로는 흘려듣는 일은 없는 게 좋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로니아는 미심쩍은 눈길로 그를 흘겨보며 물었다.

“그럼 사고를 칠 거라 예상하신 것도…….”

“절반만 믿어.”

“빈말이 없으신 분이라면서요.”

“누가 그래?”

“제 옆에 계신 분이요.”

“착각이야.”

그는 자신이 말을 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으로 무마하고 있었다. 빠르게 말을 바꿔버린 그가 황당하기까지 했다. 카르벨은 태연하게 엘로니아의 어깨를 붙잡고는 휙 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자, 이쪽이야. 또 괜히 이상한 곳으로 가지 말고 내가 직접 안내하지.”

그는 태연하게 엘로니아의 등을 밀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탓에 그녀는 카르벨이 이끄는 방향대로 속절없이 전진해야만 했다. 엘로니아가 발에 힘을 주었으나, 황궁 하녀들이 얼마나 반질반질하게 닦아두었는지 발이 그대로 미끄러지는 탓에 저항은 큰 의미가 없었다.

‘대체 카르벨은 어떻게 이 바닥에서 밀리지 않고 나를 밀 수 있는 거지?’

자연스럽게 그가 이끄는 방향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의 행동에서 황궁이 퍽 익숙하다는 게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뚱한 표정으로 그가 가라는 대로 어영부영 걸음을 움직이며 말했다.

“카르벨이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요. 엄청 중요하거든요.”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 말이지.”

“저 카르벨이 생각하는 것보다 꽤 잘 걸을 수 있어요.”

나름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의견 피력이었으나 그에게는 썩 먹히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던 카르벨이 걸음을 멈춘 건, 엘로니아가 걷기를 포기할 때쯤이었다. 이제는 아예 너는 밀어라, 나는 반쯤 누워 가겠다는 자세로 그에게 기대어 있던 그녀는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복도 벽면에 걸린 거대한 초상화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다 뭐예요?”

엘로니아는 진귀한 광경에 눈을 끔뻑였다. 알현실이 있는 궁이라서일까. 일전에 연회가 열린 곳에서는 볼 수 없던 광경이었다. 카르벨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역대 황족들의 초상화.”

“아아…….”

그중 단연코 눈에 들어온 이는 서거한 헤일튼 공작가 출신의 황후였다. 거대한 초상화 속 조금 파리한 안색의 여자는 서늘한 인상과 더불어 눈을 확 사로잡을 만큼 매우 아름다웠다. 예민하게 올라간 눈매와 웃음기 하나 없이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은 어떤 의미로 정이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뭔가 좀 낯익은 인상인데…….’

초상화와 이길 리 없는 눈싸움을 하던 엘로니아는 애매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란히 걸려 있는 에스피디 황제가 황후보다 더 부드러운 인상으로 보였다. 그 옆에는 벨 에스피디 황비와 아셀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과 분홍빛 눈동자를 지닌 두 사람은 똑 닮아 있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또렷한 콧대와 풍성한 속눈썹까지. 초상화지만 화려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로니아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아셀리 전하는 황비님을 많이 닮으셨네요.”

“그래요? 어머니가 좋아하시겠어요.”

불쑥, 갑자기 귓가에 들려오는 여성의 음성에 엘로니아는 숨을 들이켰다. 삐그덕, 목이 잘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엘로니아의 옆에서 부드러운 음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게 언제더라. 벌써 꽤 시간이 지났네요. 성인식이 지나자마자 그린 것 같은데.”

엘로니아는 펄쩍 튀어 오르듯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에, 에스피디 제국의 황녀님을 뵙습니다!”

드레스 자락을 손가락으로 들었는지, 주먹으로 쥐었는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허겁지겁 건넨 인사였다. 짤막한 인사 끝에 고개를 들기도 전.

“정령사는 아무 때나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야, 엘로니아.”

카르벨의 부드러운 음성이 복도에 잔잔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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