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 또 쉬러 와도 되나요. (44/234)

44. 또 쉬러 와도 되나요.2021.05.02.

카르벨은 퍽 오랜 시간 그녀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아닌가?’

카르벨은 원체 웃지 않으면 서늘한 인상인지라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엘로니아가 민망해질 무렵. 그는 간단한 인사를 남겼다.

“저하를 상대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쉬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평소처럼 웃어 보인 뒤, 방을 나가버렸다. 대외적인 상황에서 주로 짓는 미소가 낯설었다. 엘로니아는 그가 나간 방문을 보며 멋쩍게 중얼거렸다.

“내가 뭐 실수했나……?”

  *** 이른 아침 일찍 리프리가 그녀를 찾았다. 덕분에 엘로니아는 꼭두새벽부터 갑작스럽게 에이미에게 재촉을 당해야만 했다.

“마님, 마님. 눈 뜨세요!”

“에이미…….”

“안 돼요. 지금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고요!”

헤일튼 공작저의 해는 다른 곳보다 일찍 뜨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이들이 푸르스름하게 해가 뜨는 시간에 죄 일어나 있을 수 없다. 에이미조차도 일찍이 일어나 있었던 모양이었다. 엘로니아는 머리를 초고속으로 빗기는 에이미를 반쯤 뜬 눈으로 보며 물었다.

“에이미는 대체 몇 시에 일어나는 거야?”

“저희는 모두 주인님보다 한두 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요. 그래야 시중을 들죠.”

“……나보다 늦게 잠든 거 아니었어?”

“충분히 권장 수면 시간은 지키고 있답니다. 공작님이 그 부분은 칼같이 지켜주셔서요.”

말을 하면서도 그녀의 손은 부지런히 엘로니아의 머리를 땋았다. 그녀의 의상까지 매의 눈으로 확인을 한 에이미는 접객실까지 등을 떠밀었다. 엘로니아는 그와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이 먼저 앞섰다.

‘어제 그렇게 넘어가서…….’

아무래도 보기 어색했다. 닉스가 옆에서 알짱거려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는데, 어제 사라진 뒤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퍼즐 안 맞춰줬다고 삐졌나.’

엘로니아는 나중에 따로 불러서 퍼즐을 함께 맞춰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접객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반듯하게 앉아 있던 리프리가 고개를 돌렸다. 까닥, 담백한 인사에 엘로니아는 본능적으로 마주 인사했다. 그는 어제와 달리 외투까지 알차게 챙겨입은 복색이었다. 엘로니아는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 가시나 봐요.”

“라티에 왕국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예상보다 일찍 돌아가시네요?”

카르벨이 일주일 정도 머무를 거라 했기에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을 줄 알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도 있었다. 더는 둘 사이에서 은근한 기 싸움을 견디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과 동시에 손님을 내쫓은 것 같은 모순적인 기분이 양립했다. 앨로니아의 답에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제가 얼마만큼 있겠다고 말을 했던가요.”

아차 싶은 생각에 엘로니아는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라티에 왕국이랑 에스피디 제국이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는 아니니까요! 오랜만에 오셨으니 적어도 그 정도는 머무르시지 않을까 하여……!”

일주일은 카르벨이 얘기한 기준이었다. 안 그래도 어제 대놓고 카르벨에게 도의에 어긋난다는 지적을 받은 그였다.

‘내가 쉬자고 먼저 권유했는데!’

그런 말까지 들었는데 카르벨의 이야기가 유쾌할 리 없었다. 리프리는 그 부분을 암시하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어제 괜히 마음 쓰이게 한 것 같아 사과 겸 인사드리려고 일찍 뵙자 하였습니다.”

“괜찮아요.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요!”

손까지 격렬하게 휘저어주었으나, 그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엘로니아는 제 말을 입증하기 위해 당당히 물었다.

“카르벨을 부를까요? 아니면 벌써 인사하셨으려나.”

“아직이요. 딱히 반기지도 않을 테니까요.”

하기야. 그냥 말도 없이 떠나면 좋아라 할 듯했다. 이럴 때 보면 은근 애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 잠시 말을 고르던 리프리는 조용히 되물었다.

“형님은…… 별말 없으셨습니까.”

“네, 네. 그럼요.”

그녀의 빠른 답에도 리프리는 그저 덤덤하게 대꾸했다.

“한마디 들으셨나 봅니다.”

“아니,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건 아니에요. 카르벨은 원래 바람에 이는 낙엽에도 질투하거든요.”

질투라는 단어에 리프리의 투명한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희한한 소리를 내뱉는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안 믿는구나.’

그는 이미 카르벨에 대한 이미지가 확고한 모양이었다. 묘하게 미안한 기분인지라, 엘로니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 가면 오래 못 뵈려나요?”

“국교는 자주 하는 편이니 운이 좋다면 빠른 시일 내에 뵙겠지요. 곧 황녀님의 탄신일도 있으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아셀리 전하와 친분이 있으셨죠.”

연회에서 손을 잡고 들어오던 모습이 떠올라 의미 없이 던진 말이었다. 그러나 리프리는 필사적으로 해명했다.

“아닙니다.”

“예?”

“그저 국교로 인해 오래 보아온 사이라 알음알음 대화 정도 나누는 사이입니다.”

“네, 그걸 친분이라고 하지 않나요?”

“비즈니스입니다.”

그답지 않게 제법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엘로니아는 여태 보던 모습과 달리 적극적으로 해명하는 그가 적응되지 않았다. 믿지 않으면 믿을 때까지 설명할 기세였다. 예쁜 사람 옆에 예쁜 사람이 있는 게 무어 대수라고.

‘보통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도 하던데.’

설마하니 그 정도로 빵가루 가문이겠는가. 아셀리 전하는 카르벨과 혼인을 하고 싶어 했고, 리프리 저하는 설마……. 아셀리 전하에게 관심이 있다던가…….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어갈 무렵. 리프리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셀리 전하는 차기 황제로 거론되고 계신 분입니다. 저는 왕국에 있고요. 우려하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단지 이해관계가 맞았을 뿐입니다.”

“이해관계요?”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요. 딱 그뿐입니다.”

리프리의 필사적인 말에 엘로니아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리프리의 눈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그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중을 나가기 위해 엘로니아가 그의 뒤를 따르려고 하자, 머뭇거리던 그가 물었다.

“나중에…….”

“네?”

“나중에 또 쉬러 와도 됩니까.”

어제 했던 게임을 말하는 듯싶었다. 공작저에 있던 내내 그에게 안 좋은 기억만 쌓아준 것 같아 불편하던 차였다. 손님을 찬빵 신세로 만들고 번화가로 도망가질 않았나, 쉬자고 권유까지 했는데 카르벨에게 비윤리적인 사람이라는 뉘앙스의 말을 듣게 하지 않았나. 속으로 매우 미안하던 차였다. 다행스러운 기분에 엘로니아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죠. 그때까지 제가 조금 더 실력을 키워둘게요.”

그제야 리프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16566366946147.jpg

  ***

“데드 경!”

엘로니아는 연무장으로 가 익숙한 얼굴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데드 경은 바짝 긴장한 채로 90도로 허리를 꺾어 우렁차게 외쳤다.

“예비 마님, 오셨습니까!”

“아니, 아니. 그냥 평범하게 해요!”

엘로니아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씨익,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데드 경은 제법 듬직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또 호위가 필요하신가요?”

“아뇨.”

“이 데드가! ……아니시군요.”

가슴에 손을 얹어가며 자부심을 드러내던 그는 엘로니아의 빠른 거부보다 더 빠르게 시무룩해졌다. 급격한 그의 기복에 엘로니아는 큼,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카르벨은 어디 계세요?”

“어? 오늘은 연무장에 안 나오셨는데요?”

뭐? 이 시간에 연무장에 오면 늘 있을 것처럼 말하더니! 엘로니아는 황당함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데드 경은 멋쩍었는지 자신의 뒷목을 쓸어내리며 답했다.

“원래 매일 이 시간에 있으셨는데, 하필 딱 오늘 안 나오셨네요.”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힌다. 그래서 리프리도 그에게 인사 없이 갔나 보다.

‘아니면 서로 얼굴도 보기 싫어서 마주치지 않을 때를 노렸다던가…….’

엘로니아가 답이 없자, 데드 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시면 찾으셨다고 전해드릴까요?”

“아니에요. 리프리 저하가 돌아가신다고 하셔서 제가 마중했다고만 전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괜히 또 어제처럼 이상하게 생각할까 싶어 이번에는 미리 보고를 남기기로 했다. 그러나 그때 엘로니아의 등 뒤에서 느긋한 음성이 넘어왔다.

“저하가 부르시던가?”

목덜미에 스치는 감촉에 엘로니아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는 태연하게 상체를 그녀의 키에 맞춰 숙인 채 웃고 있었다. 놀란 그녀는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기척 좀 내고 와요. 놀랐잖아요!”

“숨기려고 의도한 적은 없었어.”

그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카르벨의 한 팔에는 서류가 가득 들려 있었다. 문득 그가 어제 번화가에 나가느라 일이 밀렸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진짜 바빴나 보네.’

엘로니아는 괜히 머쓱해져 조금 누그러진 말투로 되물었다.

“아까 집무실을 지나올 때는 안 계신 것 같았는데. 일하고 있었나 봐요.”

“오전에 잠시 다녀올 곳이 있었어.”

그의 말이 사실인지 뒤에는 그레이터가 서 있었다. 카르벨은 서류를 그에게 넘기며 물었다.

“그래서, 리프리 저하가 불러 뭐라 하시던가.”

“그냥, 뭐……. 라티에 왕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이랑 이것저것?”

“잘 됐어. 일찍이 가버리니 속 시원하군.”

그는 정말 후련한 듯했다. 그레이터에게 모든 서류를 넘긴 그는 탁탁, 손을 털며 말을 이었다.

“입궁하는 날을 당겨도 괜찮겠군. 폐하께서 워낙 그대를 보고 싶어 해서 말이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데드 경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드디어 정령사로 인정받으시는 겁니까? 축하드립니다, 마님!”

커다란 덩치를 굽히며 그는 두 손을 내밀었다. 마치 악수를 해달라는 듯했다. 엘로니아가 손을 내밀자, 그는 손을 잡고 붕붕, 팔이 떨어져라 흔들며 말했다.

“제가 태어나서 정령사님의 호위도 하고. 가문의 영광입니다.”

온몸이 흔들리는 듯한 거센 힘에 그녀가 휘청거리자, 이를 본 카르벨이 노련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데드 경이 알아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어디 아프, 아프신 곳은 없으시지요?”

“다행히요. 팔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카르벨은 느긋하게 엘로니아의 어깨를 감쌌다. 그는 다른 곳으로 가자는 듯 눈짓을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가지. 들어가서 차라도 하면서 대화하지.”

그리 큰 음성도 아니었는데, 연무장에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 인사를 넘겼다. 어정쩡하게 마주 인사를 받은 엘로니아가 뒤를 돌아 카르벨을 쫓아가려던 순간. 툭, 앞에 있던 그레이터와 몸을 부딪혔다. 순간 그의 품에 있던 서류 중 일부가 후두둑, 바닥에 쏟아졌다.

“어떡해. 죄송해요,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제가 주우면 됩니다.”

그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순하게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서류 중 일부에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서류가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

‘어디서 느꼈더라.’

기억을 더듬던 그녀는 뒤늦게 카르벨의 서재를 떠올렸다. 그녀가 닿지 않는 높은 곳에 있던 한 책. 그 책도 꼭 이런 기분이었다.

0